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32호][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7 : 치준생 치주노
기간 6월 

 

[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7

: 치준생 치주노

 

여긴 QR코드 전자출입명부도 따로 없고, 다들 이름을 적고 간다. 나는 사람들이 적고 간 이름을 훑으며 점수를 준다.

 

이주원, 30점

최종혁, 80점

강훈, 100점!

 

이름마다 게이점수를 주는 거다. ‘훈’, ‘준’, ‘혁’, ‘용’, ‘근’이 들어가면 기본 점수로 50점. 아쉬운 대로 ‘범’, ‘일’, ‘균’, ‘대’, ‘석’, ‘운’ 같은 애들도 30점정도 주고. 성이 강 씨면 프리패스고, 이름이 외자면 보너스점수. 다 갖춰도 ‘빈’, ‘율’, ‘영’ 이런 건 감점요인이다. 반대로 뭣도 못 갖춰도, 이안, 이든, 지오, 로건 같은 건 고득점! 나머지는... 걍 내 맘대로... 왜냐면, 이거 100점 받는다고 이태원에서 표창 주는 거 아니고, 그냥 시간 때우려고 하는 겁니다.

 

30시간 사회봉사가 ‘창의인재’로 거듭나는 것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공공기관 체력단련실 앞에서 30시간씩이나 온도계돌이를 하고 있으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창의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물아홉이나 되도록 대학 졸업도 못하고 빌빌대는 것만으로 충분히 창의적이지 않냐고, 대체 졸업을 위해 ‘창의인재 인증제도’ 따위가 왜 필요하냐고 욕을 욕을 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대학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된 나. 이로서 창의인재 인증을 받은 자랑스런 취준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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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따위가 다 취업 스펙이 되는 시대다. 시덥잖은 퀴어 유머와 외국 근육게이들 사진에 마음을 남발해놓은 트윗 계정을 공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게북 계정을 기재할 수도 없다. 그래봐야 어차피 죽어있는 눈팅용 계정들이다. 별로 안 트렌디함을 인정하고 미련 없이 공란으로 제끼곤 했다. 근데 SNS 계정은 그렇게 넘어간다 해도, 이메일은 필수 항목이다. 꼭 이메일을 적으려 하면, 나는 이 이메일로 ‘과거의 나’가 무슨 쓰잘데기 없는 짓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어 조마조마해진다. 내 이메일 계정 두세 개 쥐어주면, 내가 게이인 거 알아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아서.

 

취준을 하는 내게는 여러 개의 메일 계정이 필요하다. “막 쓸 때는 네이버 계정, 진심일 땐 구글 계정”이라는 대원칙을 웬만해선 지키지만, 간혹 가다 구글 계정으로 야동 보는 일도 생긴다. 그럼 차마 내가 (“게이”)야동 보던 계정을 입사지원서에 적어놓기는 어딘가 께름칙하다. 이번에는 정말 입사만을 위한, 오염되지 않은! 계정을 만들리라, 다짐하며 새로운 계정을 판다. 메일주소는 지원자의 센스가 엿보이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겠나. 정성들인 작명으로 새 메일 계정을 파고 나면, 그러면, 전에 쓰던 계정들 비번을 까먹고, 그러면 나는 또 기어이 새 계정으로 온리팬즈에 가입하고야 마는... 그런 지겨운 굴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보면, 소피였나? 하울한테 “하울은 대체 이름이 몇 개야?”라고 묻는데, 하울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걸 보고, 와씨... 하울 저거 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이름을 여러 개 갖는다는 게 일반들이 할 짓은 아닐 거니까. 요즘 공중파 채널에 보면 연예인들 나와서 부캐니 뭐니 하면서 별명 짓고 비슷한 짓 하기도 하던데. 느낌이 영 다르다. 연예인들은 “자유롭게” 살기 위한 거고... 퀴어들은 자유롭게 “살기 위한” 거고... 억지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데, 아무렴 뭐, 그래, 하울 게이 아니라 하지, 어차피 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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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면접관이, 글을 꾸준히 쓰신 거면 블로그 같은 게 있냐고 물었다. 아무렴, 웹진에 글을 써 본 경험이 있다고 대답해버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린 나는 해리포터에 빙의해 낫슬리데린낫슬리데린, 제발 더 묻지마, 더 묻지마, 주문을 외웠는데, 그럴 리가 있나. 어떤 웹진이냐길래, 나는 아, 그게... 인권단체 같은 곳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인권단체면 인권단체지, 인권단체 같은 곳은 또 뭐냐고. 다행히도 거기서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쾌속으로 탈락소식을 전해 받았고, 여사친은, 오빠 그냥 커밍아웃을 해버리지 그랬냐며, 며칠을 놀려먹었다.

