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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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4
: 헤드윅
* 수만 개의 삶과 사랑, 아픔과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매력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겨봅니다. 특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삶이 내 삶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느낌은 배가 되죠. 영화로 만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돌이켜 보면 아빠도 꿈 많은 젊은이였다. 엄마의 이름을 딴 주식회사 ‘미리개발’, 손수 그린 촌스럽고 조악한 로고가 떠오른다. 어설픈 생애 첫 ‘자영업’. 이름 짓는다고 며칠 밤낮 백과사전을 뒤지던 모습. 직접 디자인한, 다 똑같아 뵈는 수십 장의 별과 달 캐릭터를 늘어놓고(미리내에서 영감을 얻었다나.) 뭐가 제일 낫냐고 묻던 얼굴. 그런 귀여운 면도 있었던, 하지만 그땐 미웠던 젊은 아빠. 무참히 부서지기 전 그의 원대했을 꿈을 생각하니 애틋하다.
아빤 DVD방, 스크린골프장 등을 늘 유행보다 앞서 선구적으로 열었다가 초반에 짧은 호황을 누리곤 얼마 못가 경쟁력을 잃고 망했다. 그렇게 십 수 년 째 크고 작은 가게를 간신히 열고, 닫고, 또 무리해서 열기를 지금껏 한결같이 하고 있는, 이젠 늙은 아빠. 영화 얘기하자면서 그 사업의 연대기부터 꺼낸 건, 내가 <헤드윅>을 만난 곳이 바로 그 DVD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무덤 같은 집보다야 가게가 조금 나았다. 컴컴한 방과 푹신한 소파는 처음 가져 보는 혼자만의 다락방, 신세계였으니. 틈만 나면 놀러 갔고, 영화 끝나는 시간을 밥 때에 못 맞춰서 걸핏하면 맞았다. 그러는 와중에 결국 거기서 사단이, 바람이 났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동독의 어린 한셀에게 글램 락(Glam Rock)이 도래하듯이, 영화가 내게로 온 것이다.
첨엔 모범생답게 할리우드 가족영화 위주로 본 듯한데, 기억은 하나도 안 난다. 내가 진짜 궁금한 건 항상 따로 있었다. ‘대가의 명작’, ‘뭔 상 수상’, ‘충격‧전율‧감동!’.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체로 빨간딱지였기에 엄두를 못 냈다. 그리고 늘 진열대 가장 아래에서 내 눈을 끌던, 그러나 소개 글을 읽는 것조차 왠지 겁나던 한 영화. 화려한 금색 머리칼과 엄청난 눈 화장, 노래하는 입술. 여잔지 남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인터넷에 내용을 검색해 보니 호오?! 이건 꼭 봐야 해!
일단 그나마 다행히 15세. 승산이 있겠다 싶어 기회를 노리다가 엄마아빠 없는 날, 일하는 삼촌에게 긴장된 손으로 케이스를 내밀었다. 이거 틀어주세요, 가장 으슥하고 구석진 9번 방이요. 엄마가 나중에 삼촌, 어제 얘 뭐 봤어, 물어보면 어쩌지? 동생이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면 어쩌나? 커튼 꼭꼭 여미고 그렇게 <헤드윅>을 처음 보던 날, 송아지라도 된 듯이 엉엉 울었다. 몇 시간 참았던 오줌이 끝도 없이 콸콸 쏟아질 때, 잠시 통제를 벗어난 내 몸을 어딘지 망연해져서 볼 때처럼 스스로가 낯설었다. 마른 몸 어디에 그렇게 많은 물이 들어있던 걸까? 내 설움과 상처와 바람이 어떤 것인지, 왜였는지, 그 실체를 확인하고 마주보는 의식처럼 그 후로 몇 번을 울며 보고 또 봤다. 그 전까진 어떤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갖고도 그래 본 적 없었다. 볼 때마다 살아갈 용기가 났고 노래가 꿈에도 나오는, 난데없는 헤드윅‘앓이’였다. 억눌린 것들이 펑펑 터지는 경험, 처음 느껴 본 울고도 개운한 기분. 이런 게 바로 예술이라는 거구나. ‘작품’이란 단어의 의미를 처음 배웠다. ‘퀴어영화’란 거울이 비추어 주는 위로와의 첫 만남으로 그날 밤을 기억한다.
