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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전국퀴어자랑 #5> 경상도 함안 - 길을 잃는 즐거움 : 게이로서 시골에 산다는 것
2015-09-29 오전 05: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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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9월 

[전국퀴어자랑 #5] 경상도 함안 - 길을 잃는 즐거움: 게이로서 시골에 산다는 것

 

2015년을 맞이해 친구사이 소식지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 <전국퀴어자랑>. 일요일이면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오지도 않고, 송해 선생님도 없지만, 팔도 방방곡곡에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퀴어들, 그리고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신명나게 소개합니다. 그럼, 다 같이 외쳐보아요. 전~국! 퀴어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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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이번 전국퀴어자랑의 주인공은 친구사이 초창기에 왕성한 활동을 하시다 귀농하신 '윤석민'님입니다. 당당한 커밍아웃을 마다하지 않는 그가, 시골 게이를 자처하며 경상도 함안에서 살게 된 까닭은 뭘까요?

 

지금부터 그의 거침없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함께 감상하시죠!

 

 

 

 

 

 

#1. 2002년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쭉 살다가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들어가 노동운동의 꿈을 키웠던 난, 대학 때 그어진 빨간줄 덕분에 면접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떨어지고 난 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리고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군인 아버지의 응원 덕분에 건축학 공부와 학위를 핑계로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1991~95년, 꿈같은 5년 간의 도쿄 유학생활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기억을 각인한 시간이었다.

 

왜냐면, 거기서 같은 기간에 일본 문부성의 국비장학생으로 온 친구와 달콤한 연애의 서막을 열었으니 말이다. 하하. 그리고 다시 서울로 리턴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둘 다 초창기 친구사이 회원으로 등록하고 같이 활동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 친구는 행사 참석 정도였고 난 상담부장을 맡아 5년 동안 적극적으로 게이인권에 관계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나댔다. 참고로 97년 노동법 개악저지 노동자 시위에 처음으로 무지개 깃발을 들고 투쟁현장에 게이로서 지지와 연대를 외치며 함께했다. 노동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폭발적이었다.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 같이 참석했던 레즈비언 친구가 무지개 깃발을 몸에 두르고 서 있는 사진이 <뉴욕타임즈> 표지를 장식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투쟁의 시간이 일상에서 만나 10년 이상 사귄 애인과의, 게이인권이나 삶을 바라보는 간극을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결혼과 더불어 우리의 달콤했던 시간들도 속절없이 종말을 고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결혼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성소수자로서 게이인권이 좀 더 진보된 사회였어도 우리가 헤어졌을까?’라고...

 

그러나 미련은 없었다. 세상에 뭔들 영원한 게 있기나 하겠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하하.

 

 

#2. 유나바머를 꿈꾸다

 

답답한 대도시. 서울과 도쿄 생활 내내 나를 짓눌렸던 화두. 녹색, 생태, 환경, 공동체, 대안건축이나 대안적인 삶. 그리고 내가 지향하는 유물론적 아나키스트. 이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자신 내면의 소리를 충족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거기에다 10년 이상 사귄 애인과도 관계가 아작(!)난 마당에. 뭔 미련이 있겠냔 말이다.

 

"그래.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한 번 살아보자."

 

직장을 객원으로 돌려놓고 미련 없이 고향집 창원 인근의 시골로 유턴했다. 운 좋게도 내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물려준 5000평이라는 시골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이 고향 타라 땅을 다시 밟고 삶의 의지를 다지듯이. 서울생활을 쓰레기통에 폐기처분하듯 미련 없이 팽개치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향해. 요즘 말로 하면 ‘자급자족 유기농 생태라이프’를 순전히 내 개인의 힘으로 실현할 듯 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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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풀어 얘기하자면 내가 가진 유일한 라이센스인 건축사 자격증(라이센스를 믿지 않는 주의자인 나는 그 흔한 운전면허증이나 컴퓨터 자격증도 없다. 심지어 주민등록증도 지문날인을 거부해 여권으로 대신한다) 하나로 개인 건축사 사무소를 내 더 넓은 작업실에 짓고. 일 년에 2~3개월이면 끝내는 프로젝트 하나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해외여행 등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조경, 정원을 가꾸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테오도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 미국 자본주의에 야합하며 오로지 돈만 좇는 테크놀로지 광신자들(!)에게 우편물 폭탄 테러를 저질렀던 나홀로 테러리스트. 그리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 나 역시 말만 앞세우는 운동이 아니라 "몸으로 사는 삶"을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직접 실현하고 싶었다.

