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04호][소모임] 읽은티 #01 -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by 황이 posted Feb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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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티"는 정기적으로 독서 모임을 갖는 친구사이 소모임 "책읽당"의 독서 모임 후기를

매월 친구사이 소식지에 기고하는 연재 기획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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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단편 중 "조의 방"에 대한 감상> - 공을기
 

2018년은 김봉곤과 박상영을 차례로 읽은, 내 독서이력의 특별한 해이다. 두 사람 모두 퀴어한 소재의 작품을 축으로 단편집을 꾸렸다. 그전까지 내게 남성 퀴어 소설가는 19세기의 오스카 와일드와 20세기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있었을 뿐이니 풍성한 성과이다. 그래서 런던이나 베를린이 아닌, 종로가 “한 때는 제 집처럼 드나들던 조금은 잡된 거리”(김봉곤, 『여름, 스피드』, 133p)로 등장하였을 때 무척 짜릿했다.

 

특히, 박상영 작가의 단편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문학상상과 책읽당에서 연이어 다루며, 짧은 기간에 반복하여 읽어냈기에 더 깊이 남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조의 방」이다. 그리고 ‘수’가 아닌 ‘남자’에게, 더 마음을 기울이며 읽었다.

 

나는 「조의 방」에서 비록 남자의 욕망이 더럽고 비루하며 무엇보다 타인을 훼손시키는 추악한 것이지만, “똥”으로 똑 부러지는 뚜렷한 욕망에 묘하게 감탄했다. 어쩌면 욕망은 그럴수록 온당하지 않을까? 욕망만큼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충실히 대변해 줄 때 가치가 있다. 그늘 없는 욕망은 차라리 이상이라 부르자.

 

반면에 수는 역할을 바꿔가며 타인의 욕망을 달래주고 경제적 이득을 얻지만 정작 자신은 욕망이 없다. 돈은 수의 욕망이 아니다. 그랬다면 남자의 굉장한 제안에 따라 그가 바라는 똥을 어떻게든 내어줬을 것이다.

 

오히려 수는 남자의 기괴한 요구로부터 겨우 욕망을 확인한다. 그것은 ‘조’의 방에 있었다. 남자는 똥을 통해 그것을 받으려 든다. 수는 이를 극렬히 거부하지만 애초에 줄 방법도 없다. 이미 조와 함께 잃어버린 과거이기 때문이다. 수의 죽음은 필연이다. 욕망이 과거에 있는 인물은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남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토록 번연한 욕망을 가진 인물은 죽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기에 껍데기로 살지라도 말이다. 그런 삶은 수의 죽음보다 저열하다. 하지만 수 또한 조의 방에서 나온 이후, 껍데기로 살아온 것 아니겠는가?

 

남자가 죽음으로 인도하며 수를 껍데기뿐인 삶에서 성장시킨 셈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지일까? 「조의 방」은 연극으로 무대에 올라도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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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작가 초청 모임 활동 모습"




 

<수록 단편 중 "세라믹"에 대한 감상> - 황이

 

세상은 가끔 너무 쉽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아무 조건 없이 행하는 숭고한 것이라고 알립니다. 하지만, 어떤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분명히 조건이 있고,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을 때 징벌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죄를 참지 못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자식이 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식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린 사람은 자주 삶의 주체가 아닌 모양으로 존재합니다. 보호가 필요하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호가 덜 필요하고 성숙한 사람의 소유물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물론, 경험하지 못한 것을 통찰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린 사람도 나름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부모를 가장 지근에서 관찰하는 어린 사람은 부모가 “보호가 덜 필요하고 성숙한 사람”을 연기하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잘.

 

보통, 자신이 어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정의 기복을 참고 힘든 일을 견디는 것을 성숙했다는 증거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생각보다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 앞에서 스스로 망가져가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로 인해 성숙했다고 합리화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망가진 사람들은 결국 어린 사람만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 많이 알려주지 않아 어떤 것이 중요한지 오히려 명확했던 어린 시절이라면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과오를 켜켜이 쌓고 살아갑니다. 어떤 집단에서 ‘성숙한’ 삶의 방식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훈련시킵니다. 여기서 훈련된 사람은 그게 잘못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상처 입게 합니다. (어쩌면 이런 ‘성숙한’ 삶의 방식은 더불어 살아야하는 사람이라는 생물이 살아가기에 썩 맞지 않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세라믹]의 화자는 그렇게 이기적으로 훈련된 엄마를 알아봅니다. 화자의 엄마는 이상한 종교 단체에서 광신도처럼 종교생활을 합니다. 음주 후 수시로 화자를 학대합니다. 나를 학대하던 사람의 피부가 나에게 닿는 일은 ‘사랑한다’는 말로도 좋아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자는 어린 사람입니다. 세상은 어린 사람의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습니다. 답답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나를 지키려고 들었던 눈썹 칼로 뱉지 못한 말이 고인 혀를 베어 흐른 말을 다시 깊은 곳에 삼킵니다. 어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입니다. 하나 더 붙이자면, 옆집에 사는 M에게 놀러가는 것 정도.

 

엄마의 ‘성숙한’ 행동으로 인해 옆집에서 M이 사라진 후, 역시 그 ‘성숙한’ 행동으로 인해 엄마까지 집에서 사라졌을 때, 화자는 엄마의 죄를 단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렇게 합니다. 화자에게 이제 보호자는 없습니다. 어린 사람이 보호자 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성숙한’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눈썹 칼로 자신의 죄(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르고, M의 흔적을 따라가 세라믹 조각을 삼키고, M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는 화자의 삶이, 작가가 글로 쓴 내용 후에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맞더라도, 그 역시 주체적인 사람의 삶입니다. 아무도 이 어린 사람을 탓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크고 작은 학대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숙’하기 위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세라믹]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판타지 소설 같습니다. 지금보다 제가 더 어린 사람일 때 [세라믹]의 화자처럼 부모를 단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나의 부모에게 그럴 정도의 죄는 없다는 전제만이 명쾌할 뿐, 통쾌했을지 후회했을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저도 이미 어느 정도 ‘성숙’했기 때문일까요?(보통 ‘성숙’한 사람은 이런 상상도 하려하지 않겠지만...)

 

모를 일입니다.

 

 

책읽당 활동 관련 문의 : 7942bookpart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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