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죽음’ #3] 죽음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 죽음에 대한 그림책 소개
2016-04-18 오후 14: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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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4월 

[커버스토리 '죽음' #3]

죽음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 죽음에 대한 그림책 소개

 

 

당신은 오늘 평소보다 조금 늦게 깨어납니다. 눈을 뜨면 어둠은 다음 번의 밤을 위해 지평선 너머로 물러나고, 그를 대신할 다른 것들이 당신의 하루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햇빛, 냄새, 지끈거리는 턱, 그리고 소리들. 냉장고가 웅웅대는 소리, 등교하는 아이들의 자전거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 만석슈퍼 주인이 오래된 셔터를 천장까지 올리는 소리. 당신은 누워서 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들려오던 하나의 음이 오늘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한 번도 녹음하거나 재생하지 못한 음입니다. 그 음은 아무 말 하지 않는 목구멍이 내는 소리입니다. 그 음은 들숨과 날숨이며, 가청음역대보다 한참 낮거나 높은 소리입니다. 그 음은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살아서 호흡하던 소리입니다. 당신이 사는 세계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모든 것을 따뜻한 침묵으로 감싸주던 숨소리. 어제,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1. 떠남 - <혼자 가야 해>, 조원희, 느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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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누구도 그에 대해 답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세계가 과연 어떤 곳인지 영영 알지 못한 채 살다 죽을 겁니다.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한 평생을 다 살아야만 겨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근거도 없이 우리는 곁을 떠난 그 사람은 지금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다고 믿어요.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니기를, 내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할 시공간이 있어 그 곳에서 그 사람이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요. 죽은 강아지의 여정을 담은 이 책은 우리가 궁금해하던 다음 세상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달래주는 상상화입니다.


책을 펴면, 강아지는 완전히 혼자입니다. 살아있을 적에는 좀 달랐어요. 강아지가 공원에서 뛰놀때 그의 곁에는 보드라운 털을 헝클어뜨려줄 다른 누군가가 함께 뛰어가고 있었죠. 하지만 어제 강아지는 죽었고, 오늘 그는 혼자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텅 빈 공원을 건너가고, 아무도 없는 객실에 오릅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작은 개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에 완전한 작별을 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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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이르면, 강아지는 천천히 노를 젓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처음부터 여기로 오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로, 혼자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 건너 저승에서는 누군가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강아지를 만났을 때 그랬듯, 오늘 다른 세계에 있는 누군가는 우리의 강아지를 처음 만나 영원한 사랑에 빠질 거예요. 그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낯선 땅의 이정표가 되어줄 아주 평화롭고 깊은 사랑일 겁니다.

 

 

2. 꿈 - <어젯밤에 누나하고>, 예프 애르츠 글,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강이경 옮김,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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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는 오후, 아이에게 죽은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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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죽은 누나와 마지팬을 먹고, 나란히 자전거를 밟아 하늘을 날고, 부모님을 염려하는 어른스런 비밀을 나눕니다. 아이는 이 경험을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지만, 아이에게 죽은 누나와 뛰노는 밤은 잠에 들면 꿈을 꾸는 것처럼 당연한 경험입니다. 아이는 누나가 그리웠고, 누나는 바람결에 남아 속삭이며, 둘은 여전히 최고의 친구니까요.


예전에 아이가 엄마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묻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죽는 건 꿈꾸는 거하고 같아. 하지만 더 크지." 우리가 매일 잠들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죽은 이들과 함께 하늘을 날 수도 있겠지요. 너무나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나는 순간, 별안간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방 안을 두리번거린 적이 있지요? 마치 어젯밤의 나는 잠에 들면서 죽어버렸고, 오늘 나는 어제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처음 태어났다는 듯이 말입니다. 일상에 함께 하는 죽음을 깨어남과 꿈, 낮과 밤이라는 비유로 그려낸 그림책. 아름다운 낮잠 같은, 글과 그림이 모두 그리운 마음으로 절절한 책입니다.

