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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4 : 50-60년대 언론에 소개된 트랜스젠더, 간성, 남장여자/여장남자
2015-05-30 오전 01: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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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5월 
시간 사이의 터울 #4 
: 50-60년대 언론에 소개된 트랜스젠더, 간성, 남장여자/여장남자
 
 
 
 
0. 들어가며
 

 

"6.25 전에는 국민학교 6학년 여학생이 역시 수술 끝에 남자가 되어 중학교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 「여적」, 『경향신문』 1955.8.30., 1면.

 

 
동성애자가 그러했듯이, 트랜스젠더 및 간성 또한 과거부터 존재했습니다. 더불어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개념과는 사뭇 다른 남장여자, 여장남자들도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성전환수술 또한 최소 1950년 이전 시기부터 한국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이 기사로 확인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대 사회를 통해 규정된 남/녀의 성별 규범성에 영합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깨뜨리는 의미를 지녔고, 이를 다룬 언론 기사는 이러한 '파열'의 충격과 반향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물론 트랜스젠더, 남장여자/여장남자, 간성을 다루는 당시 기사에서 실제 그분들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완벽히 복원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분들을 바라보는 언론의 기이하고 악의에 찬 시선들 속에서, 그분들이 감수해야 했던 시대의 제약과 한계, 나아가 그분들이 처했던 사회적 '존재조건'의 일부는 파악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과거의 환경과 조건들을 살피는 가운데, 과연 지금에는 그것이 얼마나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는지를 직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로는 일제 시기, 50-70년대에 걸친 트랜스젠더, 남장여자/여장남자, 간성 관련 일간지·주간지 기사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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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화제 : 여장남자, 서울서만 보름동안 세명 발각」, 『조선일보』 1963.2.1., 조간 7면.
 
 
 
1. 성정체성의 구분
 
먼저 트랜스젠더와 남장여자/여장남자, 간성의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아는 사람에겐 뻔한 설명일 수 있을 내용을 여기서 반복하는 이유는, 후에 언급하겠지만 '과거의 기사'를 통해 '과거'의 분들로부터 이러한 각각의 정체성을 구별하는 데에 일정한 제약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란,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사람을 일컫습니다. 하여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을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으되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은 FTM(Female-to-Male) 트랜스젠더라 부릅니다. 반면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라 부르는 여장남자/남장여자의 경우는, 취향 혹은 기타의 이유로 이성의 복장을 착용하는 이들을 일컫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는 일정하게 분리된 채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와는 분리된 개념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성(intersex)은, 염색체, 호르몬 혹은 생식기 상으로 생물학적 남성/여성으로 구분되기 힘들거나 두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1) 이러한 일련의 용어들은 이처럼 각기 다른 정의와 그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위 용어의 개념과 내용을 혼동하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화된 구분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대중에게 각인되기 시작했고, 아직도 위 정체성 범주를 헛갈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더욱이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과거의 사례에서는 그런 경향이 훨씬 심합니다. 트랜스젠더, 간성, 여장남자/남장여자, 심지어 동성애자의 경우에도 당시의 언론은 이를 뭉뚱그려 '중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당사자 스스로도 저런 정체성 구분을 알고 자신을 정체화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 기사에서 기자들이 캐묻듯이 묻는 질문에 당사자가 자신의 정체화의 전모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충분합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과거의 사례, 그것도 과거의 '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 사례 속에서 앞서 언급한 성정체성의 구분을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경우에 따라선 부적절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울 용산서는 11일 미O사단 「W.하링」 상병을 절도 혐의로 검거했는데-.
...「하링」 상병은 11일 자정쯤 용산 「어메리커·클럽」에서 춤을 추다 위안부 任모양(21·이태원동)과 사귀어 任양 집에서 잠을 자다 任양이 양성인 것을 알고 화가 치밀어 任양의 옷가지 20여점을 훔쳐 달아난 혐의-.
...영화 「육체의 길」에서 서커스·걸로 단역을 맡았던 任양은 3년 전 성전환수술을 받은 것이 잘못되어 양성을 갖게 됐다고-. (강조-인용자)
- 「돋보기 : 美병이 위안부 옷가지 훔쳐」, 『경향신문』 1969.4.11., 7면. 
 
