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커버스토리 ‘나이듦’ #2] 디어 마이 프렌즈 – 꽃중년 '구야'와의 데이트
기간 11월 

[커버스토리 '나이듦' #2]

디어 마이 프렌즈 - 꽃중년 '구야'와의 데이트

 

 

대화 속에 예상치 못 했던 반짝임을 발견했다.

보통의 인생 선배, 유명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몰랐던 언젠가, 혹은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

마치 다른 시간이 양면의 종이처럼 '착' 하고 붙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게이 커뮤니티의 살아있는 역사, '구야'님과 함께한 특별한 시간을 공유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겅듀’ 구야님

‘이러다 게이되는 게 아닐까’ 모뎀 선을 뽑았던 풋풋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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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구야님 사진 (2016)

 

규환: 드디어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친구사이 소식지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구야: 뭐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스스로 쓰던 호칭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 대표 게이’, '아시아의 겅듀‘라고 있었는데, 이제는 낯간지러워서 쓰기가 미안하고요(웃음). 뉘엿뉘엿 지는 해 같은 구야로 해주세요.

 

규환: 커뮤니티에 데뷔한 지도 오래되셔서 이렇게 ‘왕언니’ 취급하는 게 실례는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하는데, 사실 ‘처음’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느덧 40대 후반의 나이로 커뮤니티의 변화를 지켜보며 종로의 역사를 함께 하셨는데요. 데뷔 후기 좀 들려주세요.

 

구야: 요즘 친구들은 ‘내가 게이구나’라는 정보를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해서 시작하지만, 우리 때는 ‘내가 좀 이상하구나’ 보통 그렇게 시작을 많이 했어요. 스스로 ‘내가 다른 사람과 좀 다르구나’라고 느낀 건 중3 때였어요. 혼자 아무한테나 이야기를 못 하다가 처음 커뮤니티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95년, 그러니까 26살 때죠. 그 당시 PC 통신 하이텔에 이반 동호회도 없었고, 대화방에 ‘동성애방’, ‘이반방’ 같은 게 있어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차츰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죠.

 

규환: 99년 ‘버디’ 인터뷰를 보니 PC 통신 채팅방 제목에서 ‘동성애’, ‘게이’라는 단어만 보고도 죄책감 같은 걸 느끼셨다고 하셨는데, 본격적으로 종로 데뷔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구야: 처음에 대화방에 들어갔을 때는 게이가 아닌 척했죠. ‘친구가 동성애자인 거 같은데, 궁금해서 들어와 봤다’ 그런 식으로(웃음). 거기 계시던 분들은 다들 눈치를 챘겠죠. 그땐 대화방에 들어가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 했어요. 그때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정말 게이가 되는 게 아닐까?’, ‘나는 게이가 아니고 싶은데 이 방에 들어가면 안 되겠다’해서 컴퓨터에서 모뎀 선을 빼고 지냈던 시기도 있었죠.

 

구야: 근데 그게 본능적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까지는 6개월 정도. 종로 게이바도 그해 가을 처음 가봤죠. 기억에 남는 건 지금 자리에 있는 ‘레떼’였는데, 이태원 클럽처럼 사람들이 많아서 서 있고 그랬어요. ‘도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어디 숨어 있었을까?’, ‘나만 빼고 재미나게 놀 수가 있나’ 싶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죠. 자연스럽게 대화방에서 만난 친구들과 종로에 나오게 되고, 하나둘씩 단골집도 생기고 그렇게 종로 데뷔를 했어요.

 

규환: 이야기만 들어도 그 당시의 모습이 그려져요. 보통 게이바에 처음 가면 낯선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당시 지금과 다른 점은 없었나요?

 

구야: 사실 처음 갔던 게이바는 ‘아프리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친구사이에서 늙은 언니들은 알 거예요(웃음). 초창기 친구사이 소식지 후원 업소로 알게 되어서 친구와 함께 갔는데, 첫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그때만 해도 심야 영업 단속을 하던 시기라서 제대로 된 간판도 없었죠. 건물 입구에 벨을 누르면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어서 오세요” 하던 기억이 나요. 지하로 입장하면 일제히 쳐다보는 시선이 무섭기도 했어요. 처음 갔던 게이바에 대한 느낌은 좋진 않았어요. 위에 말한 레떼는 즐거운 충격이었죠.