 

내로라하는 기업부터 같지도 않은 회사들까지. 각양각색의 탈락소식을 전해들으며 20대가 거의 저물었다. TV에서 우울증 고백하는 연예인도 아닌데, 한동안은 잠드는 게 다 무서웠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뭣도 되지 못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만만찮았다. 그럴 때 엉뚱하게, 지난 20대 때 내가 거의 미쳐서 만나러 다녔던 이런저런 남자들을 떠올리면 위로가 됐고,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헬스장에 갔다. 열렬한 사랑을 추억했다거나 몸을 움직이니 정신이 맑아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내가 20대에 어디에 정신머리를 팔아두고 살았는지 좀 객관적으로 바라본 거다. 20대에 처음 ‘이성적인 감정’으로 사람 만나는 걸 깨우치고, 남자 만나겠다며 고속버스고 비행기고 수단 안 가리고 어디든 갔다. 골 때리는 추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괜찮아졌고, 무엇보다, 더 괜찮은 남자 만나보겠다고 헬스장 가서 자기계발한 나보다는 공모전과 자격증으로 중무장한 인재들이 취업시장에서 더 잘 나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됐다.

 

그래도 갑갑한 마음이 영 가시는 건 아니었다. 대만 애인과 장거리 연애할 때는 어떻게든 금공강을 만들었다. 목요일날 학교 끝나면 공항까지 달려가서 비행기에서 과제하고, 월요일날 한국 와서 1교시 발표하고. 비행기값 만든다고 학기 중에 과외를 몇 탕씩 뛰었다. 한참 이 쪽 동아리 활동해보겠다고 할 때는 주중에 학교에서 졸업공연하고 주말에는 클럽 가서 공연하고, 연습실서 또 노트북 켜서 글 쓰고. 그 와중에 언어 자격증이며 복수전공이며 종류별로 잘도 모았다. 모텔 컴퓨터에 USB 꽂아놓고 과제하던 걸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등바등 산 게 두 명 분에 못 미쳤다 뿐이지, 한 명 반 푼 몫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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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면접관이 한 번 더 물었으면, 어떤 인권단체냐고 물었으면, 뭐라 답할 수나 있었을까? “무해한” 사회단체 아무데나 얘기하고 말아야 하나, 그런 생각 들다가도, 홈페이지라도 한 번 들어가보겠다고 하면 걷잡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될게 뻔하고. 그렇다고 친구사이라고 말하면? 아웃팅은 그렇다 치고, 그래봐야 친구사이 소식지에서도 이력서에 쓴 내 이름 찾아볼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러게 왜 웹진 얘기는 꺼냈냐며, 오빠는 차라리 게이 명함을 파서 노나주고 다니라는 여사친 농담에, 그래 그거 파서 이마에 붙여놓고 면접 보러 다녀야겠다고 같이 헛소리 뻥뻥했다. 

 

게이들이 게이이름 짓는 거 초딩 때 인터넷소설에 나오는 이상한 가명 짓고 노는 것 같아서 혼자 좀 낯 부끄러울 때도 있다. 창피하다가도, 근데 여러 이름들 몫 하며 사는 거 성가셔 죽겠는데, 그런 재미라도 좀 있어야 안 되겠나 싶다. 이름이란 건 어떤 사람의 존재감을 온전히 담는 유일한 단어라느니, 그래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그가 막 꽃이 되었다느니 하던데... 게이들한테도 유효한 건지 잘 모르겠다. 한동안 게이들의 심금을 울린 퀴어로맨스의 제목이 다짜고짜 <콜미바이유어네임>인 게 좀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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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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