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 - 극장의 역사 : 서 있는 사람들
2003-10-22 오전 00: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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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이곳에 옮기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당시 필자가 버디 편집위원으로 있던 98년도에 취재를 해서 '픽션화'해서 쓴 것입니다. 버디의 단행본 계획 등에 맞물려, 챠밍스쿨 강의 때 맞춰 이곳에 전재하려던 계획이 조금 늦춰진 것입니다.

단행본 원고로 쓰기에는 취재 자료나 필력이 다소 약하다 생각이 들고, 워낙 시간이 지난 글이어서 지금에와서 보면 다소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일단 글 자체가 미숙하기 짝이 없군요. 벌써 5년이 흘러버렸습니다. 잃어버렸던 원고를 다시 보내준 버디 측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한국 동성애 게토, 오욕과 오명의 연대기 (총 4회 연재)

1998년 이송희일

1. 서 있는 사람들 - 극장의 역사
    
2. 길녀, 베니스에 가다 - 터미널, 공원과 남산의 역사
    
3.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4.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극장의 역사 : 서 있는 사람들

역사는 결코 한가지 사실로 환원되거나 수렴되지 않는다. 동일성의 이름으로 그 기저에 흐르는 모든 차이와 균열들을 은폐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다양한 삶에 대한 저주스런 능멸이다. 종족번식을 핵으로 삼고 이루어지는 이성애자만의 사랑, 삶, 가치, 해석이 유일한 삶의 모양새로 역사를 싹둑싹둑 가위질 한다면, 우리는 갖가지 빛깔과 색조가 섬뜩하리만치 증발된 백색 신화밖에 볼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 동성애자들은 그 창백하게 표백된 백색 지면 위에 한 점의 얼룩으로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숨 졸이고 휘청거려야 했던가!

누가 뭐라든, 동성애자들의 삶은 의연히 이 땅위에 존재해왔다. 용케도 이리저리 가위질을 피해 다니면서 은어(隱語)의 전설을 일궈내고, 뒤돌아선 수줍은 얼굴로 하룻밤 연인의 이름을 읊조리듯 뱉어내고, 작은 항거의 몸짓들로 자기 삶을 포기하거나 망각 속으로 밀쳐두지 않았다. 비록 개구리 살상용 돌팔매질 인양 이성애자들이 심심찮게 던져대는 오욕과 오명 속에서였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았다. 어둑어둑한 극장 한켠에서, 똥과 낙서 투성의 터미널 화장실에서, 모기떼 끓는 남산 숲속에서, 탑골 공원 노인들 속에서….

그리고 그 지독한 생명력 덕택에 이제사 백색 지면위에 흐릿하게 흩어져 있던 얼룩들을 우리 동성애자의 명징한 삶의 흔적들로, 뚜렷한 역사의 궤적들로 다시 쓸 수 있게 됐다. 기탄없이 잉크액을 분비할 이 글쓰기는 필경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최초의 흔적들 ─ 해방 이후

― 대단했지, 대단했어! 그땐 정말 엄청났다구!

(장 노인은 그렇듯 격앙된 어조로 포문을 열었다. 필자는 즉시 녹음기 버튼을 눌렀고, 종로 Y 게이바 소음을 막을 양으로 녹음기를 그의 몸 가까이 들이댔다. 장 노인은 취재 차 갔던 P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60 초반의 늙은 게이였다. 중풍에 걸렸는지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고, 도금된 플라스틱 단장으로 가냘픈 몸을 간신히 의지하는 신세였다. 극장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에게 거듭거듭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오 란 말을 주지시킨 끝에 난 겨우 그와의 인터뷰 승락을 얻어냈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그의 파란만장한 극장 경험담 속에서 게이 극장사를 시대별로 간추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래의 글은 녹취된 부분을 알기 쉽게 대략 편집한 것들이다.)

― 내 기억으론 <동명>이 맨 처음이었어. 아마 해방되고 좀 지나서였을 걸. 그 극장은 명동에 있었더랬지. 옛날 신세계 백화점 옥상, 맞아! 바로 거기에 있었어. 나중에 불이 나서 없어질 때까지 주욱 그랬어. 처음엔 좀 어설펐달까… 그런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재수없게 양키 보갈들이 솥뚜껑만한 방뎅이를 흔들면서 꽤나 설치고 그랬어. 하긴 그놈들이 아마 외제 물건 퍼뜨리듯 그런 분위기를 거기다 퍼뜨렸을 거야. 어디 순해빠진 조선놈들이 앞장서서 그런 짓을 했겠어? …… 물론 예나 지금이나 방식은 똑같았지. 암, 연애하는 것이 어디 세월 타겠는가.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서 있으랴, 다리 더듬으랴 그러다 눈 맞고 손 맞고… 그러면 근처 어디 여관이나 숲속으로 가서 박 타고 그랬다 이거지. 그래도 그 <동명>은 좀 반반한 놈들이 들락거렸던 것 같아. 거긴 명동이잖아. 번화가였으니까, 제법 번듯한 건물들도 많고, 백화점도 있고 그랬으니까. 넥타이 맨 녀석들도 꽤 많았었어. 실은 내가 맨 처음 만난 남자도 양복 입은 어연번듯한 중년 사내였지.