 

규환: ‘레떼’는 역사가 있는 게이바네요. 언니들의 당시의 느낌이 감정이입이 되면서도 제가 처음에 느꼈던 느낌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다르진 않네요.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

응답하라 1996, 하이텔 '또사동'부터 '구야홈닷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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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 잡지 '버디' 커버 (1999)

 

규환: 하이텔 ‘또사동’(또 하나의 사랑 동호회)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리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처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커뮤니티가 막 형성되던 그 시기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의식은 어떠했는지 궁금해요.

 

구야: 제가 커뮤니티에서 제일 먼저 했던 활동은 하이텔 ‘또 하나의 사랑 동호회’(약칭 또사동)이었어요. 95년 봄, PC 통신에서 이반들을 알게 되고 ‘우리 소식지를 한번 만들어 보자’라고 의기투합한 사람들이 있었죠. 이미 1호가 나온 상태에서 제가 합류를 하게 되었고, 2호 소식지를 만들면서 하이텔 내 모임도 같이 준비하게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정식 동호회가 아닌 일반 대화방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가, 96년 2월 하이텔 내 ‘작은 모임’ 카테고리에 ‘또 하나의 사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모임을 만들게 되었죠. 처음부터 제가 주도적인 입장은 아니었는데 대부분 컴맹이었고, 제 전공이 마침 컴퓨터여서 자연스럽게 모임의 관리를 맡게 되었죠. ‘부시샵’으로 처음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웃음).

 

규환: PC 통신 세대와 ‘또사동’을 돌이켜보면 어떤 성과들이 있었을까요?

 

구야: 하이텔 ‘또사동’ 뿐만 아니라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4개 PC 통신에 전부 동성애자 동호회가 생기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오프라인보다 접근하기가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PC 통신 동호회를 통해서 데뷔를 좀 더 편하게 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온라인상의 모임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게 PC통신이 해왔던 일종의 역할이자 성과였죠. 그때 유일한 데뷔 장소라고 해도 ‘파고다 극장’밖에 없던 시기니까요.

 

규환: 유명한 이반 홈페이지 ‘구야홈닷컴’을 운영하셨죠. 구야홈닷컴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구야: ‘구야홈닷컴’은 제 개인 홈페이지였어요. ‘또사동’이 98년에 동호회로 승격되고 99년이 되면서 제가 대표를 그만두면서 다른 활동을 해보고 싶었죠. 마침 PC 통신을 넘어 인터넷으로 넘어가면서 이반 홈페이지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개인 홈페이지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99년에 ‘구야홈닷컴’을 만들게 되었어요.

 

규환: 이반 모임이나 홈페이지를 잘 운영하는 비결 같은 게 있었는지 궁금해요.

 

구야: 그때 제가 컴퓨터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는데, 낮엔 애들 가르치고, 밤에는 몰래 홈페이지 관리하고 그랬어요. ‘구야홈닷컴’에 제 개인 사진이나 글도 올리고, 이반 정보들도 많이 올렸죠. 사람들이 ‘구야홈닷컴’에 많이 찾아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링크’ 때문이었어요. 다른 이반 사이트들로 연결해주는 링크 관리를 제가 신경 써서 했거든요. 일단 제 홈페이지에 와서 ‘이반시티’도 가고 ‘엑스존’도 가고 하는 거죠.

 

규환: 시대를 앞서가신 셈이네요. 일종의 포털 사이트 같은 역할을 하신 거니까.

 

구야: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하죠. 요즘에는 개인 PC나 스마트폰을 쓰지만, 그때는 가정의 컴퓨터에 게이 사이트를 즐겨찾기 해놓거나 할 수가 없었어요. ‘구야홈닷컴’도 사람들이 그때그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들어오거나 주소 쳐서 들어오곤 했어요. 이반 관련 인터넷 기록을 지우던 시기에 인기가 있었죠.

 

규환: 게이들의 소통에 대한 강한 욕구는 인터넷이 처음 생길 때도 컸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잭디’ 같은 데이팅 어플이 많이 활성화되어 있잖아요.

