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호][커버스토리 '가족구성권' #1] <新 가족의 탄생> 좌담회 (1) : 성소수자에게 가족이란?
2018-05-31 오후 18: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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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5월 

 

[커버스토리 '가족구성권' #1]

<新 가족의 탄생> 좌담회 (1)

: 성소수자에게 가족이란?

 

 

1. 2018년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의제의 현주소 
2. 성소수자가 겪는 원가족과의 경험
3. 친밀성과 돌봄에 대한 성소수자의 욕구
4. 가족구성권 제도화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
5. 성소수자 가족구성권에 개입되는 젠더 문제 
6. 성소수자커뮤니티의 독특한 당사자성과 그 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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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울 : 오늘 좌담회는 친구사이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이하 가구넷)에서 공동으로 만든 책인 『新 가족의 탄생』(시대의창, 2018)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이슈에 대해 떠들어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저는 친구사이 소식지 팀장을 맡고 있고, 애인과 동거한지 4년 5개월 째에 돌입하고 있는 터울입니다. 

 

심기용 : 저는 『우리는 폴리아모리한다』(알렙, 2017)라는 책을 썼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가, 하반기에는 마음을 잡고 연구를 하려고, 소수자나 섹슈얼리티에 대해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심기용입니다.

 

터울 : 기용님은 혹시 지금 따로 연애나, 동거 경험이 있으신지요? 

 

심기용 : 저는 동거 경험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연애라고 하는 관계가 하나 있고, 얘랑은 228일째인가 그럴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만나고 있는 파트너도 3명 정도 더 있고요. 

 

백퍀 : 저는 책에서도 언급된 무지개집에 살고 있고, 1인 가구가 다섯 가구 사는 2층에 살고 있고요. 같은 층에 제 애인인 킴이 또다른 1인 가구로 살고 있어요. 그 두 가구를 차지하면서 커플로 지내고 있는 백퍀입니다. 

 

터울 : 원래는 그 1인실에 같이 살지 않았었어요? 

 

백퍀 : 네, 그렇게 살다가, 저희 6명 중에 한 명이 나갔어요. 원래 2층 정원이 5명이었는데, 저희가 한 방에 2명이서 살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살다보니 불편하더라고요. 짐도 많고, 특히 누가 한명 자는데 와서 옷 갈아입고 샤워하고 말리고 불켜고 하는 게 불편해서, 동의를 얻고 한명이 나간 자리에 킴형이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커플과 1인 가구가 같이 살고 있는 요상한 형태의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한 가구처럼 지내고 있고, 무지개집 산 지는 2년차고, 연애는 만 4년, 5년차 된 커플로 지내고 있습니다. 

 

나기 : 저는 여성주의 문화운동단체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기이고요. 3년이 조금 넘은 연애 생활을 하고 있고, 독립할 생각이 없었는데 연애하자마자 독립을 급하게, (웃음) 부동산이 없으니까 너무 살기가 힘들구나, 공간을 전전하면서 다니는 것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월세만큼 들길래, 월세를 차라리 내자 그러고 독립할 공간을 마련해서, 애인과 반동거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정숙조신 : 저는 정숙조신이고, 논바이너리이고요. 성별이분법에저항하는사람들의모임 여행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젠더여행자'를 도균님과 같이 진행하는데, 마침 저희의 지난 번 녹음 주제토크가 가족이었어요. 성소수자 부모모임 라라님과, 가정폭력을 어마어마하게 당한 여행자 회원분이 나오셔서 인터뷰를 했어요. 

 

터울 : 네, 반갑습니다. 

 

 

 

1. 사랑에 차별이 있나요 | 레즈비언 부부 '낮잠과 유다' 이야기
2. 무지갯빛 마음이 모여 사는 곳 | '무지개집' 사람들 이야기
3. 별처럼 반짝이는 인연을 맺다 | 게이 부부 '플플달 제이와 크리스' 이야기
4. 닮은 듯 다른, 믿음 안의 사랑 | 퀴어 커플 '도플과 갱어' 이야기
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
6. 존중과 배려로 함께한 15년의 사랑 | 게이 커플 '승정과 정남' 이야기
7. 우리 관계를 반으로 자를 수 있나요 | 레즈비언 커플 '이경과 하나' 이야기
8. 마음 가는 대로 오늘을 함께하는 두 사람 | 게이 커플 '경태와 범석' 이야기
9. 크리스천 퀴어, 사랑에 눈뜨다 | 퀴어 커플 '무밍과 K' 이야기

 

 


1. 2018년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의제의 현주소 

 


터울 : 먼저 책을 읽고 난 소감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제일 좋았는지, 아니면 어떤 부분은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웃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기 : 저는 이건 좀 아닌데 하는 부분은 없었고, 흥미로웠어요. 아 2018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성소수자 단체에서 낸 가족구성권 관련 책이 나오는데, 목차부터 게이·레즈비언 커플 말고도 퀴어 커플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그리고 그 속에서도 모노아모리가 아니라 폴리아모리를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고, 공동체도 있고, 되게 다양하게 구성하려고 애쓴 것이 너무 드러나서, 아 이제 2018년이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거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어서, (웃음) 사실 어떻게 사는지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또 인터뷰 내용들이 속속들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아는 사람들 얘기라서 더 흥미로웠어요.

 

터울 : 기용님은 어떠셨어요?

 

심기용 : 이런 제목으로 책이 한번쯤은 나와야 할 해가 됐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폴리아모리로서는, 책의 인터뷰이가 두 명씩 나오잖아요. 이게 약간 좀더 다양한 가족들이 있을 텐데, 역시 성소수자 단체에서 만들었으니까 커플 위주로 한 것 같고, 그래도 조금 더 가족에 대한 이미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두 명의 러브스토리를 읽다보니까, 마지막 폴리아모리 친구들도 실은 자기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얘기하고 그 외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얘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어쨌든 폴리아모리가 언명은 됐고, 그렇게 목차 하나를 잡았고, 좋은 책인 것 같아요, 재밌게 읽었어요. 그리고 이 책을 청소년 때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은 들었어요. 저 때는 『게이컬쳐홀릭』이랑, 책이 많지 않았거든요. BL이나 야오이 속의 게이가 아니라 실제 삶 속의 게이 얘기가 궁금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그 분들이 동거하시면서 맞닥뜨리는 문제점들을 보면서, 지금 애인이랑 매일 결혼하고 싶다고 그러거든요, 같이 살고 싶다고. 헌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침 어저께 싸웠는데, (웃음) 아, 동거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일동 웃음) 같이 산다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개인적인 감회가 들었어요. 

 

백퍀 : 이 책의 취지에 대해 공감을 많이 했어요. 제가 무지개집에서 살게 되면서, 제 일상이나 심리적인 안정이나, 개인적인 저의 성장이나 여러 가지에 (무지개집이)영향을 많이 줘서,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갖고는 있는데 제가 글을 쓰는 재주가 별로 없으니까, 좀 아쉽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사람들 만나면 이런 얘기 한번씩 하고. 그러다 인터뷰 나가면 그래서 웬만하면 응하려고 하고, 이번에도 사실 그래서 나온 것도 좀 있어요. 그래서 어쨌든 이 책이 나왔다는 게 되게 감사한 것 같아요. 친구사이 내에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 기쁜 일이고요. 앞으로도 이런 좀 다양한 삶들이 계속해서 노출되고,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어떤 형태의 고정관념을 좀 계속해서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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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네트워크·가족구성권연구모임, <정상가족 관람불가展>, 2012.5.26-6.1.