나중에 왕십리에 생긴 <광무>라는 극장은 거기하고는 좀 달랐어. <광무>는 영화만 튼 데가 아니었거든. 악극 같은 걸 영화하고 같이 하고 그랬어. 왜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왕십리에는 점 보는 데나 무당집이 많았잖아. 그래서 그랬을 거야, 거기엔 무속인들도 많이 오고 춤꾼도 꼬이고… 시장통이 많아서 그런지 후질구레한 장삿군이나 지게꾼들도 심심찮게 찾아들었어. 시쳇말로다 저소득층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런 거지. … 내 말이 제대로 된 거여?

어쨌거나, 그래도 명동에 사람이 더 모였었지. 암만해도 도시 중심에 있다보니까, 오다가다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들렸던 게지. 백화점을 끼고 있다 보니께 소문도 날다람쥐처럼 은근히 널리 퍼졌을 거고. 참 그러고 보면 거기가 방앗간이여 방앗간! 배배 아랫도리 꼬인 참새들이 그냥 지나쳤겠는감, 거기를. 이러구러 인기가 마냥 치솟다보니, <동명>말고도 그런 극장이 더 생겼지. 왜 지금 대한 항공자리인디, 미도파 백화점 뒤편으로 <경동>이라는 극장도 생겼지 뭐여.

(지금껏 제시된 구두(口頭) 자료에 의하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해방 이후 최초의 게이 극장은 <동명>이다. 장 노인뿐만 아니라, 50년대 중초반에 명실공히 게이극장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 만나본 사람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더 거슬러 추적해보고 싶어도,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시대가 가로놓인 탓에 우리의 기억 행로는 그곳에서 종착역을 맞는다. 현재 50년대의 극장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구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위치해 있던 <동명>은 화재로 소거되었고, 미도파 백화점 뒷편에 있던 <경동>자리는 증권회사 빌딩숲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왕십리에 있던 <광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 흔치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60년대가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듯이, 게이극장의 메카를 자처했던 명동의 <명동>이 화려한 기억의 초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게이극장의 메카 ─ 60년대

― 그야말로 대성황이었지, 그때 거기는. 옛날 코스모스 백화점 옆에 있던 <명동>극장이었어. 사람들이 뒤에 죽순처럼 나란나란 죄다 서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더랬어. 들어갈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워낙 많이 모여 있으니까 숨이 콱콱 막혀. 하긴, 그래도 그때가 물은 좋았어 최고급이었어. 한여름 토요일밤의 열기란게 실감이 난다니까. 온통 잡탕의 도가니였지. 지금처럼 이렇듯 썰렁한 줄 아니? 스크린에서 신성일-엄앵란이 갖은 폼으로 시시덕거릴 때, 우리는 제비새끼처럼 온갖 수선을 피우며 짝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리고 60년대 명동 거리도 제법 그럴싸해졌잖아. 미용, 의상계가 그곳에 한데 모아져 있었고, 예술입네 연예계네 하며 시끌버끌 혼잡을 이루는 통에 당연히 <명동>에도 그런 부류의 게이들이 점점 불어났던 거지. 증권회사 같은 것들도 많이 생기고. 왜 사랑은 어쩌고 하며 그 노래 잘 부르는 K 가수의 아버지 있잖아. 그 사람 완전히 거기 꽃이었어. 그뿐이었나, 영화배우 김 모씨는 어떻구.

(취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동>을 묘사해달라는 필자의 말에,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동> 극장은 말 그대로 당시 동성애 게토의 메카였다. 지금처럼 동성애 게토가 종로 게이바, 사우나, 찜질방, 이태원 등지로 분산되지 못하고, 터미널 화장실 아니면 극장 하나로 대변되는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이 집중해서 모일 수 있는 것은 극장뿐이었던 것이다. 그 공간은 일종의 동성애 캠프의 주춧돌이자 한국 게이문화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계기였음에 틀림없다. 장 노인의 한창 들떠 있는 그 흐뭇한 얼굴 표정에서, 그때의 과거를 회상하며 한곳에 모여있음을 그리워하는 그의 감정을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단장을 두드리며 화려했던 60년대를 계속 기억해냈다.)

