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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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형법 92조 5항이라는 '아리까리한' 법이 있다. 여기에 얼마나 관심들이 많은지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계간'이라는 단어가 '항문성교'라는 단어로 바뀌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최근에는 이 조항을 '포괄적 동성애 행위'를 모두 처벌하는 방향으로 개정하자는 안이 등장하기도 했다. 군형법은 군인들을 위한, 군인들에 대한 법인데 이상하게 군인과 상관 없는 다른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한쪽은 보수 종교단체를 포함한 호모포비아 집단이고, 다른 쪽은 성소수자 인권 지지자 집단이다. 나는 아쉽게도 내 게이스러움과 우리 국군의 전투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몸소 체험할 기회는 없었지만(군대 로맨스 따위는 없었다), 지금 왜 이 법안이 문제시 되고 있는지 한번 되짚어 보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법 자체가 애매하다. 실제 이 조항(구舊군형법 92조 5항, '계간' 조항)이 등장한 판례를 보면, 성기를 만졌다, 만지게 했다, 성교하는 시늉을 했다 등의 의 성추행 사례가 많다. 계간이란 단어는 동성간 추행을 말하는 건지, 항문 성교를 말하는 건지, 왜 이렇게 애매한 걸까? 여태까지 동성간 추행을 포괄한 단어로 계간을 사용했다면, 계간이라는 단어를 항문성교로 대체한 건 왜일까? 또 왜 항문성교는 '동성간 성행위'로 바뀌려고 한거고? 이성 간에도 항문성교 할 수 있는거 아닌가. 그것도 처벌대상인거 아니었어?(웃음) 또 헌법재판소에서 해당 법에 대해 합헌 판정을 내리며 언급했던 '전투력 저하'라는 이유도 애매하다. 누군가가 동료를 강간하거나, 추행했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 있다. 전투력을 저하시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항문성교'라는 용어를 써가며 그 자체가 전투력을 저하시킨다고 명시하는 이유는? 흠. 역시 애매하다.
그래서 한가지 설을 생각해 봤다. 시간을 되돌려보자.
대한민국 근대사의 격동기...
드디어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 안타깝게도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는 미국이 앉아있었다. 미 군정이 시행되던 1946년,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경비대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8년. 드디어 계간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들어간 군법이 처음으로 제정된다. 60년 전통의 계간법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국방경비법 제 50조 "여하한 군법피적용자든지 자해, 방화, 야도, 가택침입, 강도, 절도, 횡령, 위증, 문서위조, 계간, 중죄를 범할 목적으로 행한 폭행, 위험 흉기, 기구 기타 물건으로 신체 상해의 목적응로 행한 폭행 또는 신체 상해의 목적으로 행한 폭행 또는 사기 혹은 공갈을 범하는 자는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처벌함"
이 법은 사실 1928년에 제정된 미군의 전시법(The Article of War)를 번역한 것이다. 단순히 미군의 것을 옮겨온 것일 뿐이다. (여기서 계간으로 번역된 '소도미(Sodomy)'를 금지하는 법은 현재 미국의 통일군사법전(The Uniform Code of Military Justice)에 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1)) 호모포비아 집단의 말마따나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 법안을 번역한 사람은 소도미라는 말과 적확하게 대응하는 단어를 찾아냈다. 의미는 동일하지 않지만 이 조항이 전하고자 하는 호모포비아적 어조는 정확히 살리는, 멋들어진 번역을 해낸 것이다.
계간(鷄姦)이라는 단어는,
1. 부정적이다. 항문성교를 닭에 빗대어 비하하는 말이 계간이다. (닭은 질과 항문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이성간 성교를 항문을 통해 한다)2)
2. 말 자체는 동성애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얽혀있다. 계간은 항문성교라 읽히지만, 통상 남성과 남성간의 항문성교로 받아들여진다.
이 부정적이고, 편견의 함의를 담고 있는 단어가 법전에 오랫동안 실려있었다.
구 군형법의 계간, 또 지금의 법 조항에 나온 항문성교라는 단어는 '동성간 성행위', 더 나아가 '동성애'와 동일시된다. 어휘의 무서움이다. 60년동안 계간이라는 말이 자리잡고 있던 공간에는 혐오만 쌓여온 것이다. 60년이 흐르는 동안 군대는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바뀌었지만 계간이라는 말은 그대로 눌러 앉아있었다. 성교가 문제라면 동성 또는 이성간의 성교, 라고 고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 계간(또는 항문성교)이라는 말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얽혀있는 단어다. 이 조항에 계간(또는 항문성교)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으므로 조항 자체가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환기시킨다. 최근 민홍철 의원이 제시한 '포괄적 동성간 성행위 처벌안'의 목적은 군형법 92조의 불명확한 부분을 정확하게 하고자하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이 발상이다. 이미 군형법 92조가 '동성애를 혐오하라'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니까. 이제 사람들에게 이 법은 한 군인의 엉덩이를 원치 않은 육봉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하는 법이 아니다. 그 행위를, 그 행위의 주체를 혐오하는 문장일 뿐이다. 마치 호모포비아 기독교인들이 들먹이는 '남색은 죄악이니라' 운운 성경 구절처럼.3)
결론을 내보자. 우리에게 군형법 92조 5항은 법 조항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가져온 동성애에 대한 무지와 혐오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 조항이 이렇게 애매한 거다. 계간이든, 항문성교든, 결국 이 친구가 말하고자 하는건 혐오다. 그러니 어떻게 바꿀까 긴 고민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폐지가 답이다.
< 무조건 혐오 - 여기서 '군'이라는 말을 빼도 그들이 하려는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
다시 1948년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 sodomy를 鷄姦으로 번역하고 있다. 저 한 단어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과장일까?4)
1)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소도미를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었으나, 2003년 연방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인해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미군(軍) 내에서는 아직 어느 정도 위력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군대라는 사회의 특수성"이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연방대법원 위헌 판결 이후에 이성간의 '소도미'를 처벌한 판례를 보면 재미있다. 소도미라는 단어에서 호모포비아적 색안경은 조금은 뺀 모양새다. U.S. v. Stirewalt, September 29, 2004)
2) 참고로 기독교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 나오는 타락한 도시 '소돔'에서 따온 소도미라는 단어는 구강성교, 항문성교, 수간(?) 등의 온갖 '변태 성행위(!)'를 통칭하는 말이다. 사실 계간(항문성교)와 1:1로 대응하는 말은 아니다.
3) 그 성경구절도 기원전 중동 지방의 법전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평행이론. 필연 또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 시간이 흘러 절대명령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상황이 똑같다.
4) 만약에 처음부터 우리나라의 군형법이 미군의 것을 베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계간'이라는 말이 없었고 동료간 강제력에 의한 성추행, 성폭행을 처벌하기로 했다면? 우린 지금 이렇게 싸워야 했을까? 느닷없이 "군대는 특수하니까 동성애 금지법을 만들자"고 누군가 말했을까? '원래 있었던 것'은 정말 무서운 거다. 이것이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게 만들고 왜 이것이 없어지면 안되는지에 대한 생각만 하게 한다.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역사를 살펴보니 편견과 차별이 더 명확해지는군요.
게다가 기독교 호모포비아가 깔려 있는 미 군법을 가져왔으니
더욱 모호하면서도 더욱 악랄한 조항이 돼버렸구요.
자료 조사하시고 이래저래 생각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역시 아는 게 힘이라는...!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