 

 

 

터울 : 언니네트워크에서도 2012년에 『비정상가족의 비범한 미래기획』을 낸 적이 있잖아요. 그 책과 비교해서 이 책이 어떤 감회가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나기 : 저는 그 프로젝트엔 참가하지 않았어요. 그 때가 제가 처음 활동 시작할 때였어서요. 그 때도 단행본 출간을 길게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 알고 있는데, 결국 처음에 전시를 하고 스토리북을 만들 때 단행본 만드는 것까지 합의했으면 그 때 책이 나왔을 텐데, 그 때 못 나왔고, 이후에 한 해 뒤에 단행본을 만들려고 작업을 했을 때 안 만들어지게 된 이유가, 스토리북에 나온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가족 상황이 변화했거든요. (일동 웃음) 그래서 못 나왔다고 들었어요. (웃음) 

 

터울 : 아 그러면 그 책은 정식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전시도록 같은 형태로 나온 거군요.

 

나기 : 네, 그렇죠. 전시회+스토리북으로, 전시회와 겸한 스토리북으로 발간했는데, 그건 한정된 수량으로만 발행했던 거고, 단행본 출간을 하려고 했었는데 실패한 거죠. 그래서 아, 이렇게 성소수자 가족이 불안정하다, (웃음) 또 그 책엔 성소수자 가족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비혼모 분들도 있었고, 공동체도 한 3-4개 있었고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공동체들도 구성원들이 거의 태반이 달라졌던 상황이었고, 레즈비언 커플도 거의 다 헤어지고 해서, 못 나왔었죠. 

 

그래서 이런 주제로 단행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참 대단했다-는 소회가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단행본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게 장기간의 파트너십을 하고 있는 분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결혼에 준하는 파트너십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장기간의 파트너십을 위해서 노력해온 시간들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이런 커플들이 발견된 만큼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가 쌓였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2012년과 달라진 점이 뭐가 있을까, (웃음) 그런 생각도 많이 들더라고요.

 

터울 : 이 책에 대해 제가 언급한 건, 『新 가족의 탄생』 이전의 연구사, 내지는 활동사의 차원에서 이 책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어찌보면 『新 가족의 탄생』보다 더 재미있는 내용들도 거기에 많이 들어가 있어서,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사실 여기 나와있는 커플들도 1-2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웃음) 

 

심기용 : 쇄를 여러 번 찍기는 어려운 책일 수도 있겠네요. 그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는데. (웃음) 

 

나기 : 그래도 일단 단행본으로 나왔으니까, 헤어지더라도 이건 이 때의 기록인 거고, 헤어졌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고백한 이 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웃음) 

 

심기용 : 우리가 왜 책에 나온 사람들을 변론해주고 있는 거죠? (일동 웃음)

 

터울 :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웃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주제에 비해서 되게 대중적으로 구성되었고, 의도적으로 가볍게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사실은 단행본으로 만들기도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되게 독특한 형식이에요. 녹취록과 큐레이팅하는 본문이 같이 모여 있는데, 그것들의 의도가 뭔가 개개인의 이야기나 정체성의 특수성을 깊게 파들어가기 보다는, 이 사람들도 친밀성을 나누고 싶은 한 사람이라는 보편성들이 많이 강조되고, 그러다보니 다 읽고 나면 더 캐묻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더 청하고 싶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대중적인 책으로서 일정 정도 의미가 있는 동시에, 왜 인터뷰에서 이걸 더 안 캐물었을까? (웃음) 라는 생각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자리도 만든 것이고요. 

더불어 책에 논바이너리 커플 이야기도 나오는데, 정숙조신님은 어떻게 읽으셨어요?

 

정숙조신 : 제가 소개해드렸어요. 당시에 마침 논바이너리 커플이 있었고, 그 커플이 마침 퀴퍼에서 일정한 사건을 겪었던지라, 이건 좋은 인터뷰 감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인터뷰이를 섭외해드렸죠. 

 

터울 : 그 인터뷰가 이 책에서 전 제일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정숙조신 : 그런데 저는 일단 가족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같은 게 별로 없어서, (웃음) 

 

터울 : 그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에게도 '결혼'이나 '가족'이라는 단어가 마냥 긍정적인 건 아니에요.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잖아요. 그래도 쉽게 쓰는 현실 언어니까 버리지 말고 새로 구성해 사용하려는 거죠." (유다, 21쪽)

 

"가족이 언젠가는 해체될 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수도 있어요. 마음을 너무 닫아두진 말았으면 해요." (낮잠, 38쪽)

 

"여러 사건을 통해서 지금은 가족 해체주의까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원가족에게 일찍이 커밍아웃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아 부침이 많았던 터라 지금은 애증만 남은 채로 절연했거든요." (도플, 113쪽)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이 원가족과의 관계 형성 및 분리 과정에서 겪는 일들" (254쪽)

 

 

 

 

2. 성소수자가 겪는 원가족과의 경험

 

 

터울 : 저는 이 책에서 되게 흥미로웠던 것이, 우리가 대안적 가족구성권을 이야기할 때, 항상 정상가족과의 관계가 화두처럼 남게 되잖아요.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은 정상가족에 비해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른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데, 책에서 보면 거의 모든 인터뷰이가 원가족이라고 하는, 자기가 원래 처해있었던 가족과 일정한 불화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가족이 지긋지긋한 개념이기도 한 거죠, 사실. 가족이 원래 '스위트홈'인 게 아니라 지긋지긋한 거고, 일정한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건 페미니즘에서 많이 얘기하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뭔가 자기만의 가족을 만든다고 했을 때는 일정하게 갱신된 가족에 대한 상상이 요구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이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원래 내가 태어난, 부친과 모친이 있는 형태의 가족에 대한 경험을 나눠보고 싶어요. 

 

심기용 : 저는 이런 질문이 있을 것 같아서, 아까 오면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혈연가족을 저주해요. 그리고 제 원가족에 대해서 아주 큰 혐오와 미움과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족에 대한 큰 갈망이 있거든요. 가족이 싫은데, 가족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그럼 그 가족이 뭘까에 대해서 생각을 오래오래 했는데, 일단 혈연가족은 아닌 것 같다, 피를 나눈 가족일 필요는 없는데,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는 그런 느낌의 가족이고요. 이 책을 보면서도 꼭 우리의 가족이 기존에 가지던 가족의 형태일 필요는 없고, 추석 때 가서 만나고 설에 만나는 전통적인 가족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 질문이 생기는 게, 가족이란 개념 자체가 필요없는 거 아니냐, 기존의 가족 개념이 아니면. 그런데 저는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공동체가 필요하고, 거기에 뭔가 발디딜 곳이 있다고 하면 그건 가족인 거고, 저한테는 그런 의미에서의 가족인 거고요. 

 

생각을 하다보니까 1인 가구는 가족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지금 대가족에서 살거든요. 그러다보니까 1인 가구에 대한 상상이 생겼어요. 저희는 증조할머니가 살아 계세요. 증조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 저, 동생, 이렇게 해서 같이 살고 있는데, (탄식) 모든 것에 시비가 걸리고, 그 세대의 문화가 섞여있잖아요. 서로 조율이 안돼요. 그러니까 가족들이 알아요,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밥만 먹어요. 이렇게 할 거면, (웃음) 굳이 내가 여기에서 더 살아가는 이유도 모르겠고. 경제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저는 그런 경험이 있어요. 안좋은 기억들도 많고, 엄마 아빠 이혼하시고. 