 

구야: 인터넷으로 넘어오면서는 게이들의 데뷔가 훨씬 가벼워졌다고 해야 하나. 이른바 이쪽에 나오는 게 PC 통신보다 훨씬 더 쉬워지고, 이후에 ‘이반시티’로 넘어오면서는 더 많은 게이들이 이쪽을 알고 데뷔를 한 거 같아요. ‘구야홈닷컴 통해서 이쪽에 나왔다’라는 분들의 인사를 가끔 받는데, 그럼 저는 농담으로 “데뷔비 내셔야죠.”라고 그러죠(웃음).

 

규환: 그러고 보면 ‘그라인더’ 나왔을 때, 게이들이 앞서서 아이폰 샀던 기억도 나고요.

 

구야: 제가 데뷔했던 그때도 인터넷을 통해서 저변 확대가 많이 된 것 같아요. 게이들은 말 그대로 ‘게이 짓’을 하려고 일반들보다 인터넷을 더 빨리 썼죠. 삐삐나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예요. 삐삐나 휴대전화 처음 나오고 일반 친구들은 없을 때 게이들은 다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이들이 욕구는 분명한 것 같아요. 게이들은 빨리 또 많이 투자해서 ‘더 열심히 소통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늙었구나, 돋보기를 써야 하는 구나’라는 게 서러워서

‘오늘은 조금 울자’ 생각하고 조금 울었죠.

 

규환: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인터뷰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이번 소식지 주제는 성소수자로서의 ‘나이듦’인데요, 스스로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라고 느끼시기도 하나요?

 

구야: 단편적인 예로, 동갑내기 친구가 하는 운영하는 게이바에 놀러 갔는데 손님들이 제 친구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저도 장난삼아서 삼촌이라고 놀렸는데, 생각해보니 ‘이제 우리가 파릇파릇한 20대 게이들에게 삼촌이라고 불리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이제 우리가 형이 아니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을 때 조금 서러웠어요.

 

규환: 그러고 보면 게이들은 ‘형’이라는 호칭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기분이 좋잖아요. 40, 50대 형들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저는 이분들은 권위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구야님 말을 들으니 다른 의미로도 해석되네요(웃음).

 

구야: 그리고 아무래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는 걸 몸으로 가장 먼저 느끼죠. 점점 살이 찌고, 여기저기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상황. 얼마 전에는 글씨가 잘 안 보여서 돋보기안경을 처음 맞췄어요. 그날 처음 쓰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조금 울었어요. ‘내가 늙었구나, 돋보기를 써야 하는구나’라는 게 조금 서러워서 ‘오늘은 조금 울자’ 생각하고 조금 울었죠.

 

 

게이라면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과정

벅찬 데뷔와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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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 잡지 'GET' 커버 (2008)

 

규환: 데뷔한 후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도 커뮤니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잖아요. 데뷔 후 게이 라이프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구야: 우선 데뷔를 했다는 거요. 그 전 10년 동안 나 자신과 싸우며 계속 부정하기 바빴는데, 처음 나 자신과 화해를 한 거죠. ‘그동안 나한테 너무했으니 이제 좀 화해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성정체성으로 고민하며 힘들었던 시기를 거쳐 자신을 다독거리면서 건강하게 데뷔를 한 게 잘한 일 같아요.

 

구야: 그리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한 거죠. 98년도에 ‘또사동’ 대표를 하면서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어요. 그때 ‘작은 모임’에서 ‘동호회’로 승격 심사를 하던 기간이어서 운영을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이텔 입장에서는 인터뷰하면 하이텔이 알려지는 효과가 있고, 저는 어떻게든 동호회로 승격을 시키고자 첫 신문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죠. 선글라스 낀 옆모습으로요. 그렇게 간이 커져서 결국 TV 출연도 하게 되었고요. 물론 가족들과 이전에 대화했었지만, 정식으로 커밍아웃했던 일과 친구들에게 하게 된 사건. 지금 같으면 못할 것 같아요. 사실 젊은 호기에 그랬던 것도 있는 거 같아요(웃음).

 

규환: 지금 생각해도 큰일이었을 텐데요. 자리 때문에 책임감도 컸을 것 같아요.

