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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2 : 50-60년대 언론에 소개된 동성애
2015-04-01 오전 05: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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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3월 

동성애가 예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1950-60년대에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들의 사랑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제 시기만 하더라도 '신여성'에 대한 조명이 있게 되면서 동성간의 자유연애, 레즈비어니즘 또한 일정하게 소개된 바 있습니다만,1) 되레 역사가 짧은 그 이후 시기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편에 속합니다.
 
이 시기의 동성애 문화에 대해, 게이의 것에 한정되어서는 구술 채록을 통한 선구적인 연구가 있습니다만,2) 구술로 들어가기에 앞서, 그 당시의 신문·잡지에 실렸던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의 언론이 지금의 눈에 비추어 동성애를 제대로된 방식으로 조명했을 리 없고, 따라서 언론에서 다뤄진 동성애로 당시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예단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따르겠지만, 또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동성애의 실체를 넘어서 당시 언론이 동성애를 다루는 특정한 방식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거리들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료로는 일제시기, 50-70년대에 걸친 동성애 관련 일간지·주간지 기사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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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사피엔스 –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해부한다(15) - 성애(8)」, 『경향신문』 1970.8.13., 5면.
 
 
 
1. 동성애 - “정신병”, “특수환경”, “치정살인”
 
동성애가 1990년 WHO의 정신병 목록에서 삭제되기 전까지, 동성애는 명실상부한 정신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동성애를 다룬 기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정신병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동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사람이 “이것이 혹 정신병이 아닌지”, “혹시 치료가 가능한지”를 상담하는 내용이 있고, 그에 정신병이 맞다고 진단하는 정신과 의사의 말이 이어집니다.3) 또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성도착의 일종으로 정의내리고, 수간과 엮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4) 그리고 이러한 정신병은 고치기가 매우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면서, 치료기간은 10년 이상으로 잡는 기사도 눈에 띕니다.5)
 
또는 동성애를 일시적인 사춘기의 성적 충동으로 보고, 20세가 지나면 해소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즉 “동성애도 좋기는 좋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치 못하매 이성애를 구함이 당연 이상의 당연사”라는 주장이 이를 대변합니다.6)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성욕이자, 이성애에 비했을 때 미완성된 성욕이라고 설명하는 셈이지요.
 
언론의 시선이 이렇게 고정되어 있으므로, 언론에서 다뤄지는 동성애는 “평범한 일반사회”의 것도 있지만, 주로 “특수환경”에서의 사례들이 반복 소개됩니다.7) 또한 소개되는 방식도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치정살인”의 사례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다뤄집니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주로 언급되는 상황들은, 연예계의 작곡가-가수 사이 사제지간의 게이 스캔들,8) 항문섹스 강간,9) 군대에서의 연애,10) 감옥에서의 삼각관계,11) 혹은 걸인들 간의 동성애 등입니다.12) 또한 여성 동성애의 경우, 대개 “일생 직업여성으로 살면서 서로 독신으로 지내자”고 맹세하는 식으로 그들의 관계를 굳히다가,13)그것이 한쪽의 변심에 의해 깨졌을 경우 치정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소개됩니다.14) 이렇게 동성애는 당시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종의 스캔들, “특수한” 가십거리로 지면을 통해 소비됩니다.
 
재밌는 것은, 이들 “특수환경”에서의 동성애와 달리, 지식인, “중류사회”에서 발생한 동성애의 경우에 언론에서 다루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는 점입니다. 1968년 5월, 한국탄닌공업주식회사의 회장이자 고시위원을 역임한 윤주복(尹柱福, 66) 씨가 피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이(李)모군(19)과 변종국(邊鍾國, 20)이었는데, 이들은 사회 저명인사인 윤 노인과 동성애 관계를 맺고 용돈을 받다가, “유학을 보내주겠다”던 윤노인의 말이 지켜지지 않자 홧김에 그를 살해했습니다. 보통 동성애 치정 기사는 지면 한 귀퉁이에 외국의 가십들과 함께 엮여 다뤄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건의 경우 “중류 이상의 환경”에 있는 이들이 이런 일을 벌였음을 들어 큰 헤드라인과 함께 짐짓 ‘사회문제’로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15) 
 