 
▲ 위 기사의 "임양"은 과연 트랜스젠더일까요, 간성일까요, 아니면 여장남자일까요? 또는 그걸 알아내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만 앞서 언급한 성정체성의 정식화에 대해, 각각의 구분을 아쉬운 대로 시도하려고 했던 일제 시대의 기사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변장하는 심리"라는 제목으로 1938년 2월 5-6일 『동아일보』에 연재된 기사에서는, "병적 변장"의 일환으로 "정신병적 변장자"와 "변태성욕적 변장자"를 분리하고 있고, 또 "변태성욕적 변장자"는 "신체적구조가 생리적으로 발달되어있지 않"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의 원인은 "거의 생리적"이지만 "환경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 구분된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간성의 개념 분화가 희미하게나마 일어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더불어 기사는 이같은 "변장증"과 "동성상애증"(동성애)이 같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주장의 근거로 독일의 성과학자 "히류슈후에토"(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1896-1933)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성 양태는 과거부터 존재해왔지만, 그것을 일정한 '과학적' 기준으로 구별함으로써 성정체성을 '발명'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성과학이 계기가 되었는데,2) 위 기사는 이렇게 '발명된' 성정체성 관련 지식이 일제 시기 조선에도 전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성상애증에 잇는 변태성욕자가 반듯이 이성의 풍속으로 변장하는 것도 아니다. 즉 동성상애증의 연구대가 "히류슈후에토"는 동성상애증과 변장증과는 다같이 변태적이나 그 본질에는 相違가 잇다. 변장에 의하야 성감을 가지도록 변장욕이 강하나 동성상애의 경향이 없는 것이 다소 잇다. (....)
요컨대 실제의 변태성욕적 변장이라고 하는 것은 생식선으로부터 분비되는 "호르몬"의 일종의 惡戱인 이것이 만타고 하엿다. (...) 그러나 이것은 거이 생리적이지만 환경의 영향 등으로 인하야 동성상애가 배양되어 변장의 취미를 갖게 하며 마침내는 병적 경향으로 고정되는 수도 잇으니 이 위험기는 대개 破苽期 전후의 연령이라고 한다. 이 연령의 남녀는 깊은 주의를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강조-인용자) 
- 一記者, 「변장하는 심리(하)」, 『동아일보』 1938.2.6.,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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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만평」, 『경향신문』 1963.3.6., 1면.
 
 
2.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
 
이제 본격적으로 과거의 기사 속 사례들로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여장남자, 혹은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여장의 동기
 
당연한 말이지만 여장남자의 존재는 일제 시대때부터 드러납니다.3) 기사에서 취급된 여장의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출국·도항을 쉽게 하기 위한 변장의 목적부터,4) 극단에 들어가 여장남자역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경우,5) 또 버스 여자 차장으로 근무했다가 여장남자임이 발각되어 해직된 사례 등이 존재합니다.6)
 
그러나 기사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접대부, 쇼걸, 성매매여성으로 일하다가 발각된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입니다. 이에 관한 기사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통틀어, 그 내용을 일일히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숱하게 소개됩니다.7) 그 중에 언론에 특별히 힘주어 보도된 것만 소개하면, 먼저 1950년 2월 7-8일 양일에 걸쳐 음식점 개풍옥(開豊屋)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여장남자임이 발각된 조영희(趙榮熙, 19)씨의 르포 기사가 『경향신문』에 실립니다.8) 위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부친과 모친이 함께 인터뷰를 했고, 조씨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생계를 위해 여장을 하고 접대부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9) 또한 1963년 1월과 2월 사이에는 서울 시내에서 도합 세 명의 MTF 트랜스젠더가 경찰에 붙잡히는 일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생활난 속에서 접대부 일을 했으며, 그들은 남자 상인, 미군 등과 연애경험이 있었고, 자신을 "여자"라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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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연필 : 여장 26년의 중년」, 『조선일보』 1969.12.7., 조간 7면
 
 
한편 1969년 12월에는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노인과 연애 및 동거를 하다 적발된 김선영(38)씨의 사례가 『조선일보』, 『경향신문』,11) 『선데이서울』에 각각 보도됩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여성스러웠으며, 처를 잃고 딸도 없었던 아버지가 그를 '딸처럼' 길렀고, 12살 때 집을 나가서 그 때부터 여장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20살이 되면서 술집에서 일하며 인기를 끌다가 "퇴역할 나이에 접어들"고 난 후는 음식점을 전전했으며, 종내엔 경로당의 노인에게 의탁하고 여관에서 노인과 한 방을 쓰다가 아들의 신고로 경찰에 적발되게 됩니다. 경찰에서 그는 "아버지같은 분이어서 부녀의 정을 나눴을 뿐"이라고 술회했습니다.12)
 