 

구야: 내가 평범한 게이였다면 굳이 사회적인 커밍아웃을 안 했겠죠. 책임감에 굳이 앞장서서 한 것 보다 사실 친구사이 소식지를 방에 감춰놓고 살다가 들켰어요. 들킨 김에 했던 커밍아웃이었죠.

 

규환: 사실 커밍아웃은 게이들에게 항상 어려운 문제잖아요. 커밍아웃에 대한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지, 혹은 커밍아웃을 고민하는 게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해요.

 

구야: 커밍아웃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TV에 나오는 대단한 커밍아웃은 아니라, 주변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이 잘 받아줄 것 같다’라는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일반들도 ‘내 주변에 성소수자가 있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좀 더 잘 어울려서 살 수 있게 되거든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잘하고 있잖아요. 아직 그러지 못한 게이들이 있다면 미리 계산을 잘해서 승산이 있는 커밍아웃 대상자에 커밍아웃을 최대한 많이 해서 주변에 게이가 없는 일반이 없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요.

 

규환: 그럼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아쉬운 일 한 가지를 꼽을 수 있을까요?

 

구야: 나 자신이 많이 즐기지 못한 거요. 앞만 보고 와서 요즘 들어 ‘그동안 뭐 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이샵’ 일을 시작 할 때는 제 열정을 너무 쏟아부은 거예요. 요즘은 살짝 방전이 되어서 충전이 조금 필요한 시기면서 동시에 충전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들어요.

 

 

'덕업일체'의 힘!

우리가 기억하는 아이샵과 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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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iSHAP 센터 개소식 (2005)

 

규환: 사실 제가 구야님을 처음 인식한 것도 아이샵 때문인데요, 아이샵에서 소장으로 일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구야: 당시 친구사이나 동인련(현 행성인) 같은 인권 단체들은 HIV/에이즈 감염인 인권에 관심이 있었는데 예방 활동까지 하지는 못했어요. 그 당시 유일하게 HIV/에이즈 이슈에 관심이 있던 활동가는 이정우 씨 정도. HIV/에이즈 예방을 전문적으로 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는 시기였죠. 그래서 ‘내가 앞으로 게이 커뮤니티에서 어떤 일을 하지?’라는 고민을 하면서 HIV/에이즈 예방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감염인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현 커뮤니티의 상황 이야기도 듣고 ‘내가 이 일을 해야 되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구야: 맨 처음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한채윤 씨와 ‘에이즈 예방팀’을 만들어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제가 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물론 직장을 다니고 있기도 했고 HIV/에이즈 예방이라는 게 말로만 나가서 떠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콘돔이라도 나눠주려고 해도 여러 제약이 많았어요. 거의 활동이 없던 1년이 지나가고, 마침 현재 아이샵이 속해있는 ‘한국에이즈퇴치연맹’에서 2003년부터 정부 예산을 받아 동성애자 대상 HIV/에이즈 예방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때 제가 연맹의 직원으로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됐어요. 연맹은 그전부터 제가 무작정 찾아가서 에이즈의 날 기념이랍시고 게이바에 뿌릴 콘돔 좀 달라고 하고 그랬던 곳이거든요. 그래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오케이를 했어요.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2003년 2월에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직원으로서 아이샵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거죠.

 

규환: 커뮤니티 안에선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네요.

 

구야: 동성애자들 대상으로 하는 HIV/에이즈 관련 전문적인 활동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시 말들이 되게 많았어요. 정부 예산을 받다 보니 활동가 중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았죠. 격려보다는 우려를 많이 표명하던 분위기였죠. 아이샵에서 얻는 정보들이 고스란히 정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또는 이런 사업체가 만들어짐으로써 동성애자가 HIV/에이즈 ‘고위험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어요. 초반에는 대부분의 인권단체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어요.

 

규환: 지나고 나서 보면 잘 된 일이겠지만, 당시엔 중요한 문제였네요. 독립적으로 단체들도 운영되어 온 역사들이 있어서 그 당시에는 편견 같은 것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구야: 한창 사이가 안 좋을 때는 서로 얼굴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였죠. 인권단체들과 그런 일을 겪고 있을 때 현재 한국에이즈퇴치연맹 회장님이(당시 사무총장) “주위에서 뭐라 하든 간에 지금 하는 일에 소신을 갖고 끝까지 일직선으로 죽 나가면 언젠가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다”라며 “지금 당장 소통이 안 된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고 꾹 참고 밀고 나가라”는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묵묵히 나의 일을 하자고 생각한 지도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죠. 지금은 딱히 사이가 안 좋은 그런 것은 없어요.

