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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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스케치 #1]
인천 임시공간 오픈세미나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 – 카피레프트의 묘妙〉

이 글은 인천 임시공간에서 열린 「임공재 큐레이션: 아카이벌 액션」 오픈 세미나에서 발표된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 – 카피레프트의 묘妙〉를 바탕으로, 발제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정리한 편집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는 흔히 말하는 아카이브 미술, 즉 전시와 감상을 전제로 다시 조직·배치된 아카이브를 가리킨다. 카피레프트는 단순히 저작권의 법적 갈래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기록을 미술 프로젝트로 끌어올릴 때 예술가가 따라야 할 최소한의 윤리이자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발제자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의 연속간행물인 『친구사이 소식지』라는 퀴어 아카이브를 예로 삼아, 아카이브를 어떻게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로 만들면서도 퀴어 커먼즈(commons)에 가깝게 다룰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발제의 출발점에는 본인의 개인적인 궤도가 놓여 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전면에 서는 일이 어렵던 시기,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한복판이 아니라 그 언저리에 있는 권리들—저작권, 카피레프트, 공유재—에 먼저 관심을 두었다. 창작의 조건이란 세대 간 배움·모방·교류라는 집단적 과정일진데, 이를 오롯이 ‘개인의 재산권’으로 설명하는 태도에 의문이 들면서였다. 그러던 중 브라질 정부가 에이즈 치료제 특허권에 맞서 복제약을 도입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이 사례에서 “지식재산권 vs 공중보건”이라는 거시적인 갈등을 보면서도 자연스럽게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기록, 즉 퀴어 아카이브를 떠올린다. 물리적인 생존권이 복제약을 통해 보장된다면, 퀴어 아카이브는 상징적·사회적·정동적인 차원에서의 생존권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떤 기록과 이미지, 서사가 이 ‘정동적 생존권’에 속한다면, 그 앞에서 상업적 가치나 사유화 욕망은 한 발 비켜서야 한다는 확신이 여기서 생겼다.
이 관점에서 영상 작업과 복제 가능성의 쾌를 함께 이야기한다. 세미나의 발제자이자 미술가인 본인은 성소수자 공동체의 이야기를 인터뷰하고, 촬영하고, 복제해 나누는 일을 반복해 왔다. “모든 사람 앞에 모든 사람을 동시에 데려다 놓을 수 없다면, 복제 가능하다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떠올리게 된다”는 말을 자주 해왔는데, 복제는 정보 접근성이 취약한 공동체에게 아주 현실적인 자원이기 때문일 테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본인이 만나게 된 것이 바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연속간행물, ‘친구사이 소식지’다. 1994년부터 발행된 이 소식지는 단체의 정보 뿐만 아니라, 게이 커뮤니티의 친밀성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변화를 동시에 축적해온 퀴어 아카이브이며, 민간 차원의 아카이브 실천이자 ‘비공식 기록 체계’의 중요한 사례로 읽힌다. 발제자는 이 소식지를 바탕으로 2025년 2월 전시 《흘리는 연습》을 기획하고 참여했다. 본 세미나에서는 작품 설명보다 “아카이브에 접근하는 미술가의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공유재(commons)’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공유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공짜 자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자원과 그것을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된 규칙·관습·가치가 한 세트를 이루는 체계를 가리킨다. 즉 자원 + 공동체 + 규약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공유재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 친구사이 소식지 30년의 축적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퀴어 커먼즈이다. 오랜 시간 이어진 기록, 말하기, 편집의 관행이 이미 나름의 ‘토착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창작물은 카피레프트의 구조를 요구받게 된다. 카피레프트는 “복제·수정·재배포를 허용하되, 그 결과물도 다시 열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구조다. 이를 아카이브 미술에 맞추어 번역하면, “아카이브를 이용해 2차 창작을 해도 좋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다시 공동체와 아카이브로 되돌아갈 경로를 가져야 한다”는 태도가 된다. 발제자는 이때의 카피레프트를, 단순한 저작권 대안이 아니라 아카이브 미술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동시에 아카이브와 미술의 관계를 분명히 짚어야 한다. 아카이브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능하고 의미를 생산한다. 따라서 아카이브를 전시장에 끌어와 ‘보여지게’ 만들려는 욕망은, 엄밀히 말하면 아카이브보다는 미술의 욕망이다. 문제는 이 순간, 아카이브를 구축해온 공동체가 오랫동안 쌓아온 규범과 관리 윤리 위에 미술의 규칙과 욕망이 덧씌워진다는 점이다. 