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벽장
가족이 게이 자식을 두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죽기를 바랄 때
2003. 11. 20. '더 걸리'지 알리 자라비Ali_Zarrabi 박사 씀
원문: http://www.thegully.com/essays/iran/031120_gay_iran.html
(사진 설명: 자라비 박사)
이란과 독일에서 몇 년 동안 스스로가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살았던 나는 1989년에 이제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우울하고 비밀스러운 삶을 끝내기 위해서 자살하든가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대처하든가. 결국 나는 그 해 6월에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베를린에서 열린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 난생 처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커밍아웃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려움과 수치심에 떨던 나는 이제 분노로 차 있었는데, 그 분노란 나의 부모님, 사회, 그리고 양자가 나에게 강요해온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께서 내 유년기를 늘 지옥같이 만드셨다는 데 분노한다. 누군가가 또 다시 나에 대해 비하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 분들께서 곁에서 버팀목이 돼주지 않으셨던 데 분노한다.
나는 반동성애적인 이란 사회 전체에도 분노한다. 따지고 보면 호모포비아말고도 다른 반응 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가령 초기의 미국 원주민 사회에서는 어느 소년이 소위 '남성적'인 활동에 관심을 못 느낄 경우, 억지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거나 말을 타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 대신에 그 소년은 집에 남아 가사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됐던 것이다. 이런 소년들은 어른이 돼서도 결혼을 강요당하지 않았으며, 치료자 등 자신의 본성에 더 맞는 천직을 택할 수 있었다.
게이 자식
이란에서 게이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생후 첫 20~30년 동안 줄곧 무시당하거니 놀림감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5살쯤 됐을 무렵, 우리 동네의 모든 꼬마, 이웃집 아이들, 그리고 사촌 형제들은 내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축구대신에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놀이를 좋아하는 나를 놀려댔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내가 춤추고 싶어할 때마다 화를 내곤 하셨다.
뭔가를 강요할 때 이란 가족은 그들이 제공하는 집과 밥을 빌미로 다음과 같은 반복적인 문구를 쓴다. '우리가 널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거와 음식은 여느 고아원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란 가족은 그들이 교육비를 대준다는 사실을 이용해 죄책감을 야기하는데, 이는 사실 바로 자신들이 삶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보상받기 위해 지출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의 덫
물론 가장 큰 압력은 바로 결혼에 대한 것이다. 이란의 가족은 그들 자신의 건강을 포함해 온갖 전술을 사용한다. '네가 얼른 장가가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다.' 또한 그들은 아내가 임신 중인 이웃집 새 신랑에 대해 쉴 새 없이 얘기한다.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결혼에 대한 압력이 너무도 버겁기 때문에 실제로 적잖은 남녀 동성애자는 항복한다. 그러나 성인 남성 동성애자를 여성과 억지로 결혼시키는 일은 마치 그를 심리적 불구로 만드는 것과 같다. 유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원치도 않는 직로를 택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남은 인생을 매순간 괴로움 속에 살도록 확실히 보장하려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성애자들을 혐오하지는 않지만, 내 여생을 이란 여성과 함께 살고 같은 잠자리를 쓰며 밤마다 섹스하지 않기 위해 변명을 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이웃들
평범한 이란 가족은 마르돔(mardom), 즉 이웃과 친척을 위해 살게 마련이다. 그 결과 이란의 가족에게 사생활이란 없으며, 모든 일은 마르돔의 의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해진다. 내 옷, 자가용차, 파티, 인생과 영혼 모두 마르돔에게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범한 이란 가족은 게이 자식을 두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죽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내 이란 게이 친구 중 한 명은 그의 부모님께서 자살을 시도하라고 압력을 넣으시기까지 했다. 그 분들께서는 그 친구에게 노골적으로 '정상인'이 되든가 자살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 부모님께서는 내 친구를 어딘가 아주 먼 데로 보내버리셨다. 마르돔이 없을 만한 곳으로 말이다. 단지 마르돔의 이목 때문에 자식을 잃어도 좋다는 셈이다.
커밍아웃 이전에 의대를 다니면서 혼자 괴로워하던 당시, 나는 내 여동생의 행복에 집착하게 됐다. '만일 내가 커밍아웃하면 동생이 괜찮은 이란 남자한테 시집가지 못할 거야. 차라리 걔가 시집간 다음에 커밍아웃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만약 동생이 시집을 안 간다면? 아니면 내가 커밍아웃한 다음에 매제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면 어쩌지?' 그 때 내가 했던 생각이다.
당시에 나는 스스로를 여동생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동생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과연 동생은 내게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삶을 꾸릴 권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을까? 어차피 내가 오빠니까 동생은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날 때까지 결혼을 미뤄줄 것인가? 게다가 난 호모포비아인 이란 남자를 매제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호모포비아는 단일한 질병이 아니며, 대개의 경우에 성 차별주의와 마초주의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나로서는 여동생이 그런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랄 이유가 없었다.
정략 결혼
호모포비아 말고도 관습이라는 적수와 싸워야 하는데, 왜냐면 평범한 이란 가족이란 바로 강요된 결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일이고 요새는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같은 정략 결혼 탓에 부부가 사랑은커녕 낭만적인 감정조차 공유하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이란의 부부들은 비밀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서로를 싫어한다.