더욱 희한한 것은, 이 사건을 두고 “우리나라에선 첫 케이스”라 말하는 대목인데,16) 동성간의 치정살인은 앞에서 보듯이 남녀를 불문하고 일제시기 이래 줄곧 있어왔습니다. 당시 기자의 눈엔 왜 그 이전의 사례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몰랐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이 사건이 그전의 “특수환경” 사례와는 그만큼 분리취급되었던 까닭이 아닐까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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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범 두 대학생 검거」, 『동아일보』 1968.5.1., 3면.
 
 
 
더불어 일제 시기에도 이른바 유명 인사의 인척인 여성들이 동성애 관계를 맺다가 동반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양가집 지식여성이라 사회적 충격 커”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대서특필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한 “사회명사 제씨”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17) 다른 동성애 동반자살 사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보도형태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언론의 기사와는 달리, 이는 동성애가 ‘실제로’ 하위계층, 혹은 “특수환경”에서만 벌어졌던 것은 아니라는 반례가 됨은 물론, 그 ‘실제’와 상관없이 동성애가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특수상황”의 전유물로 주변화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2. 선별된 소수성과 일반화된 남성성
 
언론에 노출된 동성애자가, 그것이 실제 사례를 다룬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당시 실제 동성애자들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도 강조될 텐데, 언론의 기사를 보고 “아 저때 동성애자들은 저랬구나”라고 신기해하기에 앞서, 언론들이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저런 “특정” 동성애 행위를 가시화하고,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문제시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좀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서는 이 점들에 대해 좀더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 여성 동성애를 다룬 기사 중엔 “기지촌” 여성, 이른바 “外軍”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의 경우들이 많이 소개됩니다. 남성에게 염증을 느낄 법한 “특수상황”에서 꽃피는 동성애와, 그것이 치정살인으로 귀결되는 도식은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습니다. 헌데 이들 중에 주목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1958년 2월 20일 경기도 파주에서 “위안부” 최종애(崔宗愛, 31)씨가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던 인계순(印啓順, 31)씨를 소총 대검으로 난자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18) 이 사건은 이후 법정에서의 피고인의 증언은 물론, 살해 당시의 정황을 유추한 재연까지 곁들이며 ‘스캔들’로 다뤄지게 되는데,19) 피고의 범행동기는 다름아닌 “남편 역할”이었던 인계순의 “축첩”, 즉 다른 동성애 여성을 “첩”으로 맞아들인 일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남성들은 기혼 중에 첩을 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그러한 남성의 ‘전형’이 여성 동성애 커플 중 “남편 역할”을 맡은 이에게까지 옮겨져 수행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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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전말 6 : 동성간의 치정살인사건」, 『동아일보』 1958.7.17., 5면.
 