 

그래서 저는 그런 얘기를 안 들어요. 집안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세요. 저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황혼 이혼을 하셨어요. 할머니가 "내가 너네 부모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헀고, 애 셋 키웠고, 난 너랑 이제 만날 필요 없다", 하고 이혼하고 나오셔서 혼자 땅 사서 살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엄마같은 경우에도, 엄마 아빠가 정말 온 가족을 동원해서 싸우셨단 말이에요, 흡사 가문과 가문의 전쟁이었어요. 두 분 다 장남이고 장녀셨거든요. 그래서 아파트 하나 두고 부동산으로 싸우고, 그걸 다 보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저한테 결혼하지 말라고 하세요. 저는 그건 되게 편한 것 같아요. 이상한 집안이죠. (웃음)

 

터울 : 이른바 혈연가족 안에는 두터운 침묵의 이불이 있죠. 애써 들추지 않으려고 하는. 그리고 말씀하셨다시피, 정상가족이라고 불리는 가족들 안에서도 어떤 종류의 비규범성과 퀴어니스는 들어가기 마련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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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네트워크(가구넷).

 

 

 

나기 : 정상가족이라고 했을 때, 뭘 정상가족이라고 상상하느냐가 다 다른 것 같아요. 저희 가족이야말로 교과서에 나오는 핵가족, 어머니 아버지 오빠 나, 이렇게 4인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현대 가족. 이것이야말로 현재에 보기 드문 비정상적인 핵가족이다, (일동 웃음) 왜냐하면 모두가 조부가 있고, 뭔가 연결된 친척들이 굉장히 많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까지 단절되어서 살아가는 핵가족이 없어요. 저희는 양가의 조부모님들이 다 일찍 돌아가셨고, 아무도 없어요. 친척이라고 있긴 있는데, 의미있는 왕래를 거의 안 해요. 그러다보니까 정말 핵가족이에요. 그래서 늘 이야기해요,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일 수가 없다, (일동 웃음) 그런데 그게 너무나도 이상적인 형태에 들어맞는 모양이잖아요. 그러다보니 그 화목해야 한다는 압박이 엄청 심했던 것 같아요. 이걸 깨뜨리면 안된다는 압박이 심했었고, 그것 때문에 많이 갈등했었죠. 

 

어쨌든 부모님은 저와 세대가 다르고, 자식이 자신과 동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의견을 가진 주체라고는,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러시듯이 생각을 안하시거든요. 예전엔 오빠가 있으니까, 오빠랑 성별로 구분되어서 다르게 키워지는 것 자체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반발이 심했고, 그런 것 때문에 부모님이랑 갈등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워낙에 양가에 아무도 없다보니까, 그냥 부모를 나와 30살 정도 차이가 많이 나는, 세대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보살핌을 받고 있고, 언젠가는 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내가 저 사람을 보살펴야 될지도 모르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던 같아요. 굉장히 많고 격렬한 싸움이 있었지만, 그 시기는 이미 다 지나갔고, 지금은 서로 기운이 빠져서 안 싸워요. (웃음) 

 

내가 뭐에 화를 내는지 다 알아요. 내가 어떤 뉴스를 봤을 때 꼭지가 돌아가지고 쌍욕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성폭력 뉴스나 가정폭력이나 성매매나, 기타 페미니즘 이슈라든가 성소수자 이슈가 TV에 등장했을 때, 뭐라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앞에서 대놓고 퍼붓는다는 것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 수 있다는 걸 부모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싸움의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은 뭔가 싸울 것 같은 말을 했을 때, 본인도 알아요. 하지 말자. (일동 웃음) 아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하자, 그러고 넘어가고. 그리고 외부에 나가서 누군가가 저의 삶에 대해서 "나이가 들어가는데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살고 있느냐"든가 가족을 꾸리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면, 부모님이 나서서 커버쳐요. 결혼의 기역 자도 꺼내지 말라고. (웃음) 그냥 우리 사이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닥치라고. (웃음) 그래서 지금은 굉장히 많이 편해진 상태예요. 독립하기도 했고. 

 

터울 : 과정이야 어쨌든 가족들과 나름 협상을 시도하셨고, 일정한 성과가 있는 셈이네요. 

 

나기 : 그렇죠, 저는 이미 19살 때부터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해왔고, 한번 커밍아웃도 했었고요. 그게 금세 다 잊혀졌지만 어쨌든, 그러고 나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로 한 10여년을 설득해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매번 매순간 이중인격자처럼 제게 말씀하시지만,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른 거죠. 이제 결혼 가지고는 뭐라고 안하세요. 그런데 저는 가족이 뭐냐고 생각하냐면, 피로 연결되어있거나 법률로 연결되어있다기 보다는, 결국에 가족이 원하는 건 돌봄의 관계라고 생각하거든요. 돌볼 수 있고 돌보고 싶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운더리를 저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도 원가족이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언젠가 다시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돌볼 책임이 나한테 있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돌보고 싶기도 하고, 여전히 지금도 돌보고 있고. 그런데 이제 좀더 확장된 관계로서, 지금 파트너라든가, 아니면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의 사람들이 제가 돌보고 싶고 돌봐야 하는, 새로운 확장된 가족의 형태이기는 하죠. 저는 가족을 그렇게 이해해요. 

 

터울 : 원가족도 가족이라는 말이 무겁게 와닿네요. 사실은 성소수자들이 대개는 외면하고 싶어하는 사실이기도 한데요. 제 얘기를 하면, 저는 뭐랄까... 몇 가지 변수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집에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는데, 커밍아웃을 하기에는 뭔가 그 전에 해야 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하는 게 아니면, 어느 정도 대한민국에서, 특히 남성이 집에서 커밍아웃을 한다는 의미는, 뭔가 내가 동성애자인 것과는 별개로, 나는 가족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가져갈 거라는 확답이 같이 패키지로 묶여있는 느낌인 거죠. 그냥 내가 게이야-라는 게 별로 중요한 진리치가 아닌 느낌. (웃음) 

 

나기 : 커밍아웃을 하는 게, 부양의 의무를 지겠다는 것과 같은 거란 건가요?

 

터울 : 그러니까 커밍아웃만으로는 플로우가 안되는 느낌인 거죠. 뭔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지 않고서는, 

 

심기용 : 내 프라이버시를 여기까지 까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터울 : 그렇죠, 그런 느낌인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게이 정체성과 관련해서 수필집을 한 권 냈었는데, 그걸 드리면서 커밍아웃을 하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딘가 직장을 잡고, (웃음) 주위의 게이들을 보면 직장을 잡고 용돈을 드리면서 커밍아웃을 하는 게 교범인 경우들이 많더라고요. 돈은 쥐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웃음) 결혼은 안하더라도, 그런 게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이 말은, 가족이란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우회적인 이야기인 거죠. 가족이 내 삶과 내 섹슈얼리티를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경제적인 돌봄이 더 중요하게 매개되는 부분이 있죠. 

 

거기에 제가 나름대로 성소수자로서 동거를 하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이, 물론 남성인 것도 있겠고, 20대 때 학교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 가족이랑 물리적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게 집이 한 10년 전에 폭삭 망해서, 집에서 나를 결혼시킬 돈이 없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집이 되게 검박하게 살고 있고 그냥 각자 알아서 일을 하시고, 큰 압박을 주지 않는 것도 큰 변수인 것 같아요. 주위에 보면, 성소수자들 중에 집에 돈이 많을 경우에, 30대 이후에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더라고요. "내가 내 돈 들여서 너 결혼시키겠다는데 네가 뭔데 결혼 안하냐"는 식인 거죠. (웃음) 그런 걸 보면 가족이란 말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복류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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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사이, "동성애자가 선정한 예쁜가족대회", 2007.6.2. 