 

규환: 아이샵 이외에도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역사가 화려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구야: 퀴어문화축제에서 2002년부터 계속 활동을 하고 있죠.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퀴어문화축제의 조직위원장을 2년 정도 했어요. 그때는 조직위원회가 아니라 기획단이라고 불러서 한채윤 씨와 공동기획단장을 했었죠. 퀴어문화축제도 아이샵만큼 애착이 아주 많은 단체예요. 지금은 한발 물러나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고, 계속 일을 하고 싶은 그런 곳이기도 해요.

 

규환: 커뮤니티의 갈등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신 흔적이 곳곳의 답변에 느껴져요.

 

구야: 제 커뮤니티 활동의 지론 중에 하나는 ‘적을 만들지 말자’예요. 정말 싫어도 괜히 부딪혀서 적을 만들어서 불편하게 말자는 주의죠. 이 바닥이 너무 좁다 보니까 내가 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안 보겠다고 결심을 해도 볼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외면을 하더라도 나쁜 관계는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비교적 적이 적은 활동가 중에 하나예요(웃음).

 

규환: 커뮤니티를 지켜 오신 활동가분들 마음속에 하나쯤 있을만한 이야기네요. 커뮤니티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고민 같은 건 없었나요?

 

구야: 처음에 ‘이쪽’ 일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좋았어요. ‘덕업일체’ 딱 제가 그런 케이스죠. 그전엔 낮엔 일을 하고, 밤엔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잡지 ‘버디’ 활동도 하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일도 하고, 주로 한채윤 씨와 일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그게 직업이 돼버린 거죠. 첫 출근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예전에 내가 퇴근하고 하던 일을 낮에 사무실에 앉아서 하고 있는 거예요. ‘동성애자’, ‘에이즈’ 이런 단어를 컴퓨터에 입력을 하고, 저녁에는 ‘친구사이’, ‘동인련’ 같은 단체에 방문도 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꿈만 같았어요. ‘이쪽 일하는데 월급도 주네, 꿈인가 생신가’하며 당시엔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요.

 

 

"손닿는 곳에 콘돔과 젤을 둔 것.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좋은 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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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iSHAP에서 구야님 (2015)

 

규환: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오래 해오셨는데, 일하실 때 사명감을 크게 느끼시는 편인가요? 사실 예전 인터뷰를 봐도 그렇고 오히려 큰 욕심은 없으신 것 같아요.

 

