기간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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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털갈이 하는 서울에 사는 재미
-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를 읽고
1.
도시는 생물이다. 도시의 각 공간은 나름의 생로병사를 겪는다. 그리고 공간은 삶의 배경에 그치지 않고 그자체로 삶을 형성하기 때문에 사람의 생로병사와도 일정한 관계가 있다. 때로 공간의 변화가 아픔이 되지 않던가?
소년기를 보낸 동네가, 스물 무렵 누비던 거리가 어느새 세련되게 변모하면 낯설고 헛헛한 마음이 든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도 불가역이다. 기억은 공간에 의존하여 보존되기에 공간을 따라 기억도 속절없이 훼절된다. 공간의 변화로 한 시절이 저물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다층적이다. 강산처럼 사람도 흐를 것이다. 한 세대가 물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경우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문제가 된다. 강산과 달리 산만한 건물도 3년이면 들고 난다. 그 거리를 살아간 기억이 깊이 깃들 새가 없다. 대로에는 이미 사람의 감각과 행태에 비하여 너무도 장대한 커튼월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늘 새로워 늘 낯설어지는 서울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근래 골목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그들이 자신이 생활한 동네가 아님에도 부러 오래된 동네를 순례하며 향수를 탐미하는 것은, 그래서 오래도록 개발의 과정에서 소외된 지역들이 이제 낡음을 특색으로 부상하는 잔혹하고도 수상한 날들을 이어가는 것 역시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자기 삶의 부표를 찾으려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수십 년의 시간을 간직한 깊은 골목을 찾아 기억을 확인하고 위로받는 것은 도시의 사회적 병리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귀향이다. 나는 오래된 벽돌 조적조 건물에 끌린다. 이제 한 번 철거되면 다시 등장할 수 없는 그 시절의 대문(사자머리 손잡이라던지), 창호(규격화되지 않는 집장사의 솜씨)가 아련하여 찍은 적이 있다. 무례한 일이기에 황망히 도둑사진을 찍는 것 같았다. 그 벽돌가옥은 엄연히 누군가의 주거로 삶을 담아내는 공간일진대 애잔한 풍경으로 담아가다니. 짧은 순간에 현관문이 열리지 않기를 빌었다.
▲ 신당동 어느 건널목의 벽돌 조적조 건물. 시루떡처럼 2층, 3층, 옥상의 벽돌 쌓임이 모두 다르다.
건축주가 형편이 되는대로 증축한 것이리라. 욕망이 보이고 시간이 읽힌다.
내가 좋아하는 건축이다.
2.
비록 주민을 대상화하는 “가난 포르노”와 같은 행렬일지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난 개발의 과정에서 소외된 지역에 외지인의 발걸음이 이어진 것은 득이 되었다. 과거 낙후한 주거지역에 대한 주택재정비사업은 철거를 위시한 폭발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주민 대다수를 내쫓으며 지역공동체를 분해하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몇 개의 대형 아파트 단지를 남기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새겨진 그 지역의 특색을 말소하며 사회경제적 생태의 다양성을 훼손시켜왔다.
그러한 사정에 비추어 오랜 동네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겨냥하여 골목 깊숙이 개성 있는 상업공간들이 점점이 스미면서 모처럼 활력이 도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도시의 한 공간이 생로병사의 단계에서 쇠락하였을 때, 철거가 아니라 변용을 모색하며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재생은 주민의 생활안정에도 기여한다. 물론 소위 뜨는 동네가 겪는 딜레마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분출되며 각 지역이 차례로 명멸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생물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도시의 진통이 아닐까?
신촌에서 홍대로 다시 상수와 합정으로 이제는 망원으로 소위 핫플레이스가 옮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서울이라는 생물이 털갈이를 하는 것 같아 재밌었다. 아스팔트는 피부가 되고 지하철은 혈관이 되는 서울. 지하철이 복잡하게 뻗어있기에 어느 곳이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부상할 기회가 있다. 지역이 한껏 무르익으면 대형 프랜차이저가 상승한 임대료를 감수하며 밀고 들어온다. 프랜차이저는 어느 곳에서나 균등한 품질을 내는 것이 미덕이기에 스스로 특색 있는 거리를 만들지 못하고 뒤쫓을 뿐이다. 설혹 이익이 크지 않더라도 상징적인 장소에 자리 잡고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프랜차이저가 늘어날수록 그 지역은 다시 흔한 동네가 되며 식어간다. 근방의 다른 공간이 대체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프랜차이저야말로 지역의 생애를 순환시키는 분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기능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저 골목 깊숙이 여전히 남은 보배 같은 가게들이 있다. 서울 사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내게도 특별한 공간들이 있다.
풍납동의 팥칼국수, 성내동의 포크스테이크, 방이동의 어복쟁반, 노유동의 양꼬치, 성수동의 보쌈, 신당동의 생태찌개, 광희동의 소내장무침, 중림동의 설렁탕, 명동의 동파육, 혜화동의 닭도리, 그리고 종로에는...
서울에서 나서 고향이랄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단골가게를 만들며 정붙일 고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에 나열한 공간들은 나의 기호와 발걸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털갈이 하는 서울이 좋다. 서울생활이 즐겁다. 백제의 유적에 가로막혀 개발이 속절없이 지체된 나의 동네를 사랑한다. 동네와 함께 나이 들며 지하철을 따라 사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푸른숲, 2016.
* 위 책은 친구사이 소모임 '책읽당'의 '17.4월 선정도서로, 당일에 언급된 감상과 토론을 참고하여 쓰여진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친구사이, 책읽당 회원 / 공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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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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