 

 

 

백퍀 : 저는 원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데, (웃음) 일단 저도 저랑 형이랑, 아버지·어머니, 이렇게 4명의 핵가족인데, 그냥 제가 별 생각없이 자랐던 걸 보면 화목한 가정이었어요. 지금도 비슷한데, 엄마랑 굉장히 친밀했고, 엄마랑만 친해서, 어렴풋이 중학교 때 나는 엄마한테만 커밍아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 때 정말 크게 절망했던 게, 그러면 내가 이 가족한테는 말할 사람이 없겠구나, 나는 결국은 언젠가 이 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군대 갔다 와서 친구사이를 나오면서, 괜한 바람이 들어서, 제가 약간 충동적인 사람이거든요. 아빠한테 말을 한 거죠. 원래는 사실 아빠에 대한 신뢰가 많지는 않았거든요. 아빠가 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란 건 알지만,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소통하는 기술이나 이런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아빠랑 있는 걸 힘들어했었어요.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 집에 같이 지내면서, 일을 그 때 같이 했었어요. 어머니랑 아버지가 하시는 가게에서 제가 1년 동안 매니저 일을 하게 됐는데, 그 무렵에 예전에 돌아가셨던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은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거든요. 그 때 느꼈던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나 여러 가지 응어리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약간의 오해가 풀린다고 느끼면서 제가 무장해제를 살짝 했던 거예요. 그날, 그 때 되게 충동적으로 느끼고 제가 커밍아웃을 해버린 거죠. 그런데 그 때 사실 왜 했냐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안하면 사실 평생 안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좀 저지르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그래 아빠랑 나랑 얼마나 더 살겠어, 그냥 해버려야지-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사실 그 마음 속에는 이걸 하면 아빠랑 더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했지만, 결과는 굉장히 안 좋았어요. 

 

아버지가 그 때는 괜찮다고 해서 잘된 줄 알고, 되게 혼자 좋아했는데,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인가 갑자기 아빠가 점점 피폐해지더니, (웃음) 네이버를 막 뒤져봤나봐요. 찜방에서 뭘 하고 뭘 하고 이요나 목사 글 보고 난리가 난 거죠. 갑자기 새벽에 제 방에 쳐들어오더니, 너 이제 조금 있으면 기저귀 찰 거라고, 찜방 가서 항문섹스 하다가 기저귀 찰 거라고 저한테 저주를 퍼붓는 거예요. (일동 웃음) 

 

터울 : 아니 검색을 좀 잘하실 것이지, (웃음) 좋은 내용도 많은데, (웃음)

 

백퍀 : 그래서 내가, 아니 진짜 내가 해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일동 웃음) 나는 뭐, 나 아무 것도 잘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면 도대체 뭘 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지 싶어서, 그 때는 뭣 모르고 저 나름대로 엄청나게 공격적으로 방어를 한 거예요. 그래서 굉장히 제가 심리적으로 너무 피폐해져서, 그 때 사실 결심한 거예요. 집을 무조건 나가야겠다. 그리고 갑자기 아빠가 용돈을 끊으시겠다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여서 그 때 시험공부하면서 용돈 받고 지내고 있었는데, 그 때 학교를 졸업하면서 제가 국가고시를 보는 게 있어서, 쥐죽은 듯이 공부하면서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용돈 끊는다, 그 놈은 어디 있냐, 엄마랑 만나러 오겠다 그러고. 자기가 만나보겠다면서. (웃음) 

 

어쨌든 그런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그 때는 잠깐 무마를 했어요. 내가 게이인 것과, 내가 남자를 사귀고 있는 것과, 내가 친구사이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세 개가 다 핵폭탄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두 개의 핵폭탄을 거짓말로 무마했어요. (웃음) 일단 그런 데(?) 가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게이인 건 맞다, 그래도 엄마 아빠를 생각해서 조용히 지내겠다고 타협을 하고, 조용히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했죠. 그러고 나서 당장 뭘할 지 모르겠다가, 마침 그 때 어머니 아버지가 가게를 시작했는데 거기 좀 일손이 필요했나봐요. 그래서 제가 매니저로 일하겠다 해서 돈을 받으면서 일을 했어요. 그렇게 1년 일하고 나와서 무지개집에서 독립을 하니까, 가정의 평화가 찾아온 거예요. 제가 돌아오길 바라시기도 하지만, 사실 또 눈에 안보이니까 좋은 기억만 남아있고, 그냥 전화통화 한번씩 하고 1년에 한두번씩 보고 하니까 오히려 너무 좋은 거예요.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 뒤로. 

 

그래서 지금은 도대체 가족이 뭘까, 옛날에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바랐던 마음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것보다 그냥 서로 이렇게 잘 있구나-라고 알고 있고, 그냥 서로 안위를 궁금해하고, 서로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정도만 잘 전하고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게 평화를 지키는 일이구나, 우리 가족한테는 그게 더 평화롭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서, 사실 다시 커밍아웃을 하고 그런 게 사실 저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 거예요, 이제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게이라고 얘기했고, 한번씩 자꾸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떠보는 행동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저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고요. 안 들키면 평화롭게 있는 거고, 행여나 만약 들키면 그 때는 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저한테 가족은, 저도 나기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한테 가족은 언젠가 필요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사실 왠지 제가 엄마 아빠한테 도움을 주는 것보다, 죽기 전까지 제가 도움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은 사실 들어요. (웃음) 그래서 그냥 부모님과 이런 관계로 지내고 있는 중이고, 

 

그 때 그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들었던 건, 아빠가 내가 게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충격받고 너무 힘들어했던 게 왜 그런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아빠가 생각했던 나라는 아들이, 아빠의 머릿속에 있는 게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사람이 됐을 때, 자기 아들이 더 이상 아니고, 자기를 떠나거나, 아니면 애가 진짜 자살하거나 어떻게 잘못돼버릴 것만 같은 그런 믿음이 핵폭탄처럼 증폭되면서 과민반응을 했던 것 같은데, 난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얘기하면서 일부러 저는 한번씩 용돈 드리고 그러거든요. 작은 돈이지만 어쨌든 나는 아빠한테 계속해서 이럴 마음이 있다는 걸 한번씩 표하는데, 그러면서 생각이 들었던 건, 그런 믿음이 되게 중요하구나, 그냥 아빠가 바라는 내 모습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도 아빠에겐 중요할 수 있겠지만, 아빠도 모르는 아빠의 잠재의식 속엔 이 관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더 높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터울 : 그게 그런 것 같아요. 혈연 가족 안에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너무나 제도화되어 있어서, 자식의 성정체성이나 진실보다는 자식 노릇이 사실 더 중요한, (웃음) 제가 아까 말씀드린 '커밍아웃의 패키지'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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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집 전경.

 

 

 

 

정숙조신 : (욕설) 욕나오는 얘기네요. 저에게 원가족이란, 어떻게 그들과의 관계를 안전하게 자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싶어요. 혈연가족은 적이고요, 없애야 할 상대고요. 

 

심기용 : 이거 약간 찬반토론 분위기네요. (일동 웃음) 원가족이랑 그래도 잘 지내는 분들이랑, 

 

정숙조신 : 그딴 거 집어치우라고요. (웃음) 

 

심기용 : 원가족도 가족이다, 그런 느낌이었는데, (웃음)

 

정숙조신 : (욕설) (욕설)

 

터울 : 사실 성소수자들이 원가족과 가지는 다양한 관계가 있는데, 보통은 아까 얘기했다시피 떨어져 살아야 서로에게 더 좋은 것 같고, 그리고 더군다나 논바이너리라고 하면 남성과 여성 중에 어떤 쪽으로 패싱되지 않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그 패싱되지 않음이 촉발하는 여러 억압들이 따라붙을 것 같거든요. 

 

정숙조신 : 일단 원가족과 공간적으로 독립되고, 물리적으로 격리되는 게 삶의 질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나마 부모님이 외국에 살기 때문에 그게 어느 정도 확보됐던 건데, 얼마 전에 뉴질랜드에 사시는 저희 어머니께서 저희 집에 쳐들어와서, 3주 예정으로 집안을 점거하실 예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오신 직후부터 어마어마한 과노동에 시달리고 있고요. 왜냐하면 집안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삶의 질이 와장창 깨지고, 올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드라마를 찍고, 어쨌든 따로 산다고 해도 이런 위험성은 항상 내재하고 있는 거죠.