구야: 원래 제 스타일이 그런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은 저더러 “왜 돈 안 되는 일에 목숨을 거냐”라고 물어보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NGO, 봉사활동 같은 게 제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예전에 교회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사실 이쪽 활동했던 게 많이 느꼈던 게, 교회랑 너무 비슷하다고(웃음). 일은 일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사실 사람들 모이는 곳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규환: 요즘 게이들은 HIV/에이즈 검진도 주기적으로 받으면서 아이샵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아요. 최근에 여러 노력으로 인식이 조금은 나아지면서 활동을 하며 뿌듯함을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구야: 아이샵이 있기 전에는 젤을 사러 약국에 가서 사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것도 의료용 젤리를. 또 약국에 가서 젤을 달라고 하면 주면서 꼭 ‘어디에 쓰냐’라고 물어보곤 했죠. 예전만 해도 젤이나 콘돔이 가장 좋은 생일 선물이었어요. 지금은 게이바에 콘돔과 젤이 넘쳐 나잖아요. 손만 뻗으면 집을 수 있는 곳에 깔아놓은 것만 해도, ‘그래도 내가 조금은 이반 커뮤니티에 좋은 일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또 HIV/에이즈 검사받기가 많이 편해졌잖아요. ‘오라퀵’ 같은 경우도 작년부터 시중에 판매되었지만 아이샵에서는 2005년부터 직수입을 하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수입허가서를 받아 직접 사용을 하기도 했거든요. HIV/에이즈 검사받으러 왔다고 말 꺼내기 자체가 힘들었던 때, 편하게 검사해주고 콘돔과 젤을 구할 수 있게 해준 것. 그것만으로도 이반 커뮤니티에 조금 좋은 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규환: 그렇게 이야기해주시니까 피부로 잘 와 닿는 것 같아요. 눈에 잘 안 보이는 인권운동일 수 있는데, 콘돔과 젤은 눈에 너무 잘 보이니까요. 혹시 아이샵 소장으로서의 일 이외에 하고 싶었거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구야: 현재로서는 없어요. 아이샵을 한지도 어느덧 13년이 되었네요. 사실 초반에 너무 쏟아부은 느낌이 있어요. 처음 몇 년은 출근이 즐거웠지만 진을 많이 빼서 지금은 충전이 필요한 시기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 해외여행을 조금씩 다니기 시작하며 ‘자주 가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얼마 전에는 아이샵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죽었어요. 그 친구가 죽는 걸 보면서 스스로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아야 겠다’라고 생각했죠. 그 친구 49재를 마친 날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우리 대만 퀴어퍼레이드에 가서 끼나 왕창 떨고 오자’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실행에 옮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일도 중요하긴 한데 조금은 놀기도, 쉬기도 하면서 ‘내가 지치지 말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규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취업도 어렵지만, 자신의 일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많아요. 구야님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온 것 자체가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구야: ‘덕업일체’의 힘이죠. 아직도 아이샵 이외에 일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아이샵과 함께 하지 않을까 해요. 혹시 관심 있는 일들이 생기면 조금씩 옆에서 할 수는 있겠죠. 그런 여유가 있으면 좋은데(웃음).

 

 

1년마다 만날 수 있는

15년차 '퀴어문화축제의 송해', 사회자 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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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퀴어퍼레이드 모습 (2016)

 

규환: 최근에 갔던 대만 퀴어퍼레이드는 어땠나요?

 

구야: 무엇보다 우리나라 퍼레이드에 비해서 굉장히 크고 엄청난 사람들이 참여를 하더라고요. 근데 우리나라가 더 재밌어요. 대만 퀴어퍼레이드는 약간 밋밋한 롤러코스터 같은 느낌이라면 우리나라는 뺑뺑이를 막 도는 스펙터클 한 느낌인 거죠. 콘셉트도 미스 유니버스를 패러디해 친구들과 셋이 어우동 복장을 입고 갔는데, 말 그대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죠.

 

규환: 구야님은 퀴어문화축제에서 사회도 매년 보시고 계시잖아요.

 

구야: 자칭 ‘퀴어문화축제의 송해’라고(웃음). 제가 처음 사회를 본 게 2002년이었어요. 처음 사회를 보고 올해까지 15년째인데, 그때 사진 보면 ‘내가 예뻤구나’해요. 지금은 아줌마가 다 되었네요.

 

규환: 행사의 사회라는 건 용기와 재치가 필요한 일인데 구야님의 성격과 잘 맞으시나요? 최근 퀴어퍼레이드가 커지면서 느끼는 부담도 있는지 궁금해요.

 

구야: 제가 처음 사회를 보게 된 계기는 사회를 잘 봐서가 아니라 얼굴 까고 무대 올라갈 사람이 없어서였어요. 그때는 무대 서는 분들도 얼굴 가리고 노래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우선 사회를 보는 게 재밌어요. 친구들이랑 술 먹다가도 사회자 말투가 나와요. 심지어 HIV/에이즈 검사받으러 오신 분들도 제게 ‘사회 보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어쨌든 퀴어퍼레이드의 사회자는 재미가 있어요. 예전엔 동네잔치 같은 분위기로 “언니들 왔어요~”라며 아기자기하게 보는 사회였죠. 최근엔 시청으로 가면서 부담이 되기도 하는데 여전히 재밌어요. 내가 아이샵을 계속하고 싶은 것만큼이나 퀴어문화축제에서 사회를 보는 것은 계속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죠.

 

규환: 하하, 정말 송해처럼 되는 것인가요?

 

구야: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저는 1년에 한 번이라 비교가 미안하긴 해요. 사실 요 앞에서 자주 뵙는데(웃음).