 
하나의 사례를 더 보기로 합니다.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지만, 나아가 여성 동성애의 경우, 남녀관계를 기준으로 한 “불감증”으로 간주하는 기사가 있어 흥미롭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창간된 도색잡지 『희망』(!)에 실린 기사인데, 여성의 동성애적 기질은 “불감증”의 일종으로 “남성에 대하여 일종의 ‘반항심’을 가지게 된 여성”에서 나타날 수 있으며, 뒤이어 “자타가 인정할 만한 미인”인 경우에도 “강한 자의식” 때문에 남성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불감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20) 여성, 혹은 동성애 여성의 성욕을 철저히 남성의 눈으로 재단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여성성, 혹은 성소수성은 본래 ‘남성성에 빗댄 무엇’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언론에서 다뤄진 ‘성소수성’의 경우, 그것은 철저히 ‘남성성’의 유비, 혹은 반대급부로서 자리매김되고, 그 기준을 통해 선택되고 윤색되고 신기한 스캔들로 조명됩니다. 위 둘의 기사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 동성애를 다룬 기사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일반화’된 형태의 무엇은, 일반화된 ‘성소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배경에 있는 일반화된 ‘남성성’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보도’된 성소수성은, 그 ‘남성성’의 규범을 깼을 때 비로소 ‘보이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반적인 ‘남성상’은 동성애 관련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명되었을까요?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에서는, 동성애가 “통념”과는 달리 남성에게도 많이 있는 현상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성의 동성애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통 남성은 여성처럼 연애에 깊이 빠져들어 “얼싸안고 눈물을 졸졸 짜”지는 않으며, 여성에 비해 “비위좋고 염치없고 뱃심좋”기 때문에 그들의 연애가 특수한 형태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이러한 일반적 남성상에 역행하는 동성애 남성의 “기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과연 사내끼리 A가 B를 두팔로 목을 껴안고 여드름이 툭툭 뵈여져 나온 번주그레한 뺨과 뺨을 부딪치면서 "컷스"의 "갤리쿠르치"를 연주한다면 그에서 더 해괴망측한 꼬락서니가 어디 있으며 가령 더벅머리 노총각이 14-5세 미동에 홀딱 반하여 가슴을 태우며 "사랑하는 총남이여! 나는 그대가 그리워 죽을 지경일세! 그대의 보등보등한 두 뺨, 그 샛별같은 두 눈 그러고 붉고 생족한 익은 앵두같은 입술! 아......"
이같이 마치 이성에게나 하듯이 艶書를 쓰고 앉았는 꼴을 옆에서 본다면 그에서 더 징그럽고 우습고 못난 자식놈이 또 어디 있겠는가-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지?

- 春川 李石薰, 「동성애만담(1)」, 『동아일보』 1932.3.17., 5면.

 

 
이처럼 연애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일반적 ‘남성상’에 미달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남성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역시 알콜중독으로서 “정신병”의 일종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1969년 『선데이서울』의 기사인데, 거기서 민병근(閔秉根) 박사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또 여자보다도 술친구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다분히 동성애적 경향이 있기 마련”이라고 설명합니다.21) 연애에 너무 빠져들어도 문제지만, 연애를 너무 멀리하고 술친구만 좋아하는 것 또한 “동성애적 경향”으로서 바람직한 ‘남성상’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여성과의 관계에서 ‘남성상’이 어떻게 상반된 방식으로 규범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예를 더 소개합니다. 1939년 『조선일보』에서는 동성애 여성의 삼각연애 치정살인에 대해 정신분석적 논평을 실었는데, 여기서 의학박사 명주완(明柱完)은 동성애로 기운 여성들을 “변질자”로 규정하면서, 살인으로 치달은 그들의 질투를 바로 “변질”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헌데 여기서 그는 “변질된” 질투를 설명할 때 “변질”되지 않은, 으레 있을 수 있는 질투의 예를 들면서 “남편이 매일 밤술만 먹고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싸움을 걸고 또는 울기도 하고 이러는” 경우가 “가장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질투”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22)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 정도의 질투를 사는 행위는 “정도가 輕한”, ‘일반적인 남성’이 으레 해도 될만한 짓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당시의 동성애 관련 기사 속에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단편적인 범죄상으로 낙서하듯이 소개되고 있는 동성애의 모습 이전에, 동성애를 그렇게 언급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영부영하며 칼춤을 추고 있는 ‘남성성’ 그 자신입니다. 당시 남성성의 기준은 그렇게 그들의 자의적인 기준을 통해 ‘선별된’ 성소수성을 스캔들로 만들고 문제로 삼았던 셈입니다.
 