따라서 부모님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란의 젊은 이성애자들도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윗세대와 갈등할 게 뻔하다. 구식인 부모님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무조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일단은 부모님께서 많은 걸 새로 배우시고 깨우치셔야 한다. 게이 아들을 진정 사랑하신다면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란의 많은 게이는 거부가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결국 부모님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배제해버린다.
독방 감금
내가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벽장 안에서 지낸 몇 년은 마치 독방 신세와도 같았다. '벽장'이라는 말은 내가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비유인데, 왜냐면 벽장이란 바로 움직이거나 숨쉬기 어려운 작고 어두운 곳이기 때문이다. 즉 그 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누구한테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만일 커밍아웃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곤 했다--그리고 더 나쁘게는 계속 벽장 속에 머무를 경우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부모님께서 아실 경우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게이 자식을 두셔서 안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 상황은 마치 수렁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우울증은 나날이 깊어졌다. 나는 날마다 내 자신과 하나님께 수 천번은 질문하곤 했다. '왜 하필 전가요?' 독일에서 살던 당시, 어느 시기에는 너무나 고립된 나머지 며칠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다. 거기가 대도시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란인 애인을 사귀고 싶어했는데, 언젠가는 그 누군가가 나타나 나를 벽장으로부터 끌어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이란에 두고 온 가족을 대신해서 내 외로움을 달래주고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찾을 수 있게 해주며 내 모든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믿었다. 즉 내가 기다리던 것은 구세주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균형 깨기
사고의 전환점은 내가 독일에서 의대를 졸업하는 순간에 왔다. 시험과 강의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부모님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감소하면서 내 선택은 말 그대로 생사의 문제가 됐다. 내가 난생 처음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 참여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미국 뉴욕으로 이사했고, 취직을 했으며, 진정한 자유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곧바로 사귀게 된 미국인 애인을 직장의 공식 연회에 데려갈 정도였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나는 뉴욕에 사는 다른 이란 사람들하고는 거의 접촉하지 않고 지냈지만, 사실 동포들에 대한 향수는 무척 컸다.
다른 이란 사람들이 과거에 그랬듯, 나는 1998년에 로스앤젤리스로 이사했다. 20년 동안 이란 문화로부터 떨어져 지내온 나는 이제 다시 이란 문화의 한복판에서 살게 됐다. 물론 호모포비아와 편견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꿈에 그리던 남자라고 믿었던 이란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교포 사회에서 조용히 지냈다.
아주 짧은 연애 기간이 지난 뒤, 우리 둘 다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혀 커밍아웃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란 여자와 결혼하라는 가족의 압력으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결국 우리 관계는 그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비탄에 잠긴 채 망연자실했고, 이란 문화와 민족을 전보다도 더 증오하게 됐다.
당시에 로스앤젤리스에는 이란 게이들의 커밍아웃을 돕거나 그들에게 게이로서도 얼마든지 삶을 꾸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만한 장치가 전혀 없었다. 그 때 나는 이란 게이 레즈비언 의료 종사자 협회(Iranian Gay and Lesbian Healthcare Workers Association, http://iraniangaydoctors.com )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 단체의 목적은 이란 사회의 호모포비아에 대항하고, 동성애자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과 자기 수용을 돕고 그 가족들의 존중심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지난 1~2년 동안 상황이 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는 이란에서도 개방적이며 자기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게이가 전보다 많아졌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으며 사랑하는 그는 지금도 외로운 벽장 속에 갇혀 있으며 가족과 전통이라는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데미지 코멘트 : 전에 올린 다른 글하고 비슷하게 호모포비아적 제 3세계 국가 출신 동성애자가 서방 사회에 정착해서 커밍아웃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기사입니다. 물론 그 자체로서는 개인적인 '승리'이고 축복 받을 만한 일이지만, 모국의 문화에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아직도 분노로 가득 찬 사람 같아서 말이죠 ^^; 식구들하고 완전히 절연하고 지내는지도 궁금하구요. 암튼 모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료 게이들하고는 처지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자신의 나라는 엿 같다. 난 미국이나 서방 국가에서 자유를 얻었다. 다시 돌아가기 싫다'로 귀결되는 태도들 말입니다. 인터뷰이 선택도 늘 고만고만한 색조고 말이에요. 게다가 인터뷰이들은 한결같이 진저리를 치며 자국을 비난하기에 앞서죠. 퀴어 솔제니친들의 양산이 과연 제 3 세계 동성애자 해방 운동에 도움이 될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어요.
젠더의 탈식민화를 위해선 아마도, 걸리 紙의 지향점은 소거되어야 할 듯도 합니다. 그래도 미국 웹 사이트들 중에 제3세계 인물, 각국의 문화, 동성애자들의 현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 게 별로 없는데다,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하는 데도 별로 없지요. 그래서 저도 걸리 지는 자주 들어갑니다. 암튼 데미지 님 때문에 어줍잖은 영어 퍼즐 게임하지 않아서 행복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