― <피앙새> 다방이라고 있었어, 유네스코 들어가는 길목 근처에. <명동>에서 만나 <피앙새>간다 라고 하는 말이 여하튼간에 그때 우리들 생활을 그려주고 있는 셈이었어. 그에 발맞추어 우리들 전용 여관들도 근처에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아 참, 미도파 자리에 <우미관>이라는 영화관도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그래도 확실히 <명동>에는 어림없었지. 비견할 바가 못되었어. 왜 요즘 그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 O씨 있잖아. 걔네들 다 거기에서 큰 거야. 걔네들이 말하자면, 제 2기 유명인들이었지. 거기 가면 돈 많은 일본 관광객이나 부유한 꼰대들이 있으니까 같이 놀면 돈도 주고 사랑도 주고 그러니까 자꾸 그리로 간 거야.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나? 나중에 바로 명동 근처 남대문 시장에 아트 박스 같은 대형 의상실도 합자로 해서 내고 그랬어. 바로 명동하고 가깝잖아.

(필자는 여기에서 얼핏 의구심이 들었다. 왜 하필 게이 극장이 50년대부터 명동, 그것도 백화점을 끼고 형성되었냐하는 것이었다. 장 노인은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 간단하잖아. 그때만해도 백화점 물건이 어땠어? 거진 다 외제였잖아. 그러니까 외국인 출입이 잦았을 거고… 그리고 잘 봐봐, 명동이 어디에 있는지. 외국인 많은 이태원 가깝지, 그리고 남산하고도 가까운 데가 바로 명동 아니겠어? <명동>에서 눈맞아가지고 생짜들 눈 피해서 연애하려면 산으로 가야하니까, 자연히 남산 가까운 곳으로 택했을 테지.

(한국 경제 구조가 60년대 말 수출형 산업형으로 개조되기 전까지 생필품을 비롯한 상품들을 외국에서 조달했고, 그 까닭에 외국인 상인들(특히 동성애자들)의 빈번한 내국이 백화점을 중점으로 이루어졌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명동 거리의 동성애 캠프에 대해 이태원에 국부적으로 형성되었음직한 동성애자 주한미군의 소규모 집단과 외국인 상인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오히려 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서울의 도심화 속에서 그 원인을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장 노인은 미약하나마 명동에 동성애 게토가 생긴 이유를, 더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삶이 그곳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어 온 것을 몹쓸 외국인의 탓으로 몰아부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70년 이후 급성장한 동성애 게토가 명동에서 종로로 대규모 이전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도시의 익명성이 제공하는 씁쓸한 은폐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은폐물들은 장 노인 말대로, 산의 그늘과 얼기설기 얽혀진 도시 건물들의 장막, 도심 공원 속의 낯선 만남, 그리고 번잡한 상가의 소음들일 것이다.)

― 나도 <명동>에 뻔질나게 다녔어. 그때는 한창 젊었을 때니까. 70년대말쯤 그곳이 헐릴 때까지 말야.


입문식入門式 혹은 성지순례
─ 70∼80년대

― 그 다음엔 자네도 알다시피 모두 이곳으로 옮겨왔지. 떼거지로 이사온 거나 진배없이. 글쎄, 어쩜 P는 조금 고상한 말로다 성지인지도 몰라. 괜한 소린가? 세례라도 받는 양 웬만한 게이들은 거의 다 그곳을 맨 처음으로 거치잖아. 되게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야사와 실화 같은 거지발싸개 같은 잡지에 게이 욕하는 기사가 나면, 왜 나이 어린 젊은 꽃띠들이 가슴이 동해가지고 그 잡지 약도 보고 그리로 휑하니 달려가잖아. 그러고 보면 그 잡지들 참 좋은 일 하는 거야.

추적 어쩌고 하는 TV 프로도 그렇고 말야. 지네는 좋아서 욕하는지 몰라도 어쨌거나 몰라서 방안에 숨어 있는 놈들 귀가 번쩍 트이게 만드니까. 하여튼 명동이 자라 모가지처럼 쑥 기어들어가자, 이제는 종로에서 막 꽃이 피기 시작했지. P극장은 식을 줄 모르는 용광로 같았어. 1, 2층으로 나눠졌는데, 특성별로 분리되어 그곳을 꽉꽉 채웠었지. 1층은 나이든 꼰대와 꼰대를 좋아하는 젊은 것들, 그리고 2층은 젊은 것들 지들끼리… 왜 그 이야기 몰라? 진짜 아버지랑 아들이 P극장에서 만났었다는 얘기. 참 그거 말고도 또 있어. 형제끼리 그곳에서 만난 얘기도. 물론 그랬지. P극장만 있었던 건 아냐. 바로 옆에 H극장도 그랬었지. 헌데, 나중에는 좀 찢어지는 분위기로 변했어. 중심은 여전히 P극장이였지만, 명동 이후로 신당 쪽으로도 대거 이동했었어. S, B 극장 같은 거 말야. 70년대부터는 극장 주변에 게이 바도 점점 생기기 시작했어. 마치 갓 태어난 오리새끼들처럼 어미 주위에 종종 매달려 있는….  