 
3. 情事 아닌 “情死” : 연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과 거기에 묻힌 동성애
 
그러나 이 시기의 '정상성'은 이러한 연애의 구체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연애 자체'의 위상 또한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情死”로 귀결된 연애 기사입니다. 지금은 정사라는 말을 ‘情事’라는 뜻으로 보통 이해하지만, 이 시기는 달랐습니다. “情死”, 즉 연애감정이 극에 이르러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의 경우를 당시 언론은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왜 이 때의 언론은 연애에 대해서, 그것도 “동성애나 이성애” 모두의 경우에, “과도히 심해지면 情死에까지 이르는 수도 있”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던 것일까요.23)
 
신문기사들 중에 “情死”를 다룬 기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습니다. 더욱이 이는 동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앞에서 본 치정살인과 함께 이 동성애 커플들의 동반자살은, 당시 언론이 동성애를 다루었던 주요한 두 방식입니다. 이러한 기사는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줄기차게 엿보이는데, 주로 동성애 여성의 “情死”가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동성애 남성 커플의 자살도 간간히 다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먼저 동성애 남성의 예 중 하나를 들면,24) 1971년 9월 4일 영등포 교도소의 두 남성이 극약을 먹고 동반자살하는데, 그들이 남긴 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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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의 열렬하신 교화선도에 감동, 착실히 수용생활을 해왔읍니다만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 정사합니다.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꼭 사랑을 이루렵니다. 소장님, 우리를 가엷게 여기시고 그늘진 곳에 나란히 묻어주십시오. 소장님 댁에 행운이 깃들기를 지하에서 빕니다." 
- 「[프리즘] 동성애 복역인의 情死 - 영등포 교도소 수감중의 두 강도」, 『조선일보』 1971.9.7., 조간 6면.

 

 
그러나 언론에서 다뤄진 동성애 “情死” 중 압도적인 것은 동성애 여성의 경우입니다. 동성애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은 빈도로 보도되는 것이 바로 이 동성애 여성의 “情死”입니다.25) 가령 1979년 12월 20일 전남 M여상 여교사 장(張)모(25)씨와 이 학교 3학년생 성(成)모(18)양이 동성애를 나누다 동반자살을 시도했는데, 장 교사가 남긴 유서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웃으면서 따라와주니 나는 죽으면서도 행복하다.“
- 「휴지통」, 『동아일보』 1979.12.21., 7면.

 

 
 
주목되는 것은, 이 여성 동성애 “情死”는 당시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그만큼 당대 사회가 이 여성 동성애 “情死”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될텐데요. 일제 시기의 경우 감독 홍문명(洪聞明) 연출, 배우 나웅(羅雄), 김정숙(金靜淑), 김운실(金運實) 등이 출연한 『明日의 女性』이 1931년 개봉했고,26) 대한민국 건국 이후엔 감독 한형모(韓瀅模) 연출, 배우 문정숙(文貞淑) 출연의 『질투』가 1960년 개봉합니다. 이 두 영화는 한국(조선)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로 앞다투어 선정되는 작품들인데요.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신문광고의 카피가 재밌습니다. 다음은 일간지에 실린 『질투』의 광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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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연애서 엉크러지는 일대의 질투, 국제무대에 파문을 던질 최고 이색편! - 『경향신문』 1960.5.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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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애의 공포가 동성애로 변한 것은 세계적의 풍조일까? - 『동아일보』 1960.5.25., 2면
 
 
 
저 카피의 문구에서 보듯이, 연애를 “情死” 위주로 조명한 것은 곧 연애를 어떤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방증이 됩니다. 이렇듯 당시 언론이 연애를 호기심있게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연애’의 위상은 사회 속에서 그리 튼튼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즉 당시는 연애의 평등권 이전에, 연애의 위상 자체가 불안정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 이전에, “이성애의 공포”란 표현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전장에서 보았던, 연애에 대한 구체적 묘사에 개입되는 ‘남성성’의 시선을 넘어서, ‘연애 자체’를 ‘함께 죽을 지도 모르는’ 상태로 보는 ‘정상성’의 시선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제시기 동성애를 다룬 몇몇 연구에서는 당시 여성 동성애를 다루는 시각이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액면 그대로는 맞는 말입니다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보면, 이 시기 동성애가 별로 이상하지 않게 다뤄졌던 것은 이처럼 연애 자체가 이상한 눈으로 다뤄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언론의 눈에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차이도 중요했지만, 연애의 위험성(?) 자체가 이미 기이하게 비춰졌던 가운데 동성애 또한 기이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4. 금기 : 국가로부터 사라진 사람들
 