<헤드윅>은 한 성소수자가 기구한 팔자 속에서도 자기혐오와 연민의 굴레에 빠지지 않고 끝내 삶을 사랑해 내는 씩씩한 이야기이다. 미워도 안쓰러운 토미를 용서하는 모습이나 이츠학과의 애증을 소화해 나가는 과정은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더한다. 그리고 난 앵그리인치밴드와 매니저 필리스, 헤드헤즈들의 존재가 특히 가슴을 설레게 했다. 주변에 저렇게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일까? 내게도 저런 친구들이 있다면…. 그때 아마 처음으로 꿈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나도 그를 닮은 예술가로 사는 꿈.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이런 멋진 작품으로 커밍아웃해서 세상의 축하와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쓰고, 감독하고, 직접 연기까지 했다는 존 카메론 미첼이란 게이와 헤드윅의 인생이 그 꿈의 원형이자, 모델이 되었다.
얼떨결에 토미를 향한 복수에 성공한 헤드윅은 스타가 된다. 하지만 그가 바란 건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국 깊은 슬픔에 빠져 폭주하는 헤드윅. 한번 시원하게 악다구니를 치고 나니 어느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마음의 방이다. 모든 게 하얗게 비워진 무대에서 가발도 옷도 벗은 채 처음 맨몸으로 노래하는 그. 남자, 여자, 트랜스, 게이, 드랙퀸, 뭔성애자 그 무엇에도 들어맞지 않았던 애매한 모습 그대로, 비로소 가장 편안한 자신으로. 객석에선 친구들이 글썽이는 눈으로 환호를 보낸다. 그때 그의 말간 미소가 정말 아름다웠다. 이제 맨얼굴로도 노래할 수 있고 벌거벗은 몸으로도 거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타박타박 골목을 나선 그에게 그 담엔 어떤 날들이 펼쳐졌을까? 상처를 훌훌 뒤로하고 삶을 새롭게 마주하는 순간이 눈부셨다.
그날부로 난 본격 시네마키드가 되었다. 진로를 확정하고부턴 ‘예술가 지망생’이었으므로 빨간 것도 당당하게 틀어 달라 했다. 고교시절엔 광주 유일의 예술영화관인 광주극장에 아주 가서 살았고, 그러는 사이 아빠의 DVD방은 문을 닫았다. 살면서 좋은 극장에서 정말 멋진 영화 많이 봤지만 그 작은 9번방의 헤드윅이 지금도 최고의 추억으로 떠오르는 건 그가 내 생의 첫 슈퍼스타였고, 영원한 큰언니이자 뮤즈이기 때문일 거다.
돌아보면 내가 이끌렸던 곳엔 항상 그를 닮은 이들이 있었다. 전통춤에 빠졌을 때, 가장 사랑했던 분들은 기생‧광대‧무당이었다. 그들의 기량이 단연 절정이기도 했지만 혐오과 편견 속에 살아오신 소수자의 삶, 그 사연들에 더욱 크게 공명한 것이다. 자꾸 스스로를 미워하게 했던 세상 앞에 그 분들은 눈물 먹고 자랐기에 더 아름다운 춤을 피워내 보이셨다. 친구사이에 나와 만난 언니들도 헤드윅의 씩씩한 기갈이 떠올라서 마냥 친근했고 헤드헤즈가 헤드윅을 사랑하는 것처럼 지보이스를 사랑했다. 이태원의 오까마와 고고보이, 관객들이 만드는 풍경들은 말할 것도 없지. 그 속에 함께 있으면 마치 우리가 다 형제이고, 고향 같아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는 게 아주 분명히, 찡하게 와 닿곤 했다.
예술대 극작과 전공, 친구사이 회원 / 백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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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고, 당신의 삶과 예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