(동성애 게토는 명동 이후로 종로와 을지로 일대로 양산되었다. 하지만 을지로의 생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종로와 청계천 지형이 점하고 있는 유리한 고지들을 결여하고 있던 탓이었다. 이 둘은 밀집된 상가지역인데다 밤에는 일반인들이 모두 철수한다는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종로에서는 P극장을 핵심으로 갈 같은 종로 최초의 게이 바들이 순발력있게 형성되면서 낙원상가 일대를 동성애 게토로 점령하다시피 했고, 청계천에서는 S극장을 위시로 팽고팽고 같은 나이든 게이의 디스코 바 가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갔다. 하지만 이후에 청계천 게토는 S극장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침묵을 지키게 된다.)

― 웃긴 에피소드가 있냐구. 글쎄 생각나는 건 많은데… 몽둥이 사건 얘기해줄까? 실제 있었던 일야. P극장으로 구청에서 단속반이 내려왔는데, 지네들이 귀찮으니까 애먼 극장 주인만 잡들였던 모양야. 해서 얼결에 화가난 이 주인이 급기야 몽둥이를 집어들었지. 그리고는 내처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두 놈이 나란히 붙어 앉아 있는 꼴만 보면 냅다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치면서 욕을 퍼부었대. 떨어져, 떨어져!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난 얘기야. 아까도 봤겠지만, 이제 극장도 옛날 같지 않아. 전에는 발붙일 틈 없이 꽉 들어차 있던 것이, 지금은 1관은 폐쇄하고 2관만, 그것도 반타작만 겨우 하고 있는 꼴이잖아? 워낙 게이바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많이들 그리로 간 거겠지. 그리고 젊은 것들은 왁자그르 이태원으로 춤추러들 간다며? 하기사 전에 비해 극장 수도 많이 늘어난 편이지. 사실 P보다야 충무로에 있는 K극장에 사람이 더 많은 형편이잖아. 나이 든 놈들도 젊은 애들 그리로 많이 모인다고, 얼싸 좋다도 쫓아가는 걸 테고.

(80년대 들어 괄목할만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극장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별로 골고루 편재 되고 있는 것이다. 충무로의 K극장, 청계의 B극장, 영등포의 N극장, 중량교의 SS극장, 남영동의 SN극장, 수유리의 SI극장 등 상당수의 극장 분포가 이루어진다. 물론 지금은 이들 중 여러 개가 개봉관으로 변모하면서 게이를 추방했거나 장기간 공사 중에 있지만, 약간의 부침을 겪으면서 여전히 확산 와중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시대의 쇠퇴와 함께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장 노인의 다소 떨떠름한 어조와는 달리, 이 변화 양상은 한국 동성애 게토의 새로운 기류의 징후인 것처럼 보여진다. 은폐된 생활, 집중된 은밀함, 속된 말로 물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이들의 습성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는 힘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동성애 인권 운동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이 모든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더 검토될 것이다.)

  

장 노인의 고백 ─ 90년대

P극장마저 없어진다면… 하고 장 노인은 짐짓 걱정스러운 여운의 끝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필자의 녹음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채 돌아가지 않은 뒷면 테잎에는 그의 단장 짚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녹음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 인터뷰 시간에 기억해낸 <동명>∼<명동>∼P극장의 연대기, 하지만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계속 이어질 게 틀림없는 우리 동성애자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미지들이 새겨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에게 극장의 역사를 물어보면서, 극장 안에 서 있던 동성애자들의 숱한 다리품과 그 끈적끈적한 눈부딪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비주지 않았다. 여지껏 그런 방식으로 스크린 불빛이 명멸하는 어둠 틈새로 쉴새없이 눈빛들을 던지며, 통로마다에 우두커니 선 채로 삶을 영위해왔던 장 노인들의 극장인생에 대해선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장 노인의 마지막 말대로, 어찌됐건 그것이 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우리들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었음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랫턱에 겹겹 늘어진 주름을 이지러뜨리며 말했다.


― 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게 내 사주팔자야. 그래도 그럭저럭 좋았어. 난 그곳에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고, 지금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나오는 거야, 부끄럽지만 말야.





※ 이 글의 인터뷰 대상인 장 노인은 가공의 인물임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필자가 도움을 받기 위해 만난 많은 사람들의 혼합물임도 아울러 밝히는 바이다.

도움 주신 분들 : 이태원 OUTCLASS, 혜화동 유 선생님, 친구사이 지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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