본 발제는 아카이브 미술이 아카이브를 훈계하거나 소유할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토착법에 맞춰 스스로의 행동을 조정하는 윤리를 발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와 연결해 퀴어 예술이 단지 ‘퀴어를 소재로 삼는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퀴어 커뮤니티의 삶과 생존을 견인하는 역사적·정동적 실천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카이브는 누군가의 시간·노동·실패·관계가 축적된 물질이며, 그 아카이브를 ‘컨트롤’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정동적 생존권—자기 이야기를 언제·어떻게·얼마나 드러낼지 선택할 권리—를 건드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문단의 마지막 두 문장은 기록학에서는 큰 효용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아카이브가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여기에 있으며, 퀴어 아카이브가 미술에게 역사를 의식적으로 내어줄 때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는 전시 《흘리는 연습》의 구체적인 장면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소식지를 다루는 작업이 정동적 생존권에 관한 것이라면, 단지 공개한다는 수준을 넘어 누가 정말 이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만날 수 있는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배리어프리, 운영 시간 설정, 무료 관람 정책 등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였다. 또한 30년에 이르는 소식지 전체를 한 명의 기획자가 판단하고 선별하는 대신, 역사학자·상근활동가·디자이너 등 서로 다른 직군의 협력자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반투명한 덩어리’를 함께 다루는 구조를 택했다. 여기서 반투명한 덩어리는, 한 번에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지만 서로 다른 면을 통해 같은 역사에 접속하고 있다는 상태를 비유하는 이미지이다.
전시 속 개별 작업들도 이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발제자 본인과 역사학자 터울이 함께한 〈별 별 별 별 별 별〉은 2,240건의 글을 145개, 다시 32개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아키비스트의 사유의 궤적을 시각화하며, ‘엄격한 분류’가 아니라 아카이브와 맺어 온 생각의 흔적을 보여준다. 발제자 본인이 만든 입체 연표 작업 〈어둑서니〉와 〈글레이즈드 사각 언니〉는 포커스가 흐릿한 얼굴, 난잡하고 엉킨 연표를 통해 선별되지 못한 기록과 망각의 여백을 이미지로 남기는 시도이다. 또 다른 협업자인 이경민의 웹 기반 아카이브는 관람자 각자가 글을 선택해 출력·제본하게 함으로써 모두를 퀴어 출판의 동료이자 소장자로 만드는 장치가 되며, 선택되지 않은 기록들이 필연적으로 남겨지는 상황을 함께 자각하게 만든다. 번역가 남선미는 외부의 텍스트들을 친구사이가 기념할 수 있는 자원으로 들여오며, 폐쇄적으로 보일 수 있는 회원 단체가 사실은 얼마나 긴밀하게 외부와 소통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은 메가 아카이브이자 오픈 액세스로서의 퀴어 아카이브가, 앞선 세대의 작업 위에서 새로운 2차 창작과 관계 맺기를 어떻게 열어 두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발제는 결국 이렇게 정리된다. 친구사이 소식지라는 사례를 통해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를 퀴어 커먼즈에 가깝게 다루는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제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피레프트를 아카이브를 다루는 예술가의 최소한의 윤리를 제안하는 메뉴얼로 받아들이자는 안내이다. 아카이브가 “자원+공동체+규약”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딜레마가 정리되는 순간이 있다. 또한 공동체와 역사를 예술의 영역에 끌어올 때 미추 판단의 중요한 준거는 관계 설정의 아름다움이라고 진단한다. 발제자는 이런 묘(妙)한 균형 위에서, 아카이브 미술이 기록과 생존,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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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의 각주
* 브라질 복제약 사건(에파비렌즈 강제실시권) 관련 브라질 사례는 2007년 브라질 정부가 에이즈 치료제 에파비렌즈(efavirenz)에 대해 특허권자 동의 없이 복제약을 도입하기 위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때 브라질 정부는 TRIPS 체제 안에서 허용되는 공중보건 예외와 더불어, 국가가 국민의 건강권과 보편적 무상 치료를 보장해야 할 헌법·법률상 의무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는 “지식재산권 vs 생존권”의 갈등 속에서, 생존권이 우선될 수 있는 계기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브라질을 참조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 ‘아카이브 충동(archival impulse)’ 개념의 출처 Hal Foster, “An Archival Impulse”, October 110 (Fall 2004). 발제문에서 언급하는 “아카이브 충동(archival impulse)”은 위 글을 주요 참고문헌으로 삼는다. 이는 동시대 미술에서 주변화된 자료, 잊힌 기록을 다시 호출하고 재배열하는 예술적 충동을 분석한 고전 텍스트이며, 발제문에서 말하는 “보여지기 위한 아카이브”, “아카이브 미술”의 이론적 배경으로 기능한다.
