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호][칼럼] 세상 사이의 터울 #7 : 자가격리의 계보
2020-06-02 오전 01: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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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5월 

 

[칼럼]

세상 사이의 터울 #7

: 자가격리의 계보


1.

 

2020년 5월 2일 새벽 킹클럽에 방문했다. 2월 하순부터 꼬박 두달 반을 닫은 후 연 날이었다. 5월 7일 킹클럽의 페이스북 페이지로 해당 시각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간 소식을 접했고, 이튿날 오전 관할 보건소에서 검진을 받고 음성 판정을 받았다. 그날 국민일보가 쓴 게이클럽 확진자 방문 기사는 70건 이상 받아쓰기되었고, 포털 검색어 상위권에는 게이업소의 이름이 수일간 오르내렸다. 11일에는 클럽 내 카드 사용내역을 근거로 밀접접촉자로 분류, 구청으로부터 자가격리를 통보받았다. 격리기간 중 종로 게이업소 중 한 곳의 확진자 방문 소식을 접했고, 방역당국은 그 주 주말 되도록 이쪽 업소의 영업을 중단해줄 것을 권고했다. 

 

자가격리가 해제된 다음날, 주말 매상으로 먹고 사는 게이업소가 들어선 종로3가를 거닐었다. 한시간쯤 걷고 나니 자가격리 중 시원찮았던 위장이 비로소 말을 듣는다. 듣던 대로 이쪽 업소는 모조리 문닫았고 나머지 업소들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일반한테 동네 뺏긴단 얘기에 한번도 공감해본 적 없는데 오늘 풍경을 보니 정말로 동네를 뺏긴 것 같다. 호모 한 점 묻은 곳만 가도 민폐가 될 것 같고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머물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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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의 시민의식은 우리의 부재로 증명되어야 하나. 착하고 순종적인 시민이 되고 싶어 종태원도 끊고 번개도 끊고 살겠다는 시티 자게의 글이 떠오른다. 방역의 대상으로라도 비로소 호명해주어 거지같은 언론보다는 방역당국에 짐짓 감격한 마음을 품어보는 일이 생각해보면 왜 안 비참할까. 전력을 다해 희석되었으면 좋겠다는 것만이 그들에게도, 심지어 우리에게도 그토록 필요한 일이라는 게, 무해한 시민이 되기 위해 부디 존재하지 않음에 근접해달라는 역설이 따지고 보면 아프도록 황망하다.

 

행정부의 선의가 정말로 고맙기는 하다. 사람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마당에 다른 오른쪽 정권이었으면 IMF 전야에 날치기된 노동법이나 필리버스터 끝에 통과된 테방법처럼 이 정국에 도무지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다. 그 옛날 군사정권 시절의 부랑아나 성매매여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호모클럽에 확진자 나왔다고 호모들을 자가격리가 아니라 시설격리로 밀어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건 순전히 현 정부의 연약한 상식이 그 정도까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런 선의에 내 팔자를 기대야 한다니 삶이 너무 범속한 나머지 쓴웃음이 난다.

 

카드 사용 내역으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 자가격리를 통보받고, 그마저도 관할보건소별로 일관된 사인이 있지 않아 격리가 아니라 자의성의 공포에 먼저 시달려야 하는 것도 실소가 터진다. 직장에 차마 커밍아웃할 수 없었을 누군가에겐 자칫 직장의 입지가 결딴날 수 있는 변수가 그들에겐 그저 행정상의 사소한 난맥일 수 있다는 게. 이 모든 웃음포인트 앞에 그저 호모끼리 안 만나는 게 지고지순의 방역대책이자 시민의식이라면 그 지엄한 명을 못이기는 척 따라주는 수밖에. 그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습관처럼 거듭 까먹는 채로.

