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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책읽당 봄맞이 야외독서회 ‘서촌 한 바퀴’ - 조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2015-04-29 오전 06: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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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4월 

책읽당 봄맞이 야외독서회 ‘서촌 한 바퀴’

- 조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나는 서울에 살지 않는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쭉 한 동네에서 자라왔다. 태어나 이사를 딱 두 번 가봤는데, 한 번은 바로 옆 건물로, 그 다음은 길 건너 동네로 간 것이 전부였다. 학교는 항상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리에 있었고, 서울은 먼 나라 같았다. 그러던 내 삶에 ‘서울’이라는 공간이 불쑥 들어온 것은 대학시절부터였다. 지하철을 타고 뚝섬 근처를 지날 때면 창 밖으로 펼쳐진 한강과 서울의 풍경을 볼 수 있었고, 학교 앞에서 버스만 타면 서울 남쪽 신림동부터 노량진, 용산, 종로까지 다닐 수 있었다. 3학년 때는 촛불을 들고 종로와 명동 곳곳을 뛰어다녔고, 종로-시청-명동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듯 공간의 ‘개인사’를 저마다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 같다. 역사를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에게 ‘언제,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꽤나 중요하다.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을 땐 피카디리, 술집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던 종로였지만, 데뷔 이후에는 종로3가 5번 출구를 나서며 ‘이쪽’ 업소, 게이빈, 친구사이 사무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책읽당 4월 선정도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을 쓴 조한 홍익대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강북과 강남에서 살아온 서울 토박이다. 어린 시절 살던 곳부터 그가 다닌 대학 주변까지 그 곳에 엮인 시간과 공간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로 엮어냈다. 책 속에 많은 곳 중 ‘서촌’을 함께 탐방하였다. 서촌은 역사에서는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관리들이 궁궐에 가까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동네가 들어앉고 신분의 한계 안에서 낮은 숨을 쉬어야 했던 중인들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누비며 서로 교유했던 서촌은 청계천의 상류라고 하여 웃대라고도 불렸고, 사대문 가운데서 서쪽에 치우쳐졌다 하여 서촌으로도 불렸다. 요즘은 북촌한옥마을에 이어 ‘서촌’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었다. 자연스레 땅값이 오르고 개발이 많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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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야외독서회 ‘서촌 한 바퀴’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시작되었다. 인왕산에서부터 금천교시장을 따라 내려온 작은 물길이 북악산에서 시작되어 옥류동천과 합류된 백운동천으로 흘러들었는데, 현재의 자하문로는 백운동천의 물길이 그대로 복개되어 큰길이 된 후 1960년대에 다시금 동쪽 편으로 도로 확장을 거친 탓에 물길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파리바게뜨 경복궁역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천교시장 입구에서 탐방을 시작했다. 시인 ‘이상의 집’을 둘러보고 ‘노천명 가옥’과 근처에 있는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 가옥’을 찾으려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과 사위를 위해 1938년 건축한 근대가옥인 ‘박노수 가옥’은 남정 박노수 화백이 생활하던 것에서 이름이 붙었다. 최근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길을 따라 걸으면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겸재 정선이 펴낸 장동팔경첩에 있는 수성동 계곡은 1971년에 지어진 ‘옥인시범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이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광화문까지 한 눈에 보이니, 아파트에서 바라본 경치가 꽤나 운치 있었을 것이다. 근처에 옥인시범아파트 건물 일부를 남겨두었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벽수산장’ 터를 만날 수 있다. 한일 합방 조인식을 앞둔 윤덕영이 황제의 옥새를 찾아오라는 지령을 받고 순종 황제를 협박하여 옥새를 뺏으려하자 순정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었다. 하지만 윤덕영은 조카의 치마를 들추고 기어이 옥새를 일본에 헌상하게 된다. 이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10만원씩 줬는데 윤덕영은 옥새를 빼앗아 온 공로가 인정되어 자작의 작위를 받고 은사금으로 46만원을 받았다. 이 막대한 자금으로 옛 송석원(소나무와 돌이 많아 송석원이라고 이름 붙인 옥류동(현재의 옥인동)에서 1786년 시작된 송석원 ‘시사(詩社)’는 이후 추사 김정희가 바위글씨를 써주면서 그 이름이 길이 전해 내려오게 된다.) 터를 사들이고 조선 최고의 별장을 짓는데 그 이름을 벽수산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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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이 건물을 한양 아방궁, 조선 아방궁이라 불렀다. 당시 벽수산장에는 위의 건물 이외에 14동의 건물과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송석원 대문 문주에서부터 100여 미터를 가야만 중문이 나오고 벽수산장이 나올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영화 서울의 휴일의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2차대전 당시 일본재벌에게 넘어갔다. 해방 후에는 덕수병원으로, 한국전쟁 당시 UN군 장교숙소로, 그 후에는 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사무실로 각각 사용되었다. 1966년 환기 덕트 보수공사를 하다가 용접 불똥이 튀어 2,3층을 태우고, 1973년 도로 공사로 인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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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 입구에는 커다란 돌기둥 네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기둥은 4m 높이로 서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기둥의 일부가 송석원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남아있다. 돌기둥으로 조성된 대문으로는 주로 차량이 드나들었고, 사람들은 옆에 붉은 벽돌 아치로 만들어진 출입구를 이용했다고 한다. 붉은 벽돌 아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 신축 빌라 공사 과정에서 훼손되어 대문 반대편 담장에서 아치모양으로 뻗어 나온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서촌에서 시작된 탐방은 종각 근처 모임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마무리하고 우리들은 안식처 종로3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책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을 읽고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 서울로 여행을 떠나보면 바쁘게 사는 중에도 여행자의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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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책은 친구사이 소모임 '책읽당'의 4월 선정도서로, 당일에 언급된 감상과 토론에 기초하여 쓰여진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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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당 운영자 /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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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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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 2015-04-29 오전 08:18

그리고 조금 오래 걷고 싶으면 신발은 꼭 운동화로...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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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쿠샤 2015-04-30 오전 09:30

비오는 거리를
머리에 꽃달고
해맑게 웃으며
뛰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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