물론 그럼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연애’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여 신문기사에는 이렇게 '이상한' 동성애를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동성애의 “원인”에 대한 언론의 진단은 다양한데, 먼저 동성애가 “발생”되는 원인에는 부모의 영향이 지대하고, 따라서 이를 “방지”키 위한 부모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정신위생”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27) 이러한 “정신위생”에 위배되는 동성애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모가 갖춰야 할 것으로 다음과 같은 덕목을 강조합니다. 우선 부모 스스로 행복해야 하고, 나아가 아버지는 남성성을, 어머니는 여성성을 잘 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동성애 경향이 다섯살 꼴에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때에는 치료도 소용없으며 다만 행복한 부모만이 이 때의 동성애를 막는 최선의 보호자가 될 수 있읍니다. 
어린이들을 안심시키고 자라가기에 필요한 우정을 찾도록 해주어야 되며 부자관계는 대단히 중요하고 그리고 만일 아들이 어머니에게 진정한 애정을 쏟는 그 아버지의 강하고도 남성적인 면을 본딸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계집애같은 기질을 갖게 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 「성과 결혼 문답 스무가지(2)」, 『동아일보』 1959.6.10., 4면.
 
그리고 남성적인 어머니와 여성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남성적인 배우자를 고르려는 경향을 보여 자칫하면 호모섹스의 나락으로 빠지기 쉽다는 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 「호모사피엔스 –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해부한다(15) - 성애(8)」, 『경향신문』 1970.8.13., 5면.
 
 
 
이러한 동성애 “예방”의 측면이 동성애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규제라고 한다면, ‘위로부터의’, 즉 국가로부터의 규제도 1960년대 중후반 들어 차츰 강조됩니다. 1964년 12월부터 1965년 8월까지, 『부부』라는 잡지에는 「여자보다 좋았다 : 동성애욕자의 고백 수기」라는 제목의 글이 연재됩니다. 현재의 기준으로 양성애자에 가까운 류승(柳昇)이란 사람이 자신의 이성애, 동성애 경험을 적나라하게 써놓은 수기로, 이 연재는 당시 “부인”들 사이에 “반발적 인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잡지윤리위원회에서는 1965년 9월 24일 첫 자율심의회에서 이 연재가 잡지윤리강령 제1,2항을 위반하였음을 경고하였고, 이에 이 글은 당해 8월분을 끝으로 연재 중단됩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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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여자보다 더 좋았더라는 이 이색적 고백수기는 특히 부인들 사이에 반발적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읍니다.” 
- 柳昇, 「여자보다 좋았다 – 어느 동성애욕자의 폭로적 고백수기(5)」, 『부부』 48, 1965.4., 252쪽.
 
 
 
또한 1971년 유신 전야에, 문공부에서는 “퇴폐풍조정화세부시행계획”을 세우고, 10월 1일부터 영화, 드라마, 쇼, 무대공연, 각본 중 “동성애를 묘사”하는 부분을 삭제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29) 이를 계기로 1970년대 말까지, 국내 일간지에서는 외국 사례의 소개를 제외한 국내 동성애 사례에 관한 기사는 거의 사라집니다.
 
재밌는 것은 이 시기 동성애자의 존재들이 이렇게 언론상에서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학계에 의해서도 거듭 삭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의대 한동세(韓東世) 교수는 1971년 6월 26일 한국문화인류학회 월례발표회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의 인류학적 비교」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논문에서 그는 당시 킨제이 보고서에서 전체 남성의 4%가 동성애자로 조사된 점에 비추어, 한국은 그같은 “성도착자”가 “거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1959년 1월 1일부터 1969년 12월 31일까지 11년 사이에 서울대학병원을 찾은 성도착증 환자는 단 11명뿐.
이나마 2명은 다른 병에 성도착증을 부수적으로 겸하고 있는 환자였는데 이들 성도착증을 세분해보면 동성애 8명, 피학증 1명, 노출증 1명, 성욕과다증 1명으로 여자는 단 3명 뿐이다. 
이것을 영국의 '런던' 대학병원의 같은 11년 동안 417명의 동성애 환자와 '킨제이' 보고서에 나타난 미국의 전 백인 성인 남성의 4%의 동성애 환자와를 비교하면 1년에 한명 미만 꼴로 한국의 동성애 환자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을 죄악시하던 기독교의 '죄문화권'(길트컬쳐)과 성적으로 갈등이 없는 한국의 '창피문화권'(쉐임컬쳐)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스케치> "한국인의 성도착·환각제 복용 거의 없다" 서울 의대 한동세韓東世 교수 논문」, 『동아일보』 1971.6.28., 5면.
 