 

 

#3. 도발적 커밍아웃

 

사춘기. 성정체성으로 홀로 고민하다 게이나 동성애에 대한 서적이나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대학입학 하자마자 일종의 자신감을 획득. 아버지와 12살 위인 형에게 깽판 치듯 당당히 커밍아웃을 결행했다. 요지는 "왜 이런 이성애 중심의 더러운 세상에 날 낳아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행복추구권마저 고민하게 만드냐"고 말이다.

 

근데 아버지의 첫마디는 예상(!)대로 "미안하다"였다. 그리고 덧붙여 당신이 살아 있는 한 비빌 언덕이 돼 주겠노라고. "네 방식대로 살아라"였다. 당시 어렸던 나는 아버지의 반응은 부모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친구사이 상담부장을 하며 유교적,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인습이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고통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난 부모란 자식의 진정한 행복을 빌어주는 게 부모로서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라고 믿었으니깐. 그 믿음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반면 형의 반응은 나를 경악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형이랑 손잡고 병원 가보자"였으니 말이다. 그 반응에 발끈한 나. "멍청하고 무식하긴. 니 사춘기 여자 꽁무니 쫓아 다닐 때 난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어. 어디서 주워들은 싸구려 지식과 편견으로 동생을 두 번 죽이냐.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사과를 받아냈다. 이렇듯 나의 첫 커밍아웃은 가족과 사회를 향한 발칙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가족에게의 커밍아웃의 성과로 이후 대학원이나 직장에서의 커밍아웃은 한마디로 장난이고 껌이었다. 왜냐면 그 어떤 상황도 대처하고 헤쳐갈 자신감이 있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내 주변의 선후배나 직장동료는 커밍아웃 전후 상황이 변하거나 달라진 케이스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다들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깐. 재미없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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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끔 한 다리 건너 술자리나 모임에 가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석민씨! 애인 있어요? 언제 여자친구랑 같이 술 한 잔 합시다." "아니. 잠깐만요. 제 애인이 왜 당연히 여자라고 확신하십니까? 남잔데요." 또 이를테면 "석민씨는 왜 결혼 안 해요?" "그 질문 참 무식하고 폭력적이라는 거 아세요? 그 이면엔 당신이 결혼했기 때문에 또는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는 전제를 깔고 물어본 거니깐요. 전 뭐 지금의 이성애 중심의 결혼제도에 전혀 가치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내 개인적인 커밍아웃은 상대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게 아니라 자신이 한낱 이성애자일 뿐이라는 것을 강제로라도 일깨워주는 방식이 되고 만다. 이런 나를 두고 고등학교 후배인 돌팔이 전문의는 "형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고 한다. 이 후배 역시 오래전에 가족과 지인들에게 오픈하고 지 꼴리는 대로 살자는 주의다.

 

 

#4. 순박한(!) 시골게이를 꿈꾸다

 

사실 오늘날 같이 교통수단이나 컴퓨터, SNS 등 정보교환이 빈번한 시대에 대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나야 대도시의 소음을 피해서 좀 더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사람인지라. 창원 인근의 시골, 정확히는 함안으로 내려오고 나서 한동안은 그 무엇보다 소음으로부터의 해방감에 만족했다. 그 누구도 내가 원하지 않은 시간대에 내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을 불허했으므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랬던가. 어느 날 작업실 맞은편 산 세 개를 허물고 2만평의 크레인공장 허가건이라는 날벼락이 내게 떨어졌다. 세상에.

 

온갖 소음과 테크놀로지, 무한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롤러코스터에서 사뿐히 내려서, 일종의 해방구에서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나 싶더니. 거기다 건강 하나라면 자신있어 하던 어머니의 건강 악화까지. 난 졸지에 시골에서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 대신 삼시세끼 밥하고 빨래하는 식모로 전락했다. 그리고 할머니들과 함께 언론 동원, 지역 신문에 얼굴 팔고 글쓰기에 공장허가 반대 시위까지. 나서기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 내겐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세수를 위해 허가를 주장하는 탐욕스런 군수, 공무원과 허가 반대 싸움을 시작. 장장 7년 동안의 지난한 싸움으로 결국 허가취소를 이끌어 냈다. 에고 내 팔자......ㅠㅠ

 