 

 

3. 그리움 - <너무 울지 말아라>, 우치다 린타로 글, 다카스 가즈미 그림, 유문조 옮김, 한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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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찾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내가 없어도 너무 놀라지는 마 / 네가 아는 곳이야 내가 있는 곳 아님 저번에 갔던 그때 거기” 라고 시작하는 가을방학의 노래 <클로버>, “아빠 미안 /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이라고 시작하는 진은영의 시 ‘그날 이후’, 그리고 이 책.


책을 펴면 죽은 할아버지가 손자의 행복을 빕니다. “그래도 너무 울지 말아라. 내가 좋아한 너는 웃고 있는 너란다. / 내가 좋아한 너는 힘차게 달리는 너란다. / 죽은 사람은 누구나 산 사람들의 행복을 바란단다. 행복하기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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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 가즈미의 그림은 대상 간의 경계가 흐릿합니다. 이 그림책의 세상에서 그림자와 인간, 풀과 냇물, 죽음과 삶은 유연한 파스텔톤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명, 노을, 유연한 빛이 내리쬘 때 세상의 모서리들은 살짝 둥글어지고 나와 너 사이의 경계는 잠시 흐릿해집니다. 그리움이 깊어질 때 남은 손자와 죽은 할아버지 사이의 거리가 잠시 가까워집니다.

 

 

4. 애도 - 곰과 작은 새, 모토 카즈미 글, 사카이 고마코 그림, 고향옥 옮김,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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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가 죽고, 곰은 그 새를 예쁜 상자에 담아 들고 다닙니다. 모두가 죽은 새를 잊으라고 하지만, 곰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얼마 후 곰은 낯선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게 되고, 그 고양이 역시 하나의 상자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의 상자는 비워지고, 하나의 상자는 채워지게 될 거예요.


이 책에서 사카이 고마코는 아주 과감한 선택을 했습니다. 이 동물들의 이야기를 오로지 흑색으로, 거친 석탄의 질감으로만 그려내기로 한 거죠. 그건 아주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하나의 톤, 하나의 색은 그림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짐으로써 작품을 완결성 있게 묶어줍니다. 검은 판화 같은 사카이 고마코의 그림들은 처음엔 새를 잃은 곰의 막막함을 표현하다가, 이윽고 고양이의 묵직한 위로로 변합니다.


이 검은색이 책 전체를 휘감는 신비로운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 검은색은 그림책의 이미지에 시각적인 통일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그림책의 서사와는 반대방향으로 갈라서 전진하는 대립항이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의 이야기는 곰에게 죽은 새가 아닌 산 고양이라는 다른 친구가 생기고, 죽은 새가 살던 고장을 떠나 고양이와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줄거리만 보면 이 책은 마치 살아있는 다른 존재에게 매혹됨으로써 죽은 이에게 남아있던 미련과 애착을 거두어버릴 수 있었던, 곰의 성공적인 애도기 같아 보입니다. 이때 사카이 고마코가 선택한 검은색 드로잉은 서사에 다른 결을 집어넣습니다. 이 드로잉은 새가 죽어있던 첫 페이지부터 새를 묻고 떠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스스로를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검은색은 여전히 곰의 마음은 무채색의 세상에 남아있다고, 꽃이 피지도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검은 길만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검은색은 애도의 작업이 끝난 뒤에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할 질문으로 존재하는 죽은 이의 존재를 진하고 어둡게 드러냅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 당신은 이 곰의 절망과 아픔이 우리의 손끝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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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슬픔 - <내가 가장 슬플 때>, 마이클 로센 글, 퀜틴 블레이크 그림, 김기택 옮김,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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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먼저 죽은 아이를 원망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슬프고 슬프며 계속해서 슬픈 사람의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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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람은 어느 날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나섰다가, 다음날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가 싫어 입을 닫아버립니다. 슬픈 사람은 어느 날 나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죄 없는 사물들을 파괴하는 악한이 되었다가, 다음 날은 잠들기 전 뿌듯하게 되새길만한 자랑거리를 미리 만들어두는 모범생이 됩니다. 언뜻 보기에 저 아버지의 행동은 일관성도 논리도 없는 엉망진창일 뿐이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행동들은 단 하나의 감정이 변주해내는 장대한 악장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통일성이 있습니다. 아주 거대한 감정 하나가 이 아버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악 당하고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슬픔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푹 젖어 있습니다. 마이클 로센은 기승전결에 따르는 서사 없이 오직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물고늘어져 이야기를 완결해버렸고, 그 고집스러운 결정은 슬픔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표현법을 창안해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말하고 울어도 슬픔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정이란 도리어 그 감정을 느끼는 인간보다 앞서 존재하면서 나의 세계를 완전히 결정지어버린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진실하게 표현해 냅니다.