 
 
이른바 “성벽이상자(性癖異常者)”라는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성소수자의 예는 해방 후부터 존재했습니다만,30) 본인의 성정체성을 질병이라 진단하고 제 발로 병원에 걸어들어온 “동성애 환자”가 10년 동안 8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국에 동성애자는 극히 드물다”고 하는 부분에선 입이 벌어집니다. 더불어 의학자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동성애자가 “없다”는 그의 주장이 우습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 이전에 동성애가 “창피”해서 그것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하면서 그들을 사실상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점은 참으로 서늘한 대목입니다. 그만큼 동성애자를 둘러싼 “창피문화권”의 굴레는 이중 삼중으로 그들의 존재를 지워갔던 것입니다.
 
 
 
 
미국의 동성연애자들은 자신들의 권리회복운동을 성도착자들의 몸부림이 아니라 인권수호운동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소수민족 권익보호단체, 반전운동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수시로 공동집회를 열기도 한다. 
동성연애자들의 인권수호라니, 동양인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미국의 한 단면이다. 
- 「동성애와 인권 - 성도착자들의 몸부림 도저히 이해안가」, 『경향신문』 1986.7.24., 5면.

 

 

 

 
5. 연애가 연애일 수 있게 되기까지
 
그러나 동성애자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한들, 그 시절에도 동성애자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론에서 저리 부당하게 조명하는 것 이외 다른 곳,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존재했을 것입니다. ‘정상성’, ‘남성성’의 억압이 저리 도저하더라도,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것들을 용케 “사뿐히" 뛰어넘고 살았을 수도 있고,31)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처지를 역이용하며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32) 그렇게 끝내 동성애를 “병”으로 규제했던, 동성애란 ‘행위’는 있어도 동성애자란 ‘집단 정체성’은 가지기 힘들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 동성애자들은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삶과 섹스를 이어나갔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쉽기 위해서는 여러 운과 여타 계급적 조건들이 맞물려야 했겠지만, 어쨌든 섹슈얼리티는 결국 사적인 것이기도 하겠기에, 그 시절 굳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동성애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여 그 시절 ‘보이지 말아야’ 했던, 그리고 스스로도 기억되길 바라지 않았을 일군의 동성애자들을 여기서 굳이 까발려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의 삶을 택했던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에게는 잊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두에 암시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당시 동성애자들의 전모를 끝내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본래 기억된 역사는, 그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던 영혼들의 자욱한 침묵의 공동 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다만, 지금은 입 속에 든 혀처럼 자연스럽고 친숙한 소위 ‘낭만적 연애’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낯설고 새삼스러웠던 시절이 있었고, 그 상황에서도 그것을 쟁취하려던 과거의 동성애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당시 언론의 기이한 시선이 아니라, 드물게나마 동성애자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술회했던 수기 한 토막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저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내 연애, 내 섹슈얼리티는 “자신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저 선배 게이의 강단을 되새기면서, 섹슈얼리티가 진정으로 ‘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 이제까지 어떤 세상을 거쳐왔고, 또 앞으로 어떤 세상을 거쳐가야 할지를, 다들 한번쯤 곱씹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뒤 꾸준히 B미용실에 출근했다. 오늘도 친구 C와 하루 일을 끝내고 같이 나왔다. 
"승아"
"응?"
"너 오늘 나하구 같이 갈래?"
"어딘데?"
"프린스 지하"
"누구 만나기로 했니?"
"응, 실은 두달전부터 사귄 사람인데 난 그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고 말았어"
"상대는 누군데? 여자? 남자?"
"남자야"
"그런 것 같더라"
"난 이젠 걷잡을 수 없을만큼 좋아졌어. 그런데-."
"그런데-?"
"요즈음 눈치가 좀 이상해. 전같지 않고 날마다 만나던 것이 요즈음은 며칠만에 만나는데 그것도 잠간 얘기만 하고 헤어질 뿐이야."
"뭐하는 친데?"
"연극. 신인상까지 받은 유망한 사람이야. 이름은 M이구"
"나이는?"
"스물 다섯"
"어리구나. 이젠 우리도 불장난 할땐 지났어. 좀 진실하고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 아무리 기대어도 무너지지 않을만한 사람 말이야."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사일은 좀 걸치겠지만 참고 기다려야 해. 동성이건 이성이건, 특히 동성의 세계에선 진실과 지조, 그리고 믿음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럴리는 없어. 자신의 행동 여하에 달린 거라 생각해"
 
