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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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극 히 주 관 적 인 게 이 용 어 사 전
"탈반"
난 게이를 그만두겠다
'이반에서 벗어나다'는 의미의 "탈반".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보통은 자조적으로, "이 바닥 난 이제 지쳤어" 운운과 함께 따라오는 말이기도 하다. 게이로 사는 것에 대한 피로로 인해, 차라리 게이가 아닌 것이 더 편하겠다는, 그래서 게이로 살지 않겠다는, 그런 말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종교적 신념, 주변의 압박, 개인의 특성(사회성, 외모, 병리 등). 이들은 자신이 더 이상 '이반이 아님'을 선언하고, '일반이 되었다'고 천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최대한 증명하고 싶어한다. 유명한 "탈반 인사"로는 이 모 목사, '어느 동성애자' 등이 있고, 일단 그들이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영어권에서는 Ex-gay(전-동성애자)라고 하는 그들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적 지향'은 과연 변하는가? '이반에서 벗어난'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다시 벽장 속으로
전-동성애자들이 그렇게나 처절하게 "자신이 일반임"을 납득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결국 동성애자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로 바뀔 수 없다'는 명제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적 지향을 바꿀 수 없음은 이미 검증이 끝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정체성'을 신념화하여, 자신의 행동의 합리성을 뒷받침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결국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주장하듯 그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규정하지 않는,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맞다. 당신이 청소년일 때, 혹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나 동성이 좋나보다'하고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의 당신이다. 말하자면 벽장속의 당신.
탈반은 다시 벽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그 고행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많은 탈반 경험, 혹은 동성애 치료의 경험이 종교와 맞닿아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탈반의 경험은 말하자면 자신을 계속해서 채찍질 해야 하는 종교적 경험이다. 수도사처럼, 수녀처럼 일생을 살아가겠다는 어떤 결심인 것이다.
이반의 반대는?
당신이 자신을 이반이라고 정의하기 전에, 당신은 일반 이었을지 모른다. 사회는 성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성애자'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우리가 교육받은 것이고, 배운 것이고,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신은 스스로를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로 당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자신을 이반이라고 부르는 순간, 당신은 '일반'을 벗어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당신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지평의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이반'의 세계는, '일반'의 세계를 포함한 더 넓은 세계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반에서 벗어나서 도달하는 곳이 일반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명징한 정체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알 수 없는 고뇌의 간극으로 떨어지는 것이, 안타깝게도 탈반이다.
자, 당신은 지금 '탈반' 하려고 한다. 각오는 되어 있는가?
당신이 만약, 자신을 이반이라고 부르고, 남들에게 이반이라 불리며 살았다면, 그것을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당신이 만약, 자신의 정체성을 은근히 거부하며 살아왔다면, 거짓말 하나만 더 늘어날 뿐,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탈반했다는 몇 몇 글들을 보면
이반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쳐 떠나간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불쌍해보이더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