그래도 그 사이 원래 목적했던 나만의 작업실과 미래에 꿈꾸는 소박한 수목원의 밑그림을 다졌으며 한 살 아래 여동생과 상의해 어머니를 시설 좋은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또 한참 아래 게이 작업조교(?) 하숙생이 인근에 회사를 다니며 내 작업을 틈틈이 도와주고 있다. 물론 애인사이는 아니다. 둘이 취향 차이가 극과 극이므로. "세상에 그저 주어지거나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혹 있다 해도 그것은 독이다" - 이것은 게이 권력이나 소수자 인권에 대입시켜도 무방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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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5천여 평의 땅에 테마별로 조경을 하고 작업실을 짓고, 산책길을 내며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했다. 시골 출신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에 나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는 동안 솔직히 노동일을 해 본 기억이 없는 내게 그 일은 한마디로 체력이나 인내심에 대한 도전이었다. 거기다 대학 못간 누나의 극심한 반대까지. 결국 자신, 주변과의 싸움에서 난 이겼다. 봄이면 수선화와 복사꽃 축제, 여름이면 능소화와 더불어 3만 송이 상사화 축제, 그리고 가을엔 국화와 대봉감 축제.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는 근성이 생기더라.

 

나 역시 그 노동 속에서 살아 있음의 행복을 맛보았으며 내부의 뿌듯한 생명력을 확인하였다. 누군가 현대 신자유주의를 ‘자본을 더 많이 가진 자에게 싹 쓸어 힘을 몰아주는 폭력적이고 야비한 고스톱 판’에 비유했다. 노동자를 노동의 즐거움에서 소외시키고 그들만의 착취질서를 대대손손 유지하기 위한 야비하고도 비인간적인 천박한 이즘이라고 했다.
"제발... 일 하지 않는 자여 처먹지도 말라!"

 

 

#5. 소통의 그윽함 그리고 아름다움

 

내 작업실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철학이나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다. 나이 대는 천차만별. 가장 자주 방문하는 지인들은 대부분 10~20년지기 친구들이다. 대학 선후배이거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스트레잇과 게이 비율은 50대 50.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다들 지금의 결혼제도에 가치를 두지 않는 자발적 독신이라는 점이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들르는 사람은 나와 연배가 비슷한 부산의 여고 선생님과 순천의 한 고등학교 특수반 선생이다(아쉽게도 두 분 다 여자다). 하지만 내 작업실에서 서울에서 내려 온 게이&레즈비언 친구들 모임이 있을 때 같이 어울리는 내 대학 선후배들은 졸지에 ‘성적 소수자’로 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학 때부터 줄곧 생각해 온 개인적인 생각인데, 성소수자 인권이나 동성애 문제는 이해나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 중심의 인습, 편견에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이 세뇌되고 오염(!)된 의식을 강요 받아왔으니 말이다. 세상에, 이성애중심의 가치로 찾을 수 있는 소수자의 행복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그들만의 야만적(!) 질서에 성소수자의 권리나 균형을 맞추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보다 교육이 가장 빠른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게이인권도 역시 다양한 성이나 삶의 가치가 통용되어지는 사회통념으로의 재편이 활동의 최우선 순위에 놓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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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삶은 기적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문명비평가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의 단행본 타이틀)

 

"형 이 좁은 시골바닥에서 그렇게 여기저기 커밍아웃하다 안 좋은 소문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가끔 컴퓨터 수리기사가 오는데도 이반시티 싸이트를 메인화면에 띄워 놓고 별 신경도 안 쓰는 나를 두고 같이 동거하는 녀석이 가끔 하는 말이다. 그 말에 난 "뭐 어때. 동성애가 뭐 대단한 거라고. 삶이 더 스릴 있고 짜릿하고 지루하지 않아서 좋지 않아?"라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커밍아웃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님을 난 잘 알고 있다. 커밍아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을 때 하는 것임을. 참고로 지금 내가 게이라는 사실은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아주 미미한 부분일 뿐이다. 한때 나의 가장 힘들었던 청춘의 고민에서 공중분해 돼 버렸으니 말이다.

 

한 살 아래 뒤늦게 결혼한 여동생 왈, "오빠. 오빠가 만약 교회를 일주일만 나오면 당장 현금으로 천만 원 줄게."라고 하면, "됐어 이뇬아. 넌 왜 그렇게 날 교회로 데려가려고 안달이야.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에, 아나키스트인 나를?"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면 동생은 "죽어서 오빠를 천국에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자다가도 숨이 막혀."라고 하고, 그럼 나는 "야 이뇬아. 지금 교회 다니는 인간들이 가는 천국, 내게는 지옥이다! 알면서“라고 얘기한다.

 

개신교의 소수자인권법 반대를 비아냥대는 나를 잘 알면서도, 내 생의 든든한 지원군인 동생은 틈날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떡밥을 던진다.

 

삶의 다양한 가치여 영원하라!!

 

 

 

글, 사진 - 윤석민(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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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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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5-09-30 오후 23:57

반갑습니다 선배님
얼굴을 뵌 적은 없지만, 글 속에서 에너지가 팍팍 전해져서 궁금해 지는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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