 

사실 굉장히 많은 성소수자들이 혈연가족이랑 의절당하는 스토리들이 되게 많잖아요. 논바이너리들의 경우에도 그런 경우들이 많아서, 어떻게 잘 의절하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전에 일단 감정적인 선부터 끊고, 그게 됐다고 하면 물리적인 단계로 가는 건데, 그러기가 쉽지 않죠. 

 

이번에 저희 어머니가 와서 무슨 소리를 했냐면, 저희 집에 짐이 좀 엄청나게 많아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수준으로 짐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정리정돈이 제대로 안된 집일 수밖에 없는데, 와서 '네가 사람이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짐을 컨트롤 못하는 것 때문에 저는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됐고요. 실제로 정신장애로 분류되는 것 중에 '저장강박'이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특히 2010년대 초반에 한국 언론에서 많이 유행으로 다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게 있는 사람들을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괴물 취급하는 기사들이 많이 있었고 그랬는데. 저도 그런 부분이 좀 있다고 생각해요. 어쩄든 중요한 건, 그것 때문에 나는 사람 자격이 없다거나 죄인이라거나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느냐, 질병이나 장애를 대하는 정상성의 입장에 선 태도를 딱 겪었고요. 

 

어머니가 저한테 편 논리가, 네가 결혼 안한다고 하는 것도 나는 이제 포기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납득은 안되지만 그러려니 했고, 잘나가던 엘리트 코스를 포기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해서 저의 가능성에 비해 훨씬 낮은 경제적 계급으로 살고 있는 것도 기대가 높았지만 포기를 했는데, 네가 이렇게 사는 건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정상성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을 못하겠다-라는 식의 논리를 펴는 거예요. 정말 이거 생각해보면 완전히 가스라이팅인 건데, 그런데 이게 저의 약점을 파고든 게, 예를 들어서 "너는 왜 이렇게 뚱뚱하냐"라든가 "너 왜 이렇게 게으르냐"라든가 그런 식으로 어머니가 저한테 파고들었으면, 그건 저한테 그렇게까지 큰 데미지를 주진 않거든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어떤 식으로 방어할 수 있는, 나는 그렇게 살아도 정당해, 나는 이대로도 충분해-라는 게 잘 자리가 잡혀있는데, 짐이 많고 컨트롤을 못하는 건 제 입장에서도, 최소한 나는 이런 면에서 무능해-부터 시작해서, 잠재적인 죄의식 같은 게 깔려있었던 거죠. 그걸 까뒤집어서 자극하니까, 거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짐을 일단 버리기 시작했어요. 버려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나 큰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실행에 못 옮기고 있었던 거였기 때문에, 옷을 반을 버려야겠다는 걸 목표로 삼고 어제부터 하고 있는데 어제 밤을 꼴딱 샜고요, 이번 주에도 계속 해야 될 것 같아요. 엄청난 과노동을 해야 할 것 같고, 거기에 맞춰서 어머니가 옷방에 행거를 다 치우고 제대로 된 드레스룸 가구를 사겠다-부터 시작해서, 정리전문가를 부르겠다, 거기서 또 저장강박 전문가인 신경정신과 대학교수를 예약해서 정신과를 가자는 소리까지 나오고. 그런데 그걸 제가 제대로 거부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물론 그 대학병원 정신과 예약은 3차 의료기관이기 때문에 1·2차 의료기관에서 진료 의뢰서가 있어야 되는데, 어머니가 무슨 소리까지 했냐면, 제가 지금 감기에 걸려서 근무 시간에 이비인후과를 갔다왔거든요. 이비인후과에서 정신과 진료의뢰서를 받아올 수 없냐는 이딴 소리까지 나오는 거예요. 정말 기가 차서. 

 

터울 : (일동 한숨) 마음이 아프네요.

 

나기 : 가족과 잘 헤어지는 법을 빨리...

 

터울 : 말씀 중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도 이해는 안되지만 받아들이겠다"는 그 말 한마디 안에 굉장히 장구한 역사가 들리는 느낌이었어요. 아까 얘기했던 '자식 노릇'이라는, 정상가족 안의 롤이 얼마나 시스젠더 중심적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심기용 : 듣다보니까, 부모님의 직업도 되게 중요한 것 같은데, 저는 되게 특이한 집안이거든요. 엄마 아빠가 다 정치인인 집안이에요. 엄마는 자유한국당, 한나라당 때부터 시의원을 두 번 하고, 아빠도 무소속으로 시의원 두 번 하고. 

 

터울 : 처음 알았어요.

 

심기용 : 어머니는 정치 성향은 진보적이신데, 공천을 주니까 그 당에 간 거죠. 그런데 이혼하던 해에 지방선거가 있었고, 엄마 아빠가 같은 지역구에 나온 거예요. (일동 놀람) 

 

나기 : 대박이다... 이거 정치 드라마 아니에요? (웃음)

 

백퍀 : 미드야 미드. 

 

심기용 : 엄마는 1등하고 아빠는 2등해서 아빤 떨어지고 엄마가 됐고 이랬는데, 그런 느낌이에요. 그때부터, 몇몇 분은 가족이 내가 언젠가 봉양해야겠다는 느낌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다른 쪽 편을 좀 들자면, 섬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막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동생같은 애, 마음에 드는 애를 만나서 '야, 이 섬을 탈출하자' 그렇게 해가지고 탈출계획을 짜는 그런 기분이고, 그리고 엄마 아빠가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모든 집안 싸움, 내 정보를 공개하고 내가 어느 대학교를 가고 이게 다 타협이에요. 엄마가 저 대학교 들어가기 전에 육군사관학교를 가라고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를 나왔는데, 대안학교는 약간 마이너하니까, 군인이 돼서 메이저가 돼라, 

 

터울 : 살짝 군부독재 시절의.. (웃음) 

 

심기용 : 그런데 나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난 군인 못한다 그랬더니, 엄마가 그건 이제 까였잖아요. 그러니까 넌 대학은 인서울로 가야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주고받는 싸움이었고, 그게 커밍아웃하고도 연결되어서, 가령 누나가 집을 나갔는데, 그런 식으로 자식들이 나가면, 부모님들은 정치인이잖아요. 엄마는 정치인이니까, 아들이 집을 나가면 엄마한테 손해예요. 사회적 명예를 되게 중요시하세요, 모든 가족들이. 그래서 제가 활동하는 것도 다 알고 있고, 성소수자인 것도 다 알고 있고,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쫓아내거나 갈등을 전혀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건 침묵해야 할 거리예요. 이건 자기 주변에 알려져도 안되고, 자긴 자유한국당이니까. 그러니까 알려져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얘를 내쫓을 수는 없어, 왜냐하면 누나가 먼저 집을 나갔기 때문에, 한 명 더 나가는 건 자기 지위에, 콩가루 집안이란 얘기가 들리면 안되는 거예요. (웃음)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집안이고,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봉양을 해야겠다, 감사해야겠다는 그런 건 증조할머니에게서 끝났고, 아무에게도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정말 주고받는 것의 싸움이었고, 지금은 교착상태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거고.

 

나기 : 저도 봉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심기용 : 그쵸, 어쨌든 같이 기여하고 돌보는 관계라는 게 상상이 되잖아요. 저는 그게 아니에요. 조커 카드를 꺼냈다 말았다, 이런 느낌이에요. 