마지막으로 이 특별한 텍스트와 조응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퀜틴 블레이크의 그림체는 물처럼 줄줄 흐릅니다. 선은 흐늘흐늘하고 색은 중간이 비어있거나 갑자기 까매집니다. 차오르고 번지는 물의 성질, 수채물감의 질감은 우리의 가슴 속에 찰랑이다가 갑자기 넘쳐흐르는 슬픔과 비슷해요. 특히 가슴을 찌르는 부분은 이 장면입니다. 죽은 아들의 성장과정을 정성스레 꾸민 사진첩처럼 담아낸 이 장면과 영원히 텅 비어있게 될 저 마지막 칸. 오래오래 바라보게 되는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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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꿈, 그리움, 애도. 언젠가 제가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순서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 혹시 꿈과 비슷한 거라면, 그리고 내가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만큼 죽은 이가 나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면, 나는 죽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내게 들려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내 삶의 일부로 삼는 방식으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기대하며 그렇게 누군가를 애도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게 이 글의 마지막 자리는 애도가 아니라 슬픔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도는 중요한 작업이고 애도를 이뤄낸 사람들은 성대한 격려를 받아 마땅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뤄내야 하는 과정이며, 때로 그 노력은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을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해, 죽은 자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그에게 투여했던 리비도를 살아있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애착으로 변환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낮은 한숨을 쉬고 또 얼마나 많은 밤을 흐느껴야 하는지요.

 
그러나 오늘 저는 애도에 실패한 사람들의 편입니다. 무엇을 잃은 지 몰라 우울증에 시달리고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사람의 편입니다. 저는 몇 년이 지나도 죽은 이들을 잊지 못하고, 맥락도 없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아픔과 분노 때문에 가슴을 내려치는 당신을 완전히 이해합니다. 저 역시 2년째 한 가지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다른 인간을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동굴에 흐르는 다른 인간의 그림자라도 내 곁에 남기고 싶어 그 테두리를 따라 선을 긋기 시작했고 그 선은 그림이라는 형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생생한 얼굴이 아니라 사라져버릴 희미한 그림자를 붙잡고 싶은 사람의 슬픔을 가늠해 봅니다. 그림도, 글도, 그림책도, 세상의 모든 예술들은 슬픈 자들을 위한 삶의 형식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계에서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조금이나마 생생하게 잡아두고 싶어서 차라리 비(非)세계를 그려내려 애쓰는 슬픈 사람들이요, 그림처럼, 글처럼, 저 역시 슬퍼하는 사람들의 친구입니다. 당신의 옆자리가 저희의 자리입니다. 저와 함께 조금만 더 슬퍼해 주세요.

 

 

* 위 목록에는 책읽당의 고래밥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책을 권해주신 고래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위 이미지들은 알라딘(www.aladin.co.kr)이 제공하는 미리보기 이미지들입니다.

 

* 죽음이 그림책이 된 것처럼, 사랑 역시 그림책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채는 지금 성소수자 그림책 시리즈 2권, <꽁치랑 뽀뽀하면 안 된다고?>의 제작을 위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후원링크 : tumblbug.com/ggongchi2) 이 소녀의 뽀뽀를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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