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람 사이의 터울 #2 : 패배하지 않기
2014-02-15 오후 12:11:21
2001 5
기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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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들 중엔 이른바 게이스러움을 잘 숨기고 사는 사람도 있고, 누가 봐도 게이인 것을 드러내고 다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후자의 부류들이 우선은 눈에 띄기에, 받아야할 격려나 받지 말아야 할 욕지거리도 후자의 사람들이 먼저 먹는 경향이 있지요. 그걸 이용해 그네들은 차라리 어떤 자리에든 더 자신을 드러내고, 앞서서 싸우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비교적 자신을 잘 숨기고 사는 전자의 부류는, 스스로 남자다워보이고 싶든지 본래 성품이 그러하든지, 그네들을 낯설어하거나 때로는 적대하기도 합니다. 그네들과 얽혀 자기 섹슈얼리티의 고유성을 침범받는 느낌이든,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는 비교 우위의 느낌이든, 일견 남자다워뵈는 게이들은 자신을 숨기기 쉬운만큼 게이스러운 동료 게이들에 대한 혐오를 숨기기또한 쉽습니다. 둘 모두, 겉으로는 당장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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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달, 밴드의 일원이 되어볼 일이 있었습니다. 밴드 하면 열에 일곱은 뭇여성들을 매혹하기 위한 남성호르몬의 냄새가 그득한 곡들을 커버하게 되지요. 배에 힘을 꽉꽉 넣어 부르고 때로는 목을 갈기도 하고, 여느 때 해오던 일반틱 놀이의 범주를 벗어나 어떤 지극한 코스프레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가면을 번갈아 바꿔쓸 줄 아는 일은 퍽 즐거운 편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그런 노래들에 적응해가는 자신이 신기하고, 숫제 기특하기도 하더군요. 걸칠 수 있는 삶의 풍요가 뭔가 한 가지 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마치 그러지 못하는 이들보다 내가 좀더 우월한 것 같기도 하더군요. 그러면서 뒷풀이 자리의 여자문제 상담이나 음담패설이나 품번 얘기에도 적당히 맞장구를 칠 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은 평안히 흘러갑니다. 나와 그들 모두, 겉으로는 당장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사람 사이의 정은 칼과 같아서, 상대가 먼저 성큼 자신을 털어놓을 땐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 옵니다. 남의 비밀을 들었으면 나의 비밀도 토해내는 것이 상도이지요. 그런 교호가 없이는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땐 내가 즐기고 위장해온 가면과 실제 나의 모습 사이의 낙차만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게 되지요. 성정체성을 실토하는 순간, 그 이전의 과거에 했던 내 언행이 그에게 어떻게 번역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게이여서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기 위해 내가 벌려왔던 위장을 거짓말이라 받아들여 나를 불신할 수도 있겠지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울고불고 하지는 않더라도, 커밍아웃은 그래서 한 켠은 늘 입안이 까끌거리는 일이고 맙니다. 성정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성정체성을 받아들여달란 주문 외에도 그것과 두릅으로 엮인 온갖 종류의 과거와 언행을 모두 달리 받아들여달란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본인을 잘 숨기고 다닌다고 자부하는 게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대책없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많이 망설였던 시간은 어찌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결단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곤 던지는 마음으로 입을 떼지요. 나 사실 게이야. - 순간 나와 그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고, 그제야 비로소 둘 사이에는, ‘아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보이지 않으므로 겉으로 당장에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쾌적한 삶은, 무슨 나의 호환 가능한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결국은 매순간 나를 향한 패배의 연속이 아니었나, 하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아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진공의 상태를 두고, 이 정도면 되었다고 낙담해온 세월이 아니었나 하는. 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온 이력이 쌓이고 쌓여, 이젠 뉘에게 들춰보이려 해도 어디부터 손대야될지 모르는 까마득한 상태에 이미 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러니 스스로 채 정리되지 못한 자신 앞에서, 좀더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동료 게이들이 그렇게도 남사스럽고 꼴뵈기 싫어보였던 건 아닌가 하는. 결국 삶 속에서 매번 패배해왔던 건 저기 벅차게 노는 년들이 아니라, 실은 그렇게도 ‘멀쩡해보이’고 싶었던 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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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어지간히 먹고, 휘청거리며 잡아탄 택시 안에서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짜내어 커밍아웃한 밴드 멤버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앞으로 지키던 도를 평생 지키겠다는 것을 약속하노라고. 관계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댈 것은 그와 내가 이제껏 쌓아왔던 막연한 시간들 뿐이지요. 그리고 그에게서 동일한 내용의 답장이 도착합니다. 여태껏 지켜오던 도를 평생 지키겠다는 것을 약속하노라는. 
 
나는 비로소 나를 드러내고도 외면받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입을 닫았으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아무 소용없는 적막한 세상으로부터 나는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 앞에 패배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맞습니다. 차창 너머 꼬리를 끄는 황록빛 너머로, 비로소 어둠을 뚫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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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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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 2014-02-27 오전 11:26

아무리봐도 멋진 마무리에요. ㅎㅎ(댓글 없으면 이 형 토라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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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킹 2014-03-01 오전 06:26 1

'멀쩡해보이게', '평범해보이게'라는 것이 생각보다 지키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요즘 주변을 보며 새삼 다시 깨닫구 이써영. 모두에게 일반적인 잣대의 기준에서 '멀쩡하지 않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이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각자 조금이나마 그 고통을 줄여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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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D 2014-03-02 오후 18:37

와우.. 글만큼이나 좋은 댓글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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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_233987 2014-03-07 오전 03:28

침묵은 금일지 모르지만 가공되지 않은 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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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열 2014-03-08 오전 05:31

잘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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