 

나기 : 그래서 원가족과의 관계라고 하는 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는 의미가 남아있느냐에 따라서, 정말 의미가 없으면 바로 끊어버리는 게 맞죠. 앞으로 먼 미래를 봤을 때, 당장 끊어버려야 되는데 못 끊는 게 더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저는 결혼 안한다는 얘기를 처음에 아주 일찍부터 시작했고, 그 타협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좋은 대학에 가는 거였어요. 좋은 대학에 가서 이 정도까지 했으면 날 독립시켜주겠지, (일동 웃음) 이렇게까지 했는데 날 독립시켜주겠지-가 나의 마지노선이었죠. 그런데 그게 전혀 독립과 상관없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깨닫고 난 다음에는 임대보증금이라도 빨리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심기용 : 그런데 정말 그런 사회적 지위·신분으로 타협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에 인서울을 요구해서 인서울 대학을 갔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그 대학을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세요. 이런 식인 거예요, 계속.

 

정숙조신 : 그러니까요. 맞아요.

 

심기용 : 끝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걸 교착상태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끊어버려야 해요, 나는.

 

나기 : 그러니까 그 성소수자, 소수자성이라는 저울 한쪽의 눈금을 맞추려고 다른 쪽에 뭔가를 더 쌓아서, 이런 게 터졌을 때 내가 이만큼 쌓았으니까 뭔가 안전지대가 돼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건 무게추를 맞추는 행위가 아니더라고요.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정숙조신 : 저희 어머니가 제 집을 보고 기겁한 다음에, '눈물도 안 나온다' 그런 드립을 치고, 택시를 불러라, 난 여기서 나가겠다, 부끄러워서 너네 이모한테도 얘기를 못하겠다-이런 소리를 했을 때, 속으로 너무 좋았어요. (웃음) 연을 끊겠다고 했거든요, 집이 더러운 것 때문에. 내가 별 짓을 다 해도 성공을 못했던 걸, 집을 창고로 만들어서 성공했구나, (웃음)

 

나기, 백퍀 : 그럼 이제 치우면 안되는 거 아녜요? 

 

정숙조신 : 그 순간만 그랬고 이미 치워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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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 <교육부 ‘학교성교육표준안’에 대한 의견서>, 2015.8.12.

 

 

 

심기용 : 얘기 듣다가 생각난 건데, 폴리아모리 가족을 연구하다가, 대한민국 사람을 연구하고 있는데, 아까 정상가족·비정상가족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건 농담이 아니라 우리나라엔 정상가족이 없는 것 같아요. 

 

나기 : 없어요. 

 

백퍀 : TV에만 있어요. 드라마에만 있어요. 

 

나기 : 드라마에도 없어. (일동 웃음) 

 

심기용 : 드라마에도 정상가족이 없고, 얘길 들어보면 정상가족이란 게 어디에도 없고, 화목하고 집안에 질서가 잡혀있고, 심지어 가부장제적이지도 않아. 여러 가지 모든 성격이 다 섞여있어요. 

 

나기 : 정상가족은 성교육표준안에만 있어. (일동 웃음) 

 

백퍀 : 그냥 진짜 교과서에만 있는 것 같아요.

 

정숙조신 : 삽화로는 있잖아요. 그러니까 정상가족이란 왠지 그런 것 같아요. 얘 잘 팔아야지 작정하고 팬시 캐릭터 상품을 만들었는데, 제대로된 설정 같은 게 하나도 없어서, 뭔가 되게 설득력 없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느낌?

 

심기용 : 이상한 이데올로기인 거죠, 실제적이지 않은. 이혼률이 50%가 넘어가고, 남편들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는 비율이 55%래요. 중년 남성들이. 

 

터울 : 그만큼 실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제도로서 공고하게 작동한다는 게, 역설적으로 제도가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또 여러 말씀을 해주셨듯이, 가족, 특히 원가족이라는 건 정말 너무나 다종다양한 것 같아요. 어떤 사람에겐 스위트홈이고 어떤 사람에겐 친족성폭력의 현장이고, 이런 스펙트럼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원가족과의 아픔은 정리하고, (웃음) 

 

심기용 : 한 시간을 얘기했네요. (일동 웃음) 이게 혹시 오늘 좌담회 주제인가요? (웃음)

 

터울 : 그냥 이걸로 책을 써도 될 것 같아요. (웃음) 저의 목표는 성소수자 가족구성권에 대해 이 책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었는데, 성공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정숙조신 : 실제로 제 생각은, 이번에 어머니가 오셔서 정말 뼈저리게 느끼는데, 대안가족 어쩌고 그런 거 생각하기 전에, 혈연가족과의 관계를 제대로 매듭짓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정말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든,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을 찾든. 

 

터울 : 네, 거기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간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고, 성소수자 안에서도 여러 가지 자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방금 얘기에서 드러났던 것 같아요. 

 

 

 

 

"요즘 처음으로 미래에 올 어떤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백퍀, 62쪽)

 

"항상 집에 가면 내 편이 있다는 것?" (이경, 196쪽)

 

"하나가 요즘 계속 저한테 “우리 결혼한 거야? 한 거지?”라고 물어봐서 “한 거로 치자”라고 얘기해요." (이경, 194쪽)

 

"애인 이전에 인간으로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게 느껴져요." (하제, 262쪽)

 

 

 

 

 

3. 친밀성과 돌봄에 대한 성소수자의 욕구

 

 

터울 :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빡센 얘기를 좀 나눴기 때문에, (웃음) 살짝 말랑말랑한 얘기를 해볼게요. 저는 이 책에서 의도한 메세지가, 그래도 성소수자를 포함한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친밀성과 돌봄에 대한 욕구가 있고, 그것이 이를테면 집이 주는 위안이나 행복, 관계가 주는 평안과 연결된다는 것 같거든요. 그 부분을 꺼내어서 밝힌 것은 이 책의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걸 강조하는 가운데 다른 맥락들이 잘 드러나지 않은 건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인데, 어쨌든 그 부분을 얘기하고 싶어요. "애인 이전에 인간으로서 뭔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는 발언이든지, "집에 가면 항상 내 편이 있다"라든지. 그래서 어떤 동거공간이나 관계나, 사람에게서 그런 경험을 느껴봤던 바에 대해서 얘기 나누어봤으면 좋겠어요. 

 

심기용 : 이것에 대해서도 이 책에 나온 얘기가 아니라 우리 경험을 얘기하는 거군요? (웃음) 오늘 이런 컨셉이구나. 이제 파악했어요. (웃음) 

 

터울 : 뭐 이 책과 연동되어있는 얘기니까요. 백퍀님은 이 책에서 무지개집 거주자로 인터뷰도 하셨죠? (웃음)

 

나기 : 저는 무지개집 비거주자인데,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지개하우스가 있어서 얻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요. (웃음) 

 

백퍀 : 그런 게 있어요? 

 

나기 : 응. 예전에 더지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무지개집에 사는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무지개집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좋다고, (웃음) 언제든지 거기에 갈 수 있고 거기가 자기 집은 아니고. (일동 웃음) 

 

백퍀 : 맞아요, 이반지하님도 한번씩 들르고, 언제 한번 친구사이 회원이 근처에 살 때는 우리 집을 거쳐서 집을 갔대요. 이 집을 한번 쳐다보고 가는 게 뭔가 마음이 좋았나봐요. 되게 신기했어요 그래서. 