 

 

열정적 모습과 그 이후의 일상

행복한 독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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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커버 (2008)

 

규환: 구야님의 연애관은 어떠신가요?

 

구야: 제가 연애는 ‘젬병’이에요. 예전에 연애를 했을 때도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아, 나는 연애라는 것이 잘 안 맞나 보다’ 그래서 마음을 비운지가 오래됐죠. 사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게 오히려 편해요. 연애를 안 하니까 힘든 일들이 안 생겨서 편해요(웃음). 그리고 ‘얼굴이 많이 팔려서 연애를 못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바닥에 얼굴 팔린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다들 연애하거든요. 그냥 제가 안 하는 거예요.

 

규환: 99년 ‘버디’ 인터뷰 당시에는 연애가 주요 키워드였던 같은 느낌이었어요.

 

구야: 그 인터뷰 당시 제가 남자한테 뻥 차였을 때였어요. 뭔가 ‘기분전환을 해보자’라고 해서 다짜고짜 한채윤 씨한테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나요. 항상 버디 ‘선반’에 얹어 놨다가 ‘펑크 나면 나 인터뷰해라’라는 상황이었거든요. 20대에 연애에 실패했을 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잘못했던 일인데도 그때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잘못되었다’라는 비판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죠.

 

규환: 20대에서 40대로 넘어오면서 구야님께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구야: 그때에 비하면 스스로 굉장히 편안해졌죠(웃음). 제가 20대 나를 느끼기에도 ‘날카로운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자로 잰 듯한 느낌이었던 반면에, 40대가 되니까 ‘부드러워졌다’라는 생각이 들죠. 오래된 친구들도 ‘너 되게 순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해요. 그게 ‘내가 연애를 안 해서 그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나이 먹어서 꼬장꼬장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규환: 현재 삶에서 파트너와의 안정적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구야: 우선 사람마다 차이가 굉장히 큰 것 같아요. 일반들도 독신도 있고, 이혼하고 결혼하고 하니 이쪽도 마찬가지 같아요. 저는 파트너십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물론 오는 사람을 마다하는 것은 아닌데요(웃음). 내가 나서서 찾지도 않을뿐더러, 차라리 지금 내가 혼자 있기 때문에 굉장한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혼자 지낸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규환: 그럼, 구야님은 1인 가구가 될 건데, 거기에도 어떤 욕망이 있을 수 있잖아요.

 

구야: 혼자 살아도 아기자기 재밌게 살고 싶어요. 지금 제가 서대문구의 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10년 계약이 내년 봄에 곧 끝나거든요. 처음에 들어올 때는 10년간 열심히 일을 해서 원룸이라도 집을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서울시에서 인정하는 저소득층이고 저소득층은 연장이 가능하더라고요(웃음). 아무튼 10년 동안 더 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때는 뭔가 집을 하나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 같아요. 집을 가지게 되더라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니까 주택연금으로 돌려서 뿌리까지 뽑아먹고 죽을 거예요. 그걸로 노후생활하면서 ‘재미나게 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일반 직장에 비해 저축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노후가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해요.

 

규환: 게이들의 삶을 생각했을 때 고향과 같은 종로랑 멀어지는 것도 상상이 가능할까요?

 

구야: 일과 커뮤니티에 파묻혀서 살다 보니까 종로를 벗어나는 게 상상이 잘 안돼요. 지금 사는 집도 여러 임대 아파트 중에 종로와 가깝고 교통도 편한 곳으로 선택한 거죠.

 

규환: 게이들의 이후의 삶의 형태는 비슷할 거잖아요. 적어도 저 같은 도심 1-2인 가구 같은 경우만 봐도 구야님이 좋은 롤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야: 제 생활이 게이들에게 어떤 롤모델이 되고 그렇진 않겠죠. 여러분들은 돈도 더 벌고 값진 일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을 테니까요. 단지 제가 하는 일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누릴 수 있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후의 삶

혹은 우리 모두의

 

규환: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과 가치관을 쭉 훑어보았어요. 이제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여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다고 생각하는지, 앞으로 몇 살까지 살고 싶은지 궁금해요.

 

구야: 지금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이 정도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삶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안 해요. 근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 텐데 아파서 손 벌리지 않으려면 죽기 전날까지라도 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규환: 가늘고 길게 가는 건가요?