- 柳昇, 「여자보다 좋았다 – 동성애욕자의 고백수기(8)」, 『부부』 51, 1965.7., 234쪽.
 
 
 
1) 연구공간 수유+너머 근대매체연구팀, 『신여성:매체로 본 근대여성 풍속사』, 한겨레신문사, 2005.
2)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8·90년대 남성 동성애자 게토·커뮤니티 보고서』, 2013.
3) 「Q : 女史에게 물어보셔요」, 『선데이서울』 48, 1969.8.24., 88쪽.
4) 「앗! 당신은 변태성욕자? : 심리학자가 말하는 변태성욕자라는 건 과연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일가? 당신은?」, 『희망』 2, 1965.4., 192쪽.
5) 「동성애 의학상 치료 가능한지... 장기간 정신분석 요법으로」, 『경향신문』 1976.2.14., 5면.
6) 「횡설수설」, 『동아일보』 1939.7.12., 1면.
7) 「생활상식 : 동성애는 남성에게도」, 『희망』 2, 1965.4., 105쪽.
8) 「결국 「스캔들」로 끝난 연예가의 「단막촌극」. 琴湖東군은 동성연애, 姜美愛양은 애정도피」, 『조선일보』 1965.1.10., 조간 7면 / 「동성연애 못 견뎌」, 『동아일보』 1965.1.11., 3면 / 「연예계 두 추문」,  『경향신문』 1965.1.11., 7면 / 「『스캔들』의 줏가 올린 두 사람의 화제 : 영화배우 강미애양과 가수 금호동의 경우」, 『희망』 1, 1965.3., 111쪽.  
9) 「동성애의 남자에게 삼년 징역연도」, 『조선일보』 1938.5.28., 석간 2면.
10) 「강요당한 저승에의 同道, 소대장 총에 간 김일병 사건」, 『동아일보』 1962.9.20., 7면.
11) 「삼각관계로 수인을 살해」, 『동아일보』 1933.3.5., 3면.
12) 「변심한 동성애인을 심야 야외서 타살」, 『동아일보』 1936.4.24., 4면. 
13) 「질투로 표변한 동성애, 宜동생 刺殺하고 음독, 가해자는 필경 절명」, 『조선일보』 1939.7.11., 석간 2면.
14) 「동성애의 怨刀, 신혼 친우를 刺傷. 질투심골이 올라 신방에 침입, 수원읍내의 살인 미수 사건」, 『조선일보』 1937.3.26., 석간 2면 / 「변심한 동성애인 때려 상해」, 『경향신문』 1971.5.12., 8면.
15) 「빗나간 지성」, 『경향신문』 1968.5.2., 3면 / 「진범 두 대학생 검거」, 『동아일보』 1968.5.1., 3면.
16) 「범인 체포에 공 뺏겨 마포署선 분풀이?」, 『동아일보』 1968.5.4., 6면.
17) 「최초의 「동성연애 자살」, 「沈비행사의 처」와 「洪蘭坡의 질녀」의 情死」, 『조선일보』 1973.8.28., 조간 4면.
18) 「요모조모」, 『경향신문』 1958.2.22., 2면 / 「단상단하」, 『동아일보』 1958.2.22., 1면.
19) 「법정전말 6 : 동성간의 치정살인사건」, 『동아일보』 1958.7.17., 5면.
20) 「당신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 - 불감증은 어떻게 치료하나」, 『희망』 1, 1965.3., 173쪽.   
21) 「말이 좋아 酒黨이지 中毒者 30萬 : 술집 간판 많아지더니 갑자기 늘어난 患者들」, 『선데이서울』 53, 1969.9.28., 88쪽.
22) 「정신병학의 메쓰로 갈러본 살인삼각애사건 - 의학박사 明柱完씨 담」, 『조선일보』 1939.7.12., 석간 4면.
23) 「동성애와 이성애」, 『경향신문』 1954.10.3., 3면.
24) 「청년 두명이 동성연애로 情死」, 『조선일보』 1931.5.5., 석간 7면 / 「동성애도 끈히어 음독자살한 죄수」, 『동아일보』 1930.3.29., 7면.
25) 「묘령의 兩 日女 현해탄에 투신 자살. 유서를 많이 써놓고 자살, 동성연애의 결과인듯」, 『조선일보』 1929.08.11., 석간 5면 /  「두송이 낙화! 강수에 스러진 혼백 동성애에 희생된 두 처녀」, 『동아일보』 1937.9.7., 5면 / 「축항부두에 동성애 정사(미수)」, 『조선일보』 1936.6.5., 석간 2면 / 「여인끼리 情死, 두 20대 여관서 음독」, 『경향신문』 1963.2.20, 7면 / 「李여인을 입건, 동성애인 情死사건」, 『경향신문』 1963.8.8., 7면 / 「송도호텔서 두 여인 변사」, 『경향신문』 1964.4.30., 5면 / 「두 여대생 투신자살, 설악산 비룡폭포에 동성연애?…한데 몸 묶어」, 『조선일보』 1966.4.24., 조간 7면 / 「동성연애 연교사 제자와 자살 기도」, 『경향신문』 1979.12.21., 7면 / 「휴지통」, 『동아일보』 1979.12.21., 7면.