 

자가격리가 끝난 다음날 난 왜 종로를 거닐고 있을까. 나에게 죄가 있어 종로 사거리나 클럽 앞에 목이 매달려야 한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다. 자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검은 밤같은 시국이 그저 아연할 뿐이다. 방금 잔뜩 취한 한 헤테로 커플이 서로의 목덜미를 씹어먹듯 탑골공원 앞에 비틀거리며 엉켜있다. 저런 퇴폐와 환락의 한줌 권리조차 누구에겐 서로 공평하지가 않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권리와 평등을 바랐나. 모처럼 텅빈 종로 거리가 일반들 떠드는 소리로 저리 왁자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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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 치하인 1915년 「전염병예방령」이 제정된 이래, 식민지 조선의 전염병 관련 업무는 이른바 '위생경찰'이 담당했다. 막대한 행정사무를 경찰에게 일임시킨 조선총독부의 관행에 따라, 전염병 환자를 색출·신고·감시하는 강력한 위생행정이 식민지 조선에 자리잡았다.1) 이에 대해 당시 언론은 "민중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위력으로만 압박하려는" 처사라 꼬집었다.2)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전염병예방법」을, 1957년 「전염병예방법시행령」을 각각 제정하였다. 「전염병예방법」 29~33조에 따라 감염 환자의 격리수용 및 취업금지·출입금지·취학금지 등이 법제화되었고, 39조를 통해 제1종 전염병이 발생한 경우 각 시장·도지사가 집합제한 및 업장폐쇄 명령 등 강력한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전염병이 만연할 경우 정부는 간헐적으로 동법 39조를 발동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전가의 보도",3) "최후 단계의 조치"라 평가했다.4) 나아가 동법 중 취업금지·출입금지·취학금지 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이유로 1993년에야 폐지되었다.5)

 

한편 「전염병예방법시행령」의 4조는 다름아닌 성병 관련 조항을 담고 있었고, 「전염병예방법」 9조를 통해 감염이 의심될 경우 각 시장·도지사의 재량으로 강제검진을 시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법규를 활용해 1975년 1월 의정부시는 미군 기지 근교에 위치한 기지촌 및 다방·다과점 등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성병검진을 실시했다. 아울러 성병 감염이 확인된 대상자는 성병관리소에 감금되어 치료받았는데, 이곳은 "이름만 성병관리소지 정신병동이나 구치소와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다.6) 1978년에는 「성병검진규칙」이 제정됨에 따라, 외국인 상대 유흥업소 종업원에 대한 정기적인 성병검진 및 '보건증' 의무 소지가 법제화되었는데, 이는 많은 유흥업소 종업원들의 저항을 낳았다.7) 나아가 1984년 제정된 「위생분야종사자 등의 건강진단규칙」을 통해, 정기 성병검진 의무는 내국인 대상 접객업소 종업원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8)

 

또한 1985년 한국에 첫 외국인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가 발생하고,10) 1987년 국내 HIV 감염인 중 첫 사망자가 발생하자,11) 정부는 1987년 「전염병예방법」 2조 2항에 의거 AIDS를 지정전염병으로 고시하는 한편,12) 같은 해에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을 새로 제정하였다. 동법 15조의 강제처분 조항에 따르면, HIV 감염인이 치료를 거부할 경우에 "격리보호", 즉 강제격리수용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었다. 이에 대한 여론은 찬반이 엇갈렸는데, 격리수용에 찬성하는 쪽은 "환자 인권차원보다는 국민 건강 차원에서 예방해야 한다"거나,13) "최대한의 인도적 예우를 갖춰 격리보호"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14) 격리수용에 반대하는 쪽은 "당사자들의 잠적"을 부추기고,15) "환자들이 지하에 숨어버려 이 전염병의 예방에 역효과"만 초래할 뿐이며,16) "자칫하면 형제복지원이나 성지원 사건을 빚은 부랑인 수용에 관한 훈령처럼 인권침해를 결과할 위험"마저 있음을 강조하였다.17) 

 