 

구야: 아주 오래 살고 싶진 않아요. 70, 80대로 넘어가면 아무래도 몸도 노쇠하고 생활 자체가 어렵잖아요. ‘그때 과연 내가 즐기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70대 까지는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조금 재밌기보다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규환: 게이로서 행복한 노년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구야: 좋은 친구들이 있어야 되겠죠? 일반들은 가족이나 자식들이 있는데 게이들은 가족을 이루며 살기는 어려우니까요. 같이 여행도 다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공동체 생활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연락하는 좋은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규환: 부, 건강, 연애, 친구 중에서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요?

 

구야: 일단은 건강일 것 같고, 그다음은 친구, 부, 연애요. 20대였다면 건강했으니 연애가 앞에 갔을 거 같고, 친구, 연애, 부 건강 순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70세 때도 퀴어문화축제 사회를

흰머리로 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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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문화축제 사회보는 구야님 (2005, 2003)

 

규환: 저는 요즘 연애를 하면서 안정적이라는 생각하는데, 멀리 보면 이게 부질없는 생각일 수도 있죠. 자신의 상황마다 행복의 조건이 달라질 텐데, 지금 구야님에게 행복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또 게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구야: 저한테 행복이란 아무 걱정거리 없이 편한 상태인 것 같아요. 잠자리에 누웠을 때 아무 걱정 없고, 뭔가 쫓기는 거 없는 것. 고민이 있다거나, 아픈 곳이 있어서 마음이 쓰이는 상태가 아닌 것이요. 그것만으로 제게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아요.

 

규환: 이야기를 나눠보니 구야님은 긍정적인 면이 많은 것 같아요.

 

구야: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니까 계속 긍정적이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뭐든 좋은 쪽으로 보려고 하죠.

 

규환: 게이들의 한결같은 태도는 외모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구야: 아무래도 게이들은 일반들에 비해서 젊을 수밖에 없죠. 일반 친구들은 제가 봐도 너무 늙었어요. 머리는 다 빠져있고, 배는 다 올챙이배죠. 그들은 이제 자식 키우며 정말 일반적인 생활을 하면 걱정도 많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 늙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가정이 없으니 사회적인 부담이 좀 덜한 편이죠. 물론 초반엔 정체성과 관련된 걱정이 많을지 모르겠지만, 게이로서 안정적인 삶을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일반들에 비해 걱정이나 힘든 일들이 적다고 상대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덜 늙는 것 같아요. 물론 꾸미고 그런 것도 많이 좌우를 하겠죠(웃음).

 

규환: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에요. 10년, 20년 후에 노년이 될 미래의 나를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이라고 예상하시는지 궁금해요.

 

구야: 그때도 아마 아이샵에서 일을 하고 있겠죠. 은퇴를 했다면 아이샵에서 자원활동을 하겠죠. 게이바에 콘돔을 돌리고 있을 거고요. 그리고 요즘은 동성애자로서 힘을 모아야 할 일이 있을 때 50대 이상은 보기 어렵잖아요. 하지만 그때가 되면 박기호부터 저까지 다 나와 있지 않겠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되어서도 소리 지르며 지금과 다를 것 같진 않아요. 단지 제 모습이 변해있긴 하겠죠. 어쨌든 아이샵 일도 열심히 하면서 힘을 보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할 거 같아요. 그때도 퀴어문화축제 사회를 흰머리로 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유쾌하고 유익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구야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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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profile

루빈카 2016-11-24 오전 11:19

옛날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ㅎㅎ 좋은 기사와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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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6-11-24 오후 17:32

ㅎㅎ 재밌게 잘 읽었어요 현구 언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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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v 2016-11-24 오후 20:05

헐 듣기만 했던 구야홈닷컴 뜻이 구야님의 홈닷컴이었다니ㅋㅋㅋ 신기하고 즐겁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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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ㅈ^)석 2016-11-26 오후 18:07

친구사이 알기 전 아마 중학생?때쯤부터 구야홈닷컴을 들락거렸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분을 이제는 아이샵에서 뵐 수 있으니 참 신기해요ㅎㅎ
그 시절 어떻게 그랬을까 싶으면서 우리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인터뷰였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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