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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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7
: 결혼 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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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만 개의 삶과 사랑, 아픔과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매력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겨봅니다. 특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삶이 내 삶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느낌은 배가 되죠. 영화로 만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난 기분이 울적해지면 주로 집 뒤 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봄밤엔 바닥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목련의 죽음을 보고, 여름밤엔 열대야의 바람을 맞으며 괜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가을밤엔 봄, 여름 내내 꽃을 피웠던 자리자리를 더듬어보고, 겨울밤엔 가로등 불빛에 비쳐 떨어지는 눈망울들을 보며 우울을 즐기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만 싶다. 바람이 부는데, 어디서 부는지 정확히 아는지. 북태평양 기단이라든지, 오호츠크해 기단이라든지, 나도 고교시절 지구과학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흐름으로 생성되고 불어오는지. 얼마나 덥고 습한지, 차고 습한지, 혹시 아는지.*
나는 또 그들에게 묻고만 싶다. 자연스러운 건 무엇인지. 어떤 점이 다르고 구분되는지.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것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인류 역사상 길은 한 가지 길이었는지 무수히 갈라진 길이었는지. 무엇이 인간의 섭리고 진리인지. 감히 우리의 사랑에 간섭할 권리가 있는지.

여름이었다. 새벽 2시였나, 무더위로 잠을 설치던 밤, 나의 레몬 우주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희에게 문자가 왔다. 산책하자. 우리는 하천을 따라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걸었다. 그에게 궁금한 것도 나는 참 많았다. 단순한, 그럼에도 나에게는 대단하게 다가왔던 것들을 물으며 걷다가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곤 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얘기는 조금 진지해졌고, 스물 후반이었던 그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부모님이 결혼 얘기는 안 해요?"
대학 4학년이기도 하고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아직 취업도 안돼서 진지하게 물어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압박 같은 건 있다고 말했다.
"그럼 취업하면 결혼할 거예요?"
글쎄, 허허, 하며 웃는 그는 그 문제로 전 애인과 싸웠다고 말했다. 사실 자기는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하게 되면 뭐 잘 살지 않을까? 그런 식의 대답.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가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쩌면 그 무엇도 정답은 될 수 없을 거란 생각. 어떤 삶을 선택하든 살아가는 자의 몫이니까.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는 나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우리는 태어난 이래, 이성애적 사회 속에서, 이성애자 부모에게서 이성애적 사고를 배우며 청소년 시기를 보낸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아하니, 사귀니라는 식의 어른들의 짓궂은 질문은, 동성친구끼리 친하게 지낼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다가온다. 남녀가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남자아이에게는 남성적인 면을 강요하고, 여자아이이게는 여성적인 면을 강요하는 사회. 그러한 환경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도 어느 정도 이성애적 사고를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적인 것은 뭐고, 여성적인 것은 또 무엇인가. ‘뭐’라는 악센트와 ‘무엇’이라고 발음하는 부드러움의 차이인가. 청소년 시기에 나는 그런 사고방식에 의문과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물음은 사회의 흐름과 같이 바뀌어야 할 때이다.
자연스러운 삶. 그러나 어떤 삶이 자연스러운 삶인가.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만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신은 있는가.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이들이 지은 법이나, 제도, 사회문화 등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불안하고 흔들리는 사회에서 대항하고 반발하며 분노를 가지고 살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이 아닌가.
그리고 올해 여름, 미국에서 역사적인 날이 있고 난 다음날, 서울에 올라가느라 바빠 어떤 기사도 접하지 못 했던 나는 서울에서 만난 친구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었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리기 전날 밤, 미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친구에게, 왜 한국도 좋잖아, 라고 말했었던 나. 친구는 ‘지금 미국을 봐, 내가 돈만 있고 영어만 할 줄 알았다면 바로 비행기 타고 떠났을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기웃했다. 그 이후 핸드폰으로 기사를 접하게 된 나는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동성결혼 법제화.
그리고 지금껏 내가 품은 생각들과 일들을 상기하며 나는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뽑았다.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은 제목에서 보이는 그대로 결혼에 대해 얘기한다. 영화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부모님을 속이기 위해 여자와 위장결혼을 시도하는 동성커플의 이야기다. 영화는 동성애자의 삶은 물론, 동서양 문화 차이와 부모-자식 세대의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미국에서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대만인 웨이퉁은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상대로 점찍어둔 여자와 선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미국인 의사 사이먼이라는 동성애인이 있다. 사이먼은 웨이퉁의 아파트 세입자인 여류 화가 웨이웨이와 가장(假裝)결혼이라는 시나리오를 세운다. 그녀는 영주권을 얻게 되고, 웨이퉁은 부모님의 간섭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결혼 피로연은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인물들과의 대립과 문화 간의 대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피로연의 배경은 뉴욕이지만 형식은 동양 전통(대만전통일 것이다)으로 치러진다. 집안도 동양식 인테리어, 가령 도자기나 한자로 쓴 문구를 집안 곳곳에 배치하는 정성까지 들인다. 그러나 법적인 절차를 밟을 때는 간단하게 넘어가고만 만다. 탐탁지 않아 하는 부모님 뒤로 누구보다 더 언짢을 사이먼의 인내에 감탄스러움과 그런 애인을 두었다는 부러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모는 하루빨리 손주를 보길 원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저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다. 극빈처럼 받드는 사이먼의 태도에는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가장신부 웨이웨이에게는 어머니 자신의 목걸이나 반지를 줄 정도로 잘해준다. 현실을 말한다 한들, 결코 남자애인인 사이먼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며 괜스레 슬퍼질 정도다.
충격적이게도, 웨이웨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사이먼의 배신감과 분노는 극의 갈등에 절정을 이루고 가정의 평화를 위했던 사이먼의 계획은 뒤틀리고야 만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면 봄이 찾아오듯 관계의 대립은 눈 녹듯 사라진다. 소홀해진 관계는 아버지의 쓰러짐과 웨이퉁의 고백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마지막의, 자칫 스포라면 스포랄 수 있어 말하지 못하는 웨이퉁의 아버지의 대사는 적잖은 반전을 주고서 끝이 난다.

나는 사실 이 영화를 퀴어영화라기보다는 가족영화라고 불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결혼을 준비하고, 아들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나 그를 둘러싼 주변의 코미디적 요소들이 가득 담겨 유쾌한, 그러나 약간은 씁쓸하기도 한 장면들이 결코 퀴어적 요소에만 국한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동성애를 주 내용으로 다룬다고 하여 퀴어영화로 분리되지만, 훗날에는 가족영화로 소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편혜영 단편소설「몬순」을 읽고. “몬순 같은 거요. 그렇게 규모가 큰 바람은 언제 방향을 바꾸는지, 그 순간을 미리 알 수는 없는지, 그런 건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런 거에 대해 잘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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