26) 「영화제작 연맹 「명일의 여성」 제작, 동성애로 자살한 두 여성을 모델로」, 『조선일보』 1931.04.15., 석간 5면.
27) 「마음의 건강 - 정신위생은 어려서부터, 반성해야 할 부모태도 몇가지」, 『동아일보』 1956.4.24. 4면.
28) 「부부/명랑에 경고, 잡지 윤리위에서」, 『경향신문』 1965.9.29., 5면.
29) 「퇴폐풍조 정화 세부시행 계획」, 『매일경제』 1971.10.2., 7면.
30) 늘어가는 정신병자, 남북분단도 한 원인현대일보 1948.5.29., 2면.
31) 김학이, 『나치즘과 동성애: 독일의 동성애 담론과 문화』, 문학과지성사, 2013, 520쪽.
32) 森山至貴, ゲイコミュニチイの社會學』, 勁草書房, 2012,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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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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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보이 2015-04-01 오후 19:21

너무 흥미롭게 읽었어요.  
역시 전공 분야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하시는 터울님!! 
앞으로 이런 신선한 기획들이 소식지에 계속 나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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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er 2015-04-02 오전 11:49

잘봤어요~! 앞으로도 기대기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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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_233987 2015-04-06 오후 20:29

혹시 탄닌공업주식회사 사건에 나온 인물들은 형량이 얼마나 나왔어요?
음... 어떻게 그 노인이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는지 궁금해서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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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울 2015-04-07 오전 00:42

검사가 두 명의 피고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으로 보아서, 중형을 선고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二명無期求刑」, 『동아일보』 1968.10.2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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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_233987 2015-04-21 오후 21:54

음... 생존해있다면 어떻게 살고있는 지 알고싶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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