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8월 |
---|
[참관기] 게이는 희망버스를 타고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도 글을 쓰는 것은 곤욕이다. 그럼 쓰지 않아도 되지 않냐고 그대는 물을 것이다. 작가 노희경은 그녀의 에세이에서 ‘글쟁이는 하루에 8시간씩 글을 쓰는 노동자’라고 했다. 그렇게 근면하게 글을 써야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그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할 수 없음에도 당장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나는 좋은 글쟁이이거나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있으니 글을 써야하고, 그것이 타의와 마감에 의한 압박이 아니었음을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타자를 치려한다.
한진중공업 사태 요약
한진 중공업은 필리핀 수빅만 조선소를 새로 건설할 때 국내 조선소를 계속 해서 경영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국내 수주량 3년치를 연속해서 확보한다는, 국내공장의 축소 및 폐쇄 등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노사특별단체교섭합의’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최근 2년 사이 울산과 인천 조선소의 운영을 중단하여 3천명이 넘는 사내 하청 인원들을 정리하였다. 또한 영도 조선소의 인원들도 두 번의 정리해고 후 더 이상의 정리해고를 중단한다는 노사 합의를 하였으나 그나마 올해 정리해고 단행으로 깨졌다.
김진숙씨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지도위원으로 현재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하여 85호 크레인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2011년 7월 9일 희망버스 출발일 기준으로 185일째 농성 중에 있다.
가득 찬 가방과 달리 비어있는 머리로 시청역에 내렸다. 멀리 본 풍경에서 길게 늘어진 버스 사이로 분주한 머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대들의 검은 머리를 보고 비대하고 근면한 개미가 떠오른 것은 미안한 일이나, 그 규모에 놀란 내게는 자유스런 일이었다. 그대와 내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한진 중공업 사태와 관련, 김진숙씨를 지지하는 <희망버스>에 타기 위해서이다. 그대가 알아두었으면 하는 한진중공업 사태는 위에 따로 두었다. 김진숙씨는 푸른 하늘과 가까운 35m 상공에서 세 번째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그대가 이 이야기를 듣고 낭만을 떠올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만나기 위해 185대의 버스가 (실제로는 195대가 넘는 버스와 봉고, 비행기가 출발했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으로 출발했다. 사실 나는 희망버스가 일종의 문화축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부대끼며 줄지어있는 깃발들과 그대의 손에 들린 붉게 쓰인 여러 피켓들을 통해 나의 오해에 대해서 미리 바로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오해를 바로잡지 못한 채 36호 희망버스 ‘퀴어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부른 노래에서부터 그대의 격한 감정이 내게로 전해졌다. ‘당신의 의미’를 개사한 진숙의 의미의 일부 가사를 빌리자면 이러하다. “진숙 사랑하는 김진숙. 둘도 (셋도, 넷도) 없는 김진숙. (한진투쟁 승리해요.) 진숙 없는 이세상은 아무런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함께 올라요. 희망버스에 한진 앞에 모두 모여요. 한진 조남호 썩은 눈까리에 눈물이 젖게 한 번 해봐요. (조남호는 각오해라)” 버스 안에선 조*님이 챙겨주신 자두며 두유, 과자 등의 간식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영양갱과 미니약과가 남았다.
부산역에 도착해 버스에 내릴 때 즈음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뜨거운 여름날 그만큼 더웠던 그대의 마음을 식혀주었던 내린 비를 함께 나눌 이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젖은 노래 앞에선 그대의 흥분된 눈이 보였다. 급하게 걸친 우의 사이로 비가 스며들어왔지만 ‘평화’행진은 시작되었다.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낯설게 들리는 구호들과 민중가요들이 울려 퍼졌다. 또 그사이 국내 유일의 게이코러스 지_보이스는 당당하게도 "you will never walk alone"이나 “길고양이의 노래”, “you can't stop the beat"등의 노래를 불러 많은 앵콜 요청을 받기도 했다. 문득 아득한 어느 날 등교 길에 한강대교 위에서 맹인들이 안마사 자격증 법률과 관련하여 시위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한 시간 가까이 지각하여 그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던 그때의 기억을 그대에게 말했다면 그대는 나를 비난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제나 객관으로 바라보았던 시위의 대열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이 땅의 비정규직을 위함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고, 내 안에 선입견과는 다른 시위의 모습에 안심하였지만 시위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버스 승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영도대교를 건너자 행진이 정체되어있었다. 까치발을 들어 앞을 내다보니 수많은 깃발 사이를 비추는 크고 둥근 노란 조명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 앞에선 어쩌면 그대가 이번 희망버스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고 있을 서로에 대한 분노와 대치, 고성과 폭력, 최루액과 연행이 있었다. 근처 모 병원에서 감사하게도 화장실과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양쪽 사람에게 부축되어 들어오던 한 대학생이 기억난다. 그는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위로 눈물과 콧물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밤사이 출처 모를 먹을 것들이 여러 손위로 옮겨졌고, 노래와 비장한 발언 등 자발적 문화공연들이 밤새 진행되었다.
날이 밝았다. 해가 떠올랐다. 명랑한 햇살은 밤새 젖은 몸을 말려주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햇살은 하늘이 내리는 다음 시련으로 그대의 얼굴을 발갛게 그을려 놓았다. 밤사이 분주했던 사람들은 양산으로 변해버린 우산 밑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견뎌냈다. 이번 평화행진이 끝나기로 예정되어있는 새벽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버리고 밥차에서 나누어주는 찌개에 그대는 아침을 먹었다. 어쩌면 그대가 이 행진의 끝을 예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꺼운 전경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어린 전경들 사이를 우리가 뚫고 지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었지 않은가. 모르는 것은 나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의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그대는 내게 말해주었다. 더운 햇살은 더 이상 명랑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구호에 복창하는 입은 몇 남지 않았다. 전경들과 희망버스 행진인원 모두 지쳐갈 즈음 지_보이스는 앞으로는 동지들을 뒤로는 전경들을 대하며 노래를 불렀다. "you can't stop the beat", “벽장문을 열어”를 불렀다. 그대에게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오후 두시를 넘겨 김진숙씨와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3차 희망버스를 기약하며 2차 희망버스는 해산했다.
나는 이 글을 쓰기가 싫었다. 사실 비정규직과 노동자, 한진중공업 문제에 대해 나는 그대보다도 더 소신을 말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처럼 이 땅의 노동자와 소수자들을 위해 투쟁하며 자신의 소견은 이러저러 하다고 말하기에도 나는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실제보다 더 고민하는 척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어난 사실에 위주로 글을 쓴 것이 어찌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차벽에 막힌 행렬은 무기력했고, 깃발은 그리 많은데 투쟁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김진숙 씨와의 전화통화에서는 이 땅의 많은 소수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영도를 떠나며 만났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맙다는 인사는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지막 까지 희망버스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경찰차 앞을 몸으로 가로 막던 누군가의 모습은 처절했다. 희망버스가 드문드문 오는 상황이라 경찰차가 지나가도 상관이 없었음에도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그 기억은 유쾌하지 않게 남았다. 많은 상황에서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무엇을 위하여 어떠한 옳은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쯤에서 애매하게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감상과 판단은 그대의 몫이다. 내가 거짓 감정을 설정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대가 눈치채게 하고 싶지는 않다.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어느 곳으로도 흐르지 않는 내용이 오히려 저는 편견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