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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8 - <란위>
2017-02-24 오후 16: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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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월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8 - <란위>

 

 

 

* 수만 개의 삶과 사랑, 아픔과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매력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겨봅니다.

특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삶이

내 삶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느낌은 배가 되죠.

소식지팀에서 독자 여러분께 손을 내밀어봅니다.

영화로 만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이야기든 소중하게 담아 함께 풀어내보려고 하거든요.
독자 여러분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영화가 되어 지금, 펼쳐집니다.
(기고글 보내실 곳: 7942news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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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인생 밑바닥에서 만난 남자아이 덕분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해피 투게더>라는 영화에 먹먹한 마음으로 흐느끼며, 그 아이를 보고 싶어 눈물젖은 일기로 하루하루 꿈길을 걷던 경험을 한 지 15년이 되던 해였다. 그 동안 마음은 또 다른 곳으로 흘러 날 좋아해주는 사람- 여자도 만나보고, 이게 진짜 연애라며 착각하고 살았었다. 여자친구와 같이 있을 땐 참 좋다고 생각했으나, 혼자 있을 때의 관심은 온통 남자, 남자 몸, 남자들의 섹스에 가 있는 이중생활이 그렇게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남자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게 바로 영화 <란위>였다. 처음에는 중화권 영화라는 정보에 <해피 투게더>를 자연스레 떠올렸고, 낯선 배우들의 조합이 어떻게 뽑혔을지 상상이 잘 안 됐다. 그러나 이게 웬일, 한동안 퀴어영화에 흠뻑 빠져있던 때라 감성충만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에 만난 이 영화는 나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한동을 향한 란위의 절절한 사랑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 휘저은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비밀리에 남자들을 만나지만 그저 한때일 뿐이라며 헤어짐에 익숙한 한동과, 시골에서 올라와 돈을 벌기 위해 게이바에서 만난 첫 손님 한동에게 푹 빠진 란위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극적으로 펼쳐진다. 개방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적 개혁과 1989년 터진 천안문 사태 등, 중국 사회의 혼란과 동요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절묘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이 나는 참 슬펐다. 그때는 란위의 상황과 심정에 감정이입해 결혼한 한동을 원망하기도 하고, 결국 다시 찾아온 그를 말없이 받아준 란위가 미련해보이기도 했는데. <란위>를 본 후로 그 여운이 걷잡을 수 없이 길어 참 힘겨웠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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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제일 친한 친구의 커밍아웃으로 눈을 번뜩 뜬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내가 나를 속이고 살 수 있을까? 과연 이렇게 사는 것만이 정답일까?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그런 마음에 용기를 내어 처음 나간 모임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온통 남자뿐인 그 곳에서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가슴 벅차게 지냈다. 그러다가 어떤 형에게 푹 빠져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같이 있으면 참 행복하고, 곁에 없을 때는 너무 그리워 아린 마음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던 날들. 결국 형에게 애인이 있는 걸 알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보았기에 그 감정에 더 충실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 후 나는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내 인생에 남자는 없나보다는 생각으로 다시 세월을 보냈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 지극히 곁에서 사랑해준 한 여자의 마음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 또한 참 순수하고 좋은 존재였으나, 한번 남자 맛을 본 마음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게이 야동을 보고, 만남 어플을 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마침 지금의 애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에게 차가운 이별을 통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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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그때 지금의 애인이 아닌 그녀를 택했더라면, 나는 행복했을까? 한동안은 자괴감에 빠졌었다. 나 하나 좋자고, 내 마음이 먼저라고 자위하며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마지막을 고했으니까.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말에 도저히 눈을 맞추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인으로부터 처음 친구사이 활동을 제안받았을 때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바뀌어 있다. 그녀를 택했더라도 나는 나름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어디선가 여전히 이쪽 세계를 탐하고 있었으리라.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어찌할 수 없어 허덕였을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사는 게 결국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라고 본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 또한 내가 끌어안고 가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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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애인을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그 전까지의 나는 누구도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없는 몹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관계에 쉽게 질렸고, 사랑이 끝나간다고 느낄 때쯤엔 마음이 돌같이 굳어 있었다. 그러나 진솔한 만남에 물들고,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아끼게 되었다. 당신이 좋은데 이유는 없었다.

 

최근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한동에게 시선이 갔다. 이성애-혈연중심 관계를 정상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한동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란위에게 돌아갔을 때 말없이 그를 안아준 덕분에, 한동의 마음에는 란위가 영원히 남아있게 된 게 아닐까.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성적지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거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분들에게, 한번뿐인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을 꿈꾼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란위>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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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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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88 2017-02-27 오후 13:14

문득 후회하지 않아가 떠올랐는데 한번 챙겨봐야 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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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2017-02-28 오후 15:52

내가 기억하는 건, 영화 내내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화면이랑 마지막 장면 뿐인데 다시 한번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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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보 2017-03-22 오후 12:14

아주 오래전. 그때 그 느낌이 새록새록 가슴 속에서 올라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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