 

나기 : 이 동네에 그런 공동체의 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정서적 만족감이 일단 하나 있고, 그리고 단체도 이 동네에 있고 집도 이 동네에 있다보니까 왔다갔다 하면서 자꾸 사람들을 만나요, 동네 주민으로. 저는 같은 집에 사는 파트너도 중요하지만, 동네 사람이 되게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동네에서 누굴 만날 수 있고, 동네에서 파트너 말고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몇 명 있느냐가 저한테는 제 삶의 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예요. 그래서 저는 일하는 일터에서도 제가 성소수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유일하게 한 명 있는데 까페 언니에요. 비혼이고, 저보다 한 10살 넘게 나이가 많은. 그 언니한테 끊임없이 서서히 내 단체와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내가 주말에 뭐하는지, 내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애인은 어떤 사람인지 이런 걸 서서히 얘기하다가, 검색을 해보셔서 단체에서 책방도 하고 뭐도 한다는 걸 아셔서, 단체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다는 걸 아신 거죠. 저번에 부산 퀴퍼 갔을 때도, 부산 간다고 그러니까 퀴퍼 가냐고, 커밍아웃 안했을 땐데, 그런 걸 물어보고, 전주 갔을 때도 퀴퍼 가냐고 물어보고. (일동 웃음) 그 다음에 직접적으로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봐서 커밍아웃을 했거든요. 저는 그런 식으로 동네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사실에 입각해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몇 명이나 있느냐가 제 삶에서 되게 중요해요. 그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만큼이나 중요해요. 그래서 이런 무지개하우스 이웃, 동네 이웃이라는 게 주는 정서적 만족감이 큰 것 같아요.

 

터울 : 그럼 그곳에 직접 사시는 분은 어떨지 궁금해요. 

 

백퍀 : 저요? 그냥... 제가 무지개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고 느꼈던 때가, 첫 명절을 맞았을 때였어요. 그 때만 해도 여기가 집이라는 게 좀 낯설고 신기했을 때였거든요. 몇개월 차였어서. 그런데 그 때가 이런 공동주택을 사는 게 완전히 적응한 때가 아니어서, 여기서 사는 것도 나름 스트레스가 있는 거예요. 그 때만 해도. 이제 다 공동주거를 하면서, 그 단위 위에 좀더 큰 무지개하우스가 또 있잖아요. 뭔가 그냥 계속해서 잠재의식이 신경쓰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계속 뭔가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 좀 들어서, 적응 기간이었는데, 명절 때 집을 간 거죠. 그래서 그냥 별 생각없이, 살짝 좀 가기 싫었는데, 그래도 그 때 몇 개월 안됐으니까 본가에 갔죠. 그런데 그 며칠, 한 2-3일 밖에 안갔다왔는데도, 너무 힘든 거예요. 스트레스를 받고, 기가 다 빨려서 온 거예요. 오니까 약간 녹초가 돼서, 에너지를 다 쓰고 온 거예요, 집에 갔다 오니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처음으로 집에 딱 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 때 처음 안 게, 여기가 내 집이구나, 그 때 처음 그 생각을 했거든요. 나한테 집이라는 곳이 정말 여기구나란 생각을 그 때 했고. 

 

그렇게 맨 처음 생각하고 지금 지내면서는, 그런 친밀감이 되게 어떤 사건으로 보여지지 않고, 어떤 정서적인 만족감을 주는 건 확실한 것 같거든요. 그게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받는 거라 제가 그걸 인지를 하는 경우는 드문데. 예를 들면 사실 사람들이 사는 게 다 바쁘잖아요. 내 머릿속에 할 일도 많고, 연애도 해야 되고, 나는 돈도 벌어야 되고, 친구 만나고 싶은 욕구도 있고, 사실 그걸 다 채우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내 능력도 안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어느 정도 다 채웠을 때 오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지개집에 살게 되면서, 그것도 애인하고 같이 이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되니까 그런 게 좀 한꺼번에 해결되는 편안함이 있어요. 저한테는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무지개집 가족이 저한테는 어떤 면에선 친구같기도 한데, 제 나이 또래는 없거든요. 거주하는 사람들이 최소 저랑 5-6살 차이가 나는 분들인데, 뭔가 친구와 가족 사이의 교집합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니까, 조금 더 제 할일에 집중할 수 있다거나, 그런 점들이 저한텐 많은 변화를 준 것 같아요. 

 

옛날엔 좀 항상 제가, 약간 정신적인 연약함이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거고, 제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런 정신적인 결핍이라고 느껴지는 게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정서적으로 편안해졌으면 좋겠고, 저도 겉으로 보면 되게 그냥 잘 지내거든요. 그렇지만 여기에 항상 밑빠진 독에 물붓는 기분이 항상 들었었어요. 그래서 굉장히 사람을 찾았었어요. 사람을 많이 타고, 어떤 그런 공백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공동체 안에 있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외로움이란 단어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느낌을 요즘에는 거의 잘 안 느끼고 살거든요. 

 

터울 : 굉장히 중요한 변화네요. 

 

백퍀 : 네, 그게 저한테는, 이제 고민할 거리가 너무 많이 줄어든 거예요. 이게 약간 경제적이기도 한 게, 저한테는 내가 고민할 거리가 줄고, 이제 나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될 것 같은, 나만 잘하면 되네? 이런 생각이 좀 들어서, 생활이 많이 간단해졌어요, 저한테는. 사람이 여러 욕구가 있기 마련인데, 그래도 많은 게 좀 해결이 되고 나니까,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뭔지를 보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게 저한텐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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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집 전경.

 

 

 

터울 : 잘 들었습니다. 저는 되게 궁금했었거든요. 무지개집이란 데가 무슨 거의 네버랜드같은 이미지가 있어서, (웃음) 실제로 거주하시는 사람은 어떨지, 

 

백퍀 : 그런데 사실 나는 무지개집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나만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들고, (일동 웃음) 

 

터울 : 그래도 방금 말씀하신 건 과장되지 않고 충분히 진실성 있게 와닿았어요.

 

백퍀 : 그래요? 그래서 나는 나만 왜 맨날 좋은 얘기하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웃음) 나만 이렇게 느끼나? 그러면서 가끔 얘기할 때 너무 내가 과장되게 얘기하나? 이런 생각도 한번씩 하는데, 

 

나기 : 제가 아는 다른 레즈비언 거주자도 좋아해요. 항상 자랑해요. 

 

백퍀 : 주변에 있는 사람이 더 좋다면서요? (웃음) 

 

나기 : 물론 그런 얘기도 하지. (웃음) 그런데 무지개집에 놀러가면 항상 모여서 거기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삶이 나눠지는 느낌이 드니까, 나는 그런 게 좋더라고요. 항상 서로를 챙기고 있다는 걸 느끼는 대화를, 너무 관심이 많은 건가? (웃음) 

 

백퍀 : 그런가, 그렇게 서로를 챙기나? 그런 건 딱히 모르겠어요.

 

터울 : 그런 챙김이 불편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죠. 

 

백퍀 : 그런데 그런 챙김을 안하는 건 또 안하는 대로 힘들고, 하면 또 하는 대로 힘든데,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냥 하면서 하는 게 차라리, 이 사람이 나에 대해서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구나-하는 믿음 정도는 가질 수 있으니까, 귀찮음, 힘듦이 그냥 나아서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 같아요. 저도 약간 말 걸면 피곤해할까봐 잘 안 거는 것도 있고 한데. 

 

터울 : 네, 무지개하우스 얘기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아요. (웃음) 기용님 같은 경우는 원가족과 살고 계신 상황인 거죠? 그래서 집이 주는 위안과 행복에 대해서 전혀 공감이 안되실 것 같은데, 

 

정숙조신 : 집이 주는 위험, (웃음)

 

터울 : 그렇죠. (웃음) 어쨌든 집이 아니라 관계에서 구체적인 친밀성에 대해 위안을 받고 만족하셨던 경험을 듣고 싶어요. 