실제로 정부는 AIDS 환자를 위한 격리수용 전문병원 신설을 시도하였다.18) 1988년에는 AIDS 환자 수용시설 건립을 위한 예산까지 확보했으나,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의 반대로 계획은 무산되었고,19) 이에 따라 AIDS 환자들은 각 병원의 격리병동에 분산 수용되었다. 한편 1992년 진주교도소의 재소자 중 HIV 감염인의 감염사실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 것은 물론, 그들이 정신질환 재소자 전용 병사에 함께 수감된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20) 1990년대 초 HIV 감염인을 분리수용하라는 목소리는 국내외 언론을 통해 자주 표출되었는데,21)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에이즈 감염자 수용소는 2차대전 때 독일 나치 정권의 '유대인 수용소'를 떠올리게끔 하는 발상"이라고 촌평했다.22)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5조의 강제처분 중 격리보호조항은 1999년 개정 때 비로소 삭제되었고, 16조의 '보호시설' 또한 '요양시설'과 '쉼터'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전염병예방법」은 2000년 대폭 개정되어 지난날 위생경찰 행정의 면모를 어느 정도 일신하였고, 동법은 WHO에서 2005년 제정한 「국제보건규칙」에 따라 2009년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로 전면 개정되어 오늘에 이른다.23)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었을 때 자가격리자에게 적용된 조항은 동법 42조의 강제처분, 47조의 방역조치, 49조의 예방조치이며, 이를 위반할 경우 79조의 내용에 의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 이 글 중 일부는 사전 협의 하에 링크의 기사에 인용되었습니다.  

 

 

 

1) 천병철, 「우리나라 감염병관련 법률 및 정책의 변천과 전망」, 『Infection and Chemotherapy』 43(6), 대한감염학회, 2011, 476-477쪽.
2) 「횡설수설」, 『동아일보』 1922.7.6, 3면.
3) 「콜레라 전선」, 『동아일보』 1963.9.23, 3면.
4) 「콜레라를 막자」, 『동아일보』 1963.9.23, 2면.
5) 「국회 통과 24개 법안 주요내용」, 『동아일보』 1993.12.1, 5면.
6) 「인권유린과 국민보건의 사이」, 『동아일보』 1978.3.13, 7면.
7) 「세상 이렇습니다 : 이창을 통해 본 직업인의 실상 <131> 호스티스 (6) 6호 검진실」, 『경향신문』 1979.5.17, 5면.
8) 「성병검진업소 확대, 사우나·다방·숙박업소 등」, 『경향신문』 1983.11.29, 7면.

9) 「'보건증' 21년만에 퇴출」, 『동아일보』 1999.5.29, 25면.
10) 「면역결핍증 미국인 주변사람 전염여부 역학조사」, 『동아일보』 1985.6.29, 6면.
11) 「공포의 AIDS... 약 없는 죽음의 병」, 『동아일보』 1987.2.13, 7면.
12) 「AIDS '지정전염병' 고시」, 『경향신문』 1987.2.24, 11면.
13) 「AIDS 확산방지 "주먹구구"」, 『경향신문』 1991.3.14, 22면.
14) 「AIDS감염자 철저격리 보호를」, 『동아일보』 1994.8.2, 19쪽.
15) 「동아 인터뷰 : 한국에이즈연맹 후원회장 김지미씨 "에이즈추방 이젠 사회적 과제"」, 『동아일보』 1994.8.9, 7면.
16) 「AIDS 환자 "격리수용은 인권침해"」, 『경향신문』 1987.9.15, 6면.
17) 「AIDS 관리의 난점」, 『동아일보』 1987.3.3, 2면.
18) 「AIDS환자 격리수용 전문병원 신설」, 『매일경제』 1987.3.7, 11면.
19) 「AIDS '특별관리'에 허점투성이」, 『경향신문』 1991.12.14, 19면.
20) 「에이즈 재소자 정신병사 수감」, 『한겨레신문』 1992.5.23, 14면.
21) 「에이즈管理(관리) 너무 소홀하다」, 『경향신문』 1992.4.17, 경향신문 3면 ; 「'에이즈 수혈', 대책 세워라」, 『경향신문』 1992.7.4, 3면.
22) 「에이즈환자와 인권」, 『한겨레신문』 1997.5.22, 3면.
23) 천병철, 「우리나라 감염병관련 법률 및 정책의 변천과 전망」, 『Infection and Chemotherapy』 43(6), 대한감염학회, 2011, 480-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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