* 공유재(commons) 논의와 ‘기록 삭제/보존’에 대한 메모 — 편집자 오어진의 메모 요약 공유재를 “자원 + 공동체 + 규약”의 얽힌 체계로 볼 때, 역사의 기록과 제도적 특성에 의한 근대적 의미의 아카이브와 역사에서 누락 및 배제된 대상을 보존하는 대항기억에 대한 실천도 함께 상상할 수 있다. 발제문 메모에서는 예시로, (대통령기록관 자료 삭제 시도에 맞서 학계에서 ‘기록을 공개 및 누락과 멸실에 대비하라’는 공동성명문를 붙였던 사건, 조선시대에도 당파(또는 권력층)에 따라 기록을 편찬하는 사례들, 그리고 한 ‘마을 아르페’ ’(Community Archpe)의 의의들에 대한 논문 사례-에서 공유재를 둘러싼 공동 관리와 상상력의 양상 등을 떠올릴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메모의 요지는, 퀴어 아카이브 역시 단순한 정보창고가 아니라, 지우려는 힘과 지키려는 힘이 맞부딪히는 공유재의 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발제에서 제안하는 퀴어 커먼즈의 상상력이 이미 다른 맥락의 공동체 실천들과도 닿아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데 있다.
* ‘흘리는 연습’ 이후 과제로 남는 실무적·이론적 질문 — 편집자 오어진의 메모 요약 전시 부분의 메모에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끝이 아니라 향후 과제로 남는 지점들을 이렇게 짚고 있다. (1) 분류체계와 아이템 항목 설정 : 30년치 소식지를 다룰 때,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고 어떤 항목을 메타데이터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실무적 고민이 시급하다는 점. 지금은 전시를 위한 임시적 분류에 가깝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아카이브 실천을 위한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2) 특수성과 표준화 사이의 긴장 : 퀴어 아카이브만의 맥락과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다른 아카이브 기관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일정 부분 통용 가능한 시스템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큰 숙제로 남아 있음을 적고 있다. (3) 아비 바르부르크(아비바르부르크)의 이미지 아틀라스 등과의 연관 : 기존 제도적 분류와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배열하고 사유했던 바르부르크의 시도처럼, 퀴어 아카이브에도 대안적 분류와 감각적 배열 또한 가능해보인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4) “아카이브 아트”인가, 또 다른 실천인가에 대한 자문 :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미술 제도 안에서 소개되는 ‘아카이브 아트’ 중 하나인지, 아니면 퀴어 아카이브 실천의 일부이자 운동으로서의 기록 작업인지에 대한 자기 질문이 남아 있다. 나아가, 기존의 공적 아키비스트(공공 아카이브 체계)와 퀴어 공동체 내부의 아카이브 실천을 언젠가는 더 분명히 구분하고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고민도 덧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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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상근활동가 / 박민영
편집자 / 오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