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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은둔 사이의 터울 #5 : 위험취약군
2016-12-23 오후 15: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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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2월 

은둔 사이의 터울 #5 : 위험취약군

 

 

1.

 

대체로 우리의 인생은 소중하고, 극악한 위험엔 모쪼록 빠지지 않는 것이 좋다.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인생의 진리다. 진리가 늘상 그렇듯, 그것은 때때로 손쉽게 잊혀진다. 인생엔 대체로 많은 나쁜 일들이 있다. 그럴 때 가급적 자신과 상황을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되레 그럴 땐 숫제 나를 어떤 유혹에 빠뜨리고 싶다.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은, 그런 심리에 충실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개 술을 마신다. 인생엔 그렇게 애써 위험해지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을 때, 그 속에서 발견될 내 위험한 얼굴을 보고플 때가 있는 것이다. 

 

나를 위험에 빠뜨릴만한 게 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곤경이 여러 루트로 오는 것처럼, 한번 베어뭄직한 유혹도 저자거리 안팎에 즐비하게 깔려있다. 안팎으로 즐비한 이유는 인간이 그만큼 자신을 건강하고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데 자주 실패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 몸과 마음을 챙기기 위한 많은 건강상식과 자기계발서와 식이요법의 요목들이 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그것을 하나하나 챙기는 게 의미없어보일 정도로 내가 엉망이 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때 욕망은 한층 예리해진다.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을 때, 그 때는 내 몸뚱이 또한 기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사람은 누군가와 섹스할 수 있다. 그 섹스라는 인간관계가 잘 정리되고 뒷탈이 없기 위해선 몇 가지 것들이 필요하다. 정해진 각도와 체위와 러닝타임과, 섹스 앞뒤에 차려야 할 예의와, 애초에 거기까지 가기 전과 후에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은 그런 것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또는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싶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 몸뚱이도 내 삶처럼 기약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별로 챙기고 싶지 않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함께 모처럼 찰지게 뒹굴고 싶다, 눈 앞의 살덩이를 그저 핥는 눈먼 박테리아처럼. 물론 나는 지금보다 좀더 안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려고 여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살이 있는 곳, 이 장막 안에서는 나도 한번 훨훨 날아보고 싶다. 무언가를 확실히 잊을 만큼 잘 익은 쾌감을 취하고 싶다. 그렇게 한껏 달아오른 예민한 신경에, 평소 들어두었던 상식과 규범은 별로 소용에 닿지 않는다. 애초에 안전하고 싶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차라리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좋다. 그 와중에 콘돔 따위는 별스럽고, 그런 '오늘'의 무드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이미 나는 저 장막 밖에서 너무 많은 위험과 불행을 겪어왔으니, 이 잠자리에 얽혀 나에게 닥칠지 모를 또 하나의 불행 앞에서는, 여기서만큼은 나도 한번 운좋은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내가 하나하나 애써 챙기지 않아도, 내가 일일이 내 주위를 돌보지 않아도. 내가 겪었고 또 끝내는 찾아들었던 그 위험의 오늘이, 아무 것도 씌우지 않은 몸들 사이사이로 축포처럼 터진다. 

 

_

 

꽤 많은 날들과 꽤 많은 위험한 순간이 지나고, 나는 어느 날 HIV/AIDS 검진을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몽롱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꼭 양성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나를 챙길 수 있었고, 어떤 날은 그저 그럴 수가 없었을 뿐이다. 만약에 내가 음성이 나온다면, 나는 무슨 감정을 가져야 할까. 역시 그랬을 리가 없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난생 처음 보는 이와 함께 골방에 누워 말도 안되는 운이 따르길 기대했던, 위험이라도 내 것으로 거머쥐고 싶었던 그 때의 나로 돌아가면 되나. 그 때 그 순간 나를 그토록 우연하고 기약없도록 만들었던 것은 대체 무엇일까. 

 

검진 결과를 받고, 나는 여태껏 나로부터 들고 나간 많은 위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위험을 끝내 내 손으로 선택하고 말던 내 마음을 생각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참아넘기던, 그 마음으로부터 몰아친 폭풍 가운데 단지 운이 좋아 이 곳에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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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4년도 국회 상임위 국정감사에 제출된 보건복지위원회 산하 질병관리본부의 보고서에는, 에이즈 감염률이 일반인에 비해 높은 그룹을 "고위험군"이라 칭했다. 국정감사에서는 이들 "고위험군"에 대해, 에이즈 예방사업을 집중적으로 실시할 것이 논의되었다. 이 "고위험군"에 속하는 대상으로는 동성애자, 남성 성병 환자를 비롯, 성매매 여성도 포함되었다.1) 

 

이에 대해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서는 그해 12월 12일, 에이즈의 날을 맞아 성명을 발표하고, HIV/AIDS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편견으로 감염인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들은 "동성애자, 성매매 여성 등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여 잠재적인 가해자로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2) 나아가 한달 전인 11월 8일,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는 앞서 지목된 이들을 "HIV/AIDS에 취약"하다고 서술하였는데, 이 "취약"함의 이유로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비롯하여, 여성의 노동권·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등, 사회적인 요소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3)

 

본래 고위험군(High-risk groups)이란 HIV/AIDS 이외에도 자궁경부암, 말라리아, 폐암, 낙상 등, 상해를 겪거나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그룹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학 용어다. 그러나 당시 HIV/AIDS 인권단체에서는, 이 용어가 이른바 감염에 취약한 그룹의 집단 정체성을 곧 질병과 연결시키는 낙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평가하였고, 이에 의도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불어 "감염에 취약하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질병에 대한 임상병리의 차원을 넘어,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정책적 조건, 즉 혐오와 차별을 비롯해 의료접근권·교육접근권의 범주까지 포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위험군" 대신 이런 말들의 사용이 권장되었고, 이후 "감염취약계층" 등의 사용이 점차 확산되었다.4)

 

 

 

 

1) 「에이즈 고위험군 집중관리정책으로 선회해야」, 『뉴스와이어』, 2004.10.12.
2) 「HIV감염인/AIDS 환자의 인권 사망 선고 기자회견 : 한국정부가 HIV감염인/AIDS 환자의 인권을 죽였습니다!!에이즈 고위험군 집중관리정책으로 선회해야」, 2004.12.1. 
3) 「에이즈보다 심각한 차별의 공포 : HIV/AIDS 정부관리정책과 감염인의 인권」, 『일다』, 2004.11.8. 
4) 「담론팀 기획토론 #2 : 동성애인권운동과 HIV/AIDS」, 『친구사이 소식지』 57, 20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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