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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8 : 얼굴없는 것들
2016-02-17 오전 05: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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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월 

: 김경묵 감독, <얼굴없는 것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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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형 사무실로 전화하지 마.”

 

 

 

우선 나는 이 영화, 에 대해 평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영화와 영화의 감독을 스스로 혼동하고 있고, 관객들도 영화에 시연되는 경험과 자신의 경험을 혼동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따라서 나는 어떤 삶, 혹은 어떤 기억에 대해 평할 수 있을 뿐이다. 좀더 정확히는, 이 영화를 통해 나도 내 지저분한 과거에 대해 조금 말하고 싶어졌다. ‘해보았다’, ‘해본 적이 있다’는 말은 왠지 영화와 감독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드는 기분이지만, 그걸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가 흩뿌린 비위를 가로질러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영화의 1부에서처럼 내가 성인 때 미성년자와 자’본 적이 있’고, 내가 미성년자 시절 성인 남자와 자’본 적도 있’다. 또한 자신을 형이라 부르고 파트너에게 아저씨라 불리는, 배나온 결벽증 중년 남성처럼, 나와 자고 싶어 온갖 감언들을 날리다가도 정작 자기의 생활은 한 구석도 꺼내놓지 않으려는 은둔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인간을 어디까지 대충 대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광경과도 같았던 영화 속, 혹은 기억 속의 장면들은 아주 짜증나고, 토나오고, 한편으론 통쾌했다.

 

얼굴이 얼마나 잘생기거나 몸매가 얼마나 좋든, 혹은 테크닉이 얼마나 절륜하든, 그런 사람들과의 섹스 - 혹은 관계는 그야말로 “얼굴없는 것들”과의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규칙을 만들어’보았’다. 섹스(원나잇)와 인간관계를 혼동하지 말 것. 관계에 대한 어떤 희망을 흩뿌리면서 섹스에 임하지 말 것. 섹스는 섹스로만 놔둘 것. 대신 원나잇을 하더라도 자기에 대해 어떤 것도 털어놓지 않으려는 이들과는 자지 않을 것. 관계를 위해서가 아닌, 섹스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좋은 원나잇’을 하고 싶었고, 그를 위한 몇 가지 윤리를 만들어’보았’다. 그 결과 어쨌든 나는 이전보다 좀더 퀄리티있는 사람과 질좋은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오프로 나오기 직전까지 내 머릿속은 채팅방과 매칭어플에서 좋은 사람을 골라 만나는 경험치와 노하우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원나잇이어봤자, 원나잇일 뿐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내가 이걸 길게 쓴 것은, 영화 속 1부의 상황을 내가 겪어’보았’으며, 나아가 나는 모종의 현명함으로 저런 상황에 나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패착을 면해’보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저런 거 겪었는데,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저렇게까지는 안되게 잘 살 수 있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해본’ 경험을 말한다는 게 그렇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나는 안전하며, 지금은 과거의 나보다 한층 살맛이 생겼다는 위안이라도 얻기 위해, 경험은 언급된다. 영화가 여기까지였다면, 나 또한 거기서 그쳤을 것이고 감독 또한 그렇게 ‘해본 것’들을 말하기가 고팠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2부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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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제 몸엔 묻히지 마세요."

 

 

 

누군가가 동성애자가 아니듯이, 나는 스카톨로지 취향이 없고, 유사한 행위를 '해본 적'이 없다, 라고 썼다가,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것은 마치 감독 자신이 겪은 스카톨로지 섹스 테이프를 그대로 이어붙인 2부를 보고, 감독 스스로 이런 플레이를 '해본 적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제하는 듯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감독은 자기가 직접 겪은 이런 장면을 '해본 적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영화의 2부에 이걸 갖다붙였을까?

 

가령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부의 내용과 연결지어, 인간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섹스가 저리도 황폐하다는 것, '내 몸에 묻히지는 말라'는 감독의 대사처럼, 똥을 처바르는 것만큼이나 더러울 수 있는, 섹스로'만' 조직된 인간관계의 비인간성을 목도하며, 이미 사람이되 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게이들의 인간관계와 성윤리를 재규정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우리' 게이들도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교조'로 영화의 감상평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본래 교조는 '맞는' 말이되 폭력적으로 맞는 말을 가리키고, 폭력적이되 '틀린' 말을 교조라 부르진 않는다. 따라서 성소수자 진영이건 어디건 교조는 경계되어야 하지만 완전히 박멸되어서도 안된다. 어쨌든.)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왠지 그런 말을 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영화와 그를 통해 환기되는 관계의 경험이 가리키는 핵심은 아니다. 영화 중에 관객은 당연히 속이 미식거리게 되고, 이 미식거림의 정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추하게 된다. 연출된 것과 연출이 아닌 것, 겪어본 것과 겪어보지 않은 것이 맹렬하게 요동치며 1부를 통해 정리되었던 무언가들이 제 얼굴을 바꾼다. 거기서 겪어'보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교양과 교조로 안전하게 정리될 수 없었던, 똥처럼 더러운 각자의 진짜 과거가 만져진다. 

 

실제 상황 속 한 물음표 남자의, 배에 처발린 그것이 누렇게 오버노출된 빛으로 빛나는 광경은 흡사 비잔틴 성화같다. 그 성스러움 안엔 온갖 보아서는 안될 역겨움과 폭력과 상상 바깥의 것들이 있다. 감독은 자기가 겪은 섹스 필름을 틀어줌으로써, 어떤 아름다운 형태로도 재현 불가능한 경험의 지옥문을 연다. 거기서 1부 동안 머리로 쌓아봤던, 이른바 '해보았'다고 매끈히 정리될 수 있는 과거와 교양이 면구스러워진다. 그래 '겪어보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의 세계로 감독과 관객 모두를 초대한다. 그 긴장이 완성되는 순간 영화가 오롯해진다.

 

'해보았다'는 바를 통해 피터지게 쌓아올린 교양이 얼마간은 필요하되 또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감독은 자기가 해본 스카톨로지 영상을 코끝에 들이밀며 말하고 있다. 감독과 배우와 관객 모두를 감시하는 듯한, 영화에 시종일관 깔리는 화이트노이즈 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이든 아니든, 영화는 그 자체로도 징글맞은 1부를 2부의 파격으로 객관화해내고 있다. 넌 네가 '해본' 것들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느냐고 비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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