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호][칼럼] 세상 사이의 터울 #5 : 슬픔 너머의 세상
2019-12-29 오후 13: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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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2월 

 

세상 사이의 터울 #5 :

슬픔 너머의 세상

 

 

1. 

 

끊임없이 남의 사연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비스직 종사자이든지, 활동가나 연구자라든지, 남의 삶 구석구석을 냄새맡고 해량하는 것이 직업이자 사명인 사람들이 있다. 남의 감정을 읽는 일에는 당연히 적잖은 내 감정이 소요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샘이란 마땅히 일정한 부존량이 정해져있다. 아무렇게나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같은 샘이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다. 

 

슬플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내 감정은 내 것이건만, 내 감정을 내가 아니라 주로 남을 위해 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감정보다 눈앞에 처리해야 할 남의 감정이 중요하므로, 안을 다독이고 밖을 설득하는 가운데 내 감정의 문제는 먼 후순위로 미뤄지고, 미루다보면 언젠가부턴 그걸 끄집어내는 게 어려워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보면 제 속이 마치 길어도 길어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품은 듯도 하다. 제 마음의 샘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들여다볼 방법을 잃은 까닭이다. 

 

세상의 불편을 덜고 세상의 소외를 없애기 위해, 역설적으로 나로부터의 불편과 소외를 방패삼아 힘을 짜내야 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세상이란 너무도 거대하고 또 후미져서, 개인이 그로부터 무언갈 표나게 위로받기란 거의 힘들다. 누군갈 이해하기 위해 내 감정이 맥없이 갈려들어가도, 갈려들어간 내 감정을 다시 돌려받기란 막막해지는 날이 있다. 아무쪼록 많은 걸 이해해야 하지만, 그렇게 남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 나 자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고, 있더라도 그런 순간은 아주 드물기가 일쑤다. 

 

그렇기에 내 감정이 뭔갈 처리하기 위해 미뤄두는 행정이 아니라 감정 그대로 이해되고 대접받는 순간은 중요하다. 인생에서 그런 순간은 참으로 드물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내보이고 그걸 모양갖춘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공감받는 경험은, 그 후에 찾아올 또 적막같은 인생을 참아넘길 귀중한 기억이 된다. 그런 섬광같은 기억마저 없다면, 남을 이해할 일이 이리도 많은 세상을 사는 일은 한층 막막하고 견딜 수 없는 무엇일 것이다. 

 

또한 감정과 감정이 만나 아름답게 움트는 광경을 앞두고, 구석진 곳에서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마치 초대받지 못한 성찬에 초대받은 부랑아처럼,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오래토록 감정으로 대접하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슬픔이 슬픔으로 온전히 대접받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인간이 드물게 누릴 수 있는 호사와 같기 때문이다. 

 

_

 

마음 속으로 세계가 몇 번이고 무너지고 나면, 감정이 감정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세계가 무너지는 일은 마음 속이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무너지고 바뀐 세상을 겪어내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내게 익숙했던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닌 것 같으므로, 일전에 내 마음에 닿았던 위로도 더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 새 마음에 들어맞는 새 위로가 무엇일지 기필코 찾아내는 일 또한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슬픔이 더 이상 내가 알던 슬픔이 아니게 된, 슬픔 너머의 세상을 사는 일이 주로 그러하다. 

 

그리고 쉽게 위로받을 수 없게 된 이들에게도, 그 나름의 위로는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간절히 제 감정을 위로받는 일이 필요한 이들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알고 있진 못하고, 제 마음의 경제에 통달한 인간이 어디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탓이든지, 자기 마음이 낯설어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런 그에게도 다시금 이 다음 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섬광같은 기억이 끝내는 오고 말 것이다. 그러려고 찾았던 게 아닌 곳에서 별안간 맞닥뜨리게 된 기적같은 어제의 위로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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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레이첼 모랜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 15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었고, 그 후 7년간 성매매 현장에 머물렀다. 이후 37세가 되던 해인 2013년, 그녀는 자신의 성매매 경험을 쓴 『페이드 포 Paid For』를 출간하여, 성매매 현장에 어떤 폭력과 위계들이 존재하는지 꼼꼼이 기술하였다. 이 책은 2019년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되었다.

 

책에서 레이첼 모랜은 성매매여성이 성매매를 수행할 때, 원치 않는 성교와 폭력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해리(解離, Dissociation), 즉 현실에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이 해리는 성매매여성이 가명을 쓰는 관행에서부터, 성구매자에게 자신의 진짜 성격이나 취향을 되도록 알리지 않는 것, 나아가 폭력을 쓰는 성구매자 남성을 만났을 때 축 늘어진 채 저항하지 않는 것 등 다양한 국면에 활용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한편 이러한 대응이 지속되는 경우, 당사자는 "자신의 감정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과정에서 "참된 자아가 매우 모호해"지고, 따라서 "자기 자신과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관계"를 겪게 된다고 한다. 또한 성매매를 할 때 자기 자신을 그 상황에서 분리하는 습관은, 성매매여성 스스로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섹스 중에 "성적으로 (자신을)'차단'하는 습관"이 지속될 경우 성매매가 아닌 다른 형태의 섹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했다.1)

 

그녀는 22세가 되던 1998년에 탈성매매하였고, 이후 아일랜드 사회에 "통합"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더블린시티대학 진학에 성공하였고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그녀는 오랜 기간을 거친 후에, 비로소 자신이 거리에서 "사생활"과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내가 단순히 여성으로 인식된다는" "고요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2)

 


1) 레이첼 모랜, 안서진 역,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안홍사, 2019, 217-231쪽.

1) 레이첼 모랜, 안서진 역,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안홍사, 2019,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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