 

심기용 : 제가 최근에 어떤 데에서 정서적 교감을 느끼느냐면, 동료들? 단체 동료들? 아니면 무지개행동 활동가들?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단체 상황도 알고 그러니까 걱정도 하고, 조언도 하고, 문제해결을 하려고 이러는 것도 있고, QUV 안에서 돈도 안받고 일하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고, 왜 내가 미안한지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보다 먼저 활동했기 때문에? 그런 게 기본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게 평상시에 제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고, 그 친구들이랑은 한 달에 한번씩 술을 마시거나 회식을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회포를 푸는 자리가 되는 느낌이죠. 

 

그것 말고 그냥 정말 개인적인 건, 저는 만났을 때 진지하게 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일동 웃음) 저는 저를 비웃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오히려 막 진지하게, 정말 그랬냐고 대응하면, 나도 같이 다운돼버리잖아요. 난 이미 다운돼있는데. (웃음) 너무 힘들어요, 그런 반응이. 내 말을 진정성있게 들으려고 하는 모든 반응들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저를 어떻게든 가볍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좋고, 

 

터울 : 그게 영리하고 위트있는 거죠. 그건 진지한 걸 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너무 잘 아니까, 

 

심기용 : 너무 잘 아니까, 상황을 섬세하게 살피고 있으니까 웃어넘길 수 있게 도와주는 거잖아요. 그런 친구들이 몇명 있고, 그런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삶을 지탱하는 힘이 돼죠. 왜냐하면 평소에 혼자 있을 때 너무 진지한 사람이거든요. 항상 생각에 빠져있고 이런 느낌인데, 사람들과 만날 때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더 힘든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했을 때 그걸 막 너무 진정한 마음, 경건한 마음으로 내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애인이 자취방이 있는데, 거기에 주말마다 가거든요. 원거리 연애라 청주로 내려가요. 청주 내려가면, 금요일에 내려가면 월요일에 올라오고 그래요. 일주일에 삼분의 일에서 절반은 거기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거기가 집 같고, 저는 여기가 집 같지가 않아요. (웃음) 그리고 자취하는 애인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이렇게 오래 만난 애인은 없었거든요, 연애라는 관계에 있어서는. 그래서 그 때부터 결혼이나, 사회적 매뉴얼이 딱 돼있는 동거생활, 그런 것에 대한 판타지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읽다가 아, 이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리고 언니네트워크 잇을님이나, 기존에 같이 동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맨날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꼭 방이 분리된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터울 : 너무 중요해요.

 

심기용 : 자기 공간이 분리돼있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고 해서. 그래도 어쨌든 전 같이 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애인이랑만 같이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저는 약간 가족을 수집하는 느낌으로 살거든요. 내가 가족이라고 하는 건 <ONE PIECE>의 동료 같은 거예요. 우연히 모험하다가 마주쳤는데, 너 내 동료가 돼라, 약간 이런 느낌으로 가족 구성원을 하나씩 컬렉트하는 느낌이란 말이에요. 그런 친구들하고 가깝게 살고 싶어요.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약간 무지개하우스의 옆에 사는 느낌처럼, 밤에 그냥 술먹자 그러면 나올 수 있는 거리에서,

 

터울 : 내 동네 같은 느낌,

 

심기용 : 밤에 불렀을 때 술마시러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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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ONE PIECE>.

 

 

 

터울 : 가족에 대해 각자 결이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을 느끼는 게 재미있네요. 정숙조신님은 어떠셨어요?

 

정숙조신 : 이 책에서는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대개는 두 사람 단위로, 무지개하우스 정도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가족이라 부를 만한 관계를 같이 살면서 엮어나가는 얘기를 다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같은 경우는, 제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설사 파트너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저는 그 사람이랑 동거는 못할 것 같아요. 가까이에 사는 정도가 한계지, 저는 제 생활공간 자체가 독립돼있는 게 너무 중요해요. 그래서 나중에 실버타운 같은 걸 만든다고 하더라도, 옆집에 사는 그런 방식이면 모를까, 문을 열면 다른 사람의 방이나 거실같은 게 보이는 형태는 저한테는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독립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봐요. 대학원에 갈 때 유학을 갔는데, 저는 그게 처음 집에서 물리적으로 독립을 한 거였고, 그래서 아예 이민을 가서 완전히 떠나버릴 생각으로, 생활로서의 독립을 해볼 생각으로 간 거라서 그 때 꿈을 이룬 셈인데, 그 이후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계속 혼자 살아오고 있거든요. 뭐 잠깐 룸메이트가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상당히 그런 생활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혼자 살아서 외롭다는 건 거의 느껴본 적 없고요. 

 

그런데 또 저는 보기보다는 교우 관계가 꽤 넓은 편이어서, 대학교 때 PC통신을 시작했는데, 오프라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류의 다양한 친구들이 생기다보니까,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랬는데 장례식장에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친구들이,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100명이 넘게 온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과 친척들이 다들 깜짝 놀라서, 쟤가 어디서 저렇게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알고 있었냐, 그런 거죠. 그 뒤로부터 꾸준히 오프라인으로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도 있고, 지금 이 퀴어판에서도 이런저런 사람들과, 다양한 깊이로 많은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적절한 거리감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라든가, 필요할 때의 깊이라든가, 그런 걸 저는 나름대로 잘 조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릴 때 성별 규범을 안 따르는 것 때문에 튀어가지고, 쟤는 항상 외톨이라는 관념이 저희 집안 어른들과 제 선생님들에게 계속 박혀 있었던 거예요. 쟤는 너무 튀니까 외톨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 평생 저를 낙인처럼 따라다니고 있어서, 제가 진짜 아무리 이런 짓을 해도 그게 설득이 안되는 거예요. 제 주변에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있고, 어쩌면 그게 파트너 관계로 부를 사람이 없어왔고, 지금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런 낙인이 찍혀있고, 그 와중에 여러 논문 같은 것도 나오잖아요. 온라인으로 만난 관계들은 오프라인으로 만난 관계에 비해 훨씬 더, 외로움을 더 강화할 뿐이다, SNS 많이 하면 외로워지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전 웬만한 온라인으로 만난 사람들은 오프라인으로 병행해서 보거든요. 

 

그리고 최근에 저를 괴롭힌 저장강박? 그것에 대해 엄마가 막 저한테 관련 기사를 떠밀어주는 거예요. 거기엔 유난히 자극적인 기사들이 많았는데, 그나마 덜 자극적인 기사를 찾아보니까, 거기서 원인이랍시고 내놓는 게 다른 데서 공허하고 외로운 걸 물질을 잡고 들이고 그걸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음으로써 해소하려고 한다-는 그런 식의 해석이 나오니까, 굉장히 가스라이팅 당하는 기분인 거죠. 나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너는 아니야-라는 메세지가 바깥에서 들어오고, 그럼 제가 확신했던 것들이 자꾸 흔들리려고 하고. 

 

아무튼 저는 독립을 유지하는 게 인생에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런 가스라이팅에 대항하기 위해서, 더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해-라는 주의를 굳히면 되는 걸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혼자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너무 힘들어요, 저는. 혼자 있어도 충분히 괜찮은데. 

 

터울 :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런 강박적인 시선을 받으시는군요.

 

정숙조신 : 네, 혼자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변의 압박이랄까, 가치관이랄까.

 

터울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친밀성의 욕구가 보편적으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개개인에게 수행되고 스며들었을 때, 사실 친밀성의 욕구 바로 뒤에는 그 사람과 최소한 유지해야 할 심리적인 거리가 붙어있는 것 같거든요. 그 선이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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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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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8-06-01 오후 18:21

자유스럽게 다들 이야기를 잘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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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사 2018-06-15 오후 15:34

정말 지금 같은 세상에 필요한 가족은 밀짚모자 해적단 같은 형태인지도 모르겠네요.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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