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사이 20년史 톺아보기 #01>
성소수자 인권운동, 문을 열다 - 1994~1997 친구사이 발족 및 초기 활동
▲1994년 1월 25일 발간된 소식지 제1호. ‘초동회’에선 제일 먼저 소식지 발간을 서둘렀다.
’따르릉, 따르릉’
1993년 12월 23일, 미국에서 날아온 장진석씨가 세 명의 남성 동성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성애자 인권모임의 필요성과 계획을 말하고 싶으니 나흘 뒤인 27일 팔래스호텔 커피숍에서 보자는 얘기였다. 다른 세 명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당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모여 동성애자 인권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듬해 1월 7일 3명의 레즈비언과 4명의 게이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모임 ‘초동회’가 탄생했다. 하지만 여성 동성애자들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남성 동성애자들은 새로운 단체를 위해 다시 모였고, 한 달 후 7명의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인 첫 총회에서 초대 대표로 이후명(가명)씨가 선출됐다. 장진석씨가 가져온 동성애, 에이즈 관련 자료를 활용하고 활동을 넓히기 위해 사무실도 화곡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발족한지 어느덧 20주년을 맞이했다. 굴곡진 세월을 지나 이제는 일간지 커버스토리에 등장해 축하까지 받게 된 친구사이.[i] 그 궤적을 모두 들춰내어 소개하기는 힘들지만, 의미 있는 성과들을 사례 위주로 알리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연재를 기획했다. 이름하여 <친구사이 20년史 톺아보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지만 알고 싶고 알 필요가 있는 역사 바라보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 첫 순서는 ‘친구사이 발족 및 초기 활동(1994~1997)’이다.
어려웠던 문 열기, 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김기현씨가 먼저 운을 뗐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처음 친구사이는 종로를 선뜻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온 곳이었어요. ‘종로에 나가면 호모가 있더라’라는 소문 때문에 대놓고 놀지는 못하면서, 그나마 인권단체라는 얘기를 듣고 문을 두드리게 된 거죠.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낮에 아니면 저녁때 전화해서 얘기할 수 있는 단체가 친구사이 밖에 없었던 거예요.” 주말 포장마차 거리에 사람들이 꽉 차고 게이바가 들썩거리는 지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다. 그때는 종로 안에서 친구사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고 한다. 주로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머리에 든 것만 있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관계를 가진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사이는 동성애 관련 세미나 개최, 야유회 및 영화의 밤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 장진석씨가 그때를 추억했다. “초기에 같이 활동했던 친구 중에 제가 국내 게이커뮤니티 출신 중 처음 만난 초대 부대표 오준수씨가 있었어요. 도곡동 초동회 시절 그 친구가 활동하던 출판사 책상 한 켠에서 같이 활동했죠.그 친구는 처음으로 친구사이에 상주하면서 소식지에 글도 쓰고 정말 열심히 했었어요.” 김기현씨도 친구사이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오준수씨라고 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지만 준수 형이 죽은 뒤 천주교와 연계해서HIV/AIDS 관련 쉼터도 처음 만들었고, 2000년대 중반까지 그 형 기일 행사도 함께 했죠.”
1995년 6월 26일에 4개 단체(친구사이,끼리끼리,컴투게더,마음001)가 모여 결성된 ‘동인협(동성애자 인권운동 협의회)’ 소속으로는 여름인권학교, 바자회, 결의대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여름인권학교는 전국에서 모인 100명 이상의 동성애자들이 분임토의, 퀴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하며 성황리에 치러졌다. 김철종씨가 대표였던 1996년 5월 1일에 개설된 전화사서함 ‘153’의 인기 또한 대단했다. “밤에는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해방구 역할을 했죠. 그 때 홍석천 씨도 친구사이에 처음 나왔어요.” 김기현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그리고 친구사이는…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기현씨는 성소수자 노동권과 관련해 계속 활동하고 있고, 한동진씨도 영어회화모임을 지속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김기현씨는‘실질적인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저항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는 커뮤니티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장기적으로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정말 그 추운 겨울에 전단지를 돌렸고, 너무나 포기하고 싶은 수많은 순간들을 버텼어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친구사이 동생들을 보면 행복해요. 고맙고.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20주년을 맞이한 친구사이에게 장진석씨가 남긴 한 마디다. 때론 신기하고 그럼에도 가슴 벅찬 선배들의 고백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굳건히 나아가는 일은 이제 다분히 우리의 몫일 것이다.
[i]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42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