굵직한 예 세 개만을 보았지만, 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로 접대부 등 성산업과 대부분 연관돼있는 그분들을 묘사할 때 여성스런 외모, 목소리, "교태" 등이 강조됩니다. 둘째로 큰 기사에서건 쪽기사에서건 어김없이, 그분들의 여성스런-혹은 덜 여성스러운 외모를 찍은 사진이 거의 반드시 첨부됩니다. 당시 언론이 얼마나 이런 분들을 적극적으로 가십으로 소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세번째로, 사례 별로 차이가 있지만 기사 속 여장의 동기에 대해 "생계"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여장남자와 MTF 트랜스젠더를 기사 안에서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데, 이 사정에 대해 다음 절에서 좀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군의 '하우스.보이'도 하고 구두닦이 장사꾼 등 먹고 살기 위해서 갖은 일을 다해보았다는 이군이 치마저고리와 붉은 '코트'를 입고 밤거리에 나선 까닭이 돈 때문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변태성욕자인 까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하지 않고 있다. (강조-인용자) 
- 「잡혀들은 가짜 미인, 청년이 여장」, 『조선일보』 1960.4.2, 석간 3면.
 
 
 
 
2) '예쁨'의 시민권
 
언론에서 다뤄지는 여장남자, 트랜스젠더의 여장 동기에서 한가지 더 두드러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입니다. "돈벌이에는 여자로 되는 것이 좋을 듯 싶어서",13) "남자로는 취직이 안돼",14) "궁한 끝에 여장을 했"고,15) "여자 행세를 하니 세상 살기가 참 쉽"고 "즐겁더라"는16) 이야기들입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살기 편"하다는 이러한 인식은17) 당사자와, 당사자를 보도하는 언론 모두에게서 나타납니다. 물론 '정말로' 당시 남자보다 여자가 살기 편했을까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는 앞서 본대로 이들의 직업 선택이 거의 성산업과 연결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다못해 여성은 최악의 경우 '웃음'이라도 팔 수 있다는 논법" 위에서 그나마 성립 가능한 말이었을 뿐입니다.18)
 
더불어 여장남자, 트랜스젠더 모두가 성산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그런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으려면, 누가 봐도 완벽한 '여자'처럼 보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트랜스젠더 스스로 정체화한 성에 최대한 근접하는 의미에서의 패싱(passing) 이외에, "손님"에게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완벽히 속여야 하는 직업상의 의무가 그분들에게 강제되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신문지상에 보도된 여장남자의 사례들은, 대부분 그런 정체성과 직업상의 패싱에 성공하지 못한, 당사자들로선 한없이 수치스러웠을 아웃팅(outing)의 순간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얼핏 여자로 보였으나', '결국 정체가 탄로나기까지'의 서사를 언론은 아주 흥미있는 필치로 소개하면서, 끝내 패싱에 실패했던 그들의 모습을 사진과 함께 쐐기박듯 매번 전시해놓았던 셈입니다. 
 
 
 
 
뺨에 연주를 찍고 화장을 하고 여자 의복으로 접대부 행세를 하고 웃음을 팔고 다니다가 지난 1일 각 음식점 접대부 일제 취체에 적발되어 2일부터는 남자로 재출발시키고 있는 것이라는데
- 「화제의 주인공 趙榮熙군 까까중 접대부」, 『경향신문』 1950.2.4., 2면.
 
지난달 31일 밤 당지 모 직장 직원이 文과 더불어 만취토록 술을 마신 끝에 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 것인데
- 「화제의 여장한 남자」, 『동아일보』 1956.11.10., 3면.
 
술이 만취한 어느 손님이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 「병신년 뉴스 其後 소식(9) 여장의남자 文錦成군」, 『동아일보』 1956.12.13., 3면.
 
12일 밤 손님에 의하여 남자인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 「여장남자가 접대부 노릇, 기피자로 구속」, 『동아일보』 1959.8.13., 3면.
 
장사동 사창지대에서 이모(32)씨를 붙들고 잠자러가자고 아양을 떨다가 남자임이 탄로되었다고
- 「잡혀들은 가짜 미인, 청년이 여장, 『조선일보』 1960.4.2., 석간 3면.
 
도중에 손님들이 자기를 직접 상대하려 들자 "X부에 질병에 있는데 계간이면 된다"고 말한 후 남자들을 상대하였다는 것이다. 
- 「여자로 변장한 청년 펨푸노릇하다 피체」, 『동아일보』 1960.4.3., 3면.
 
이군은 전농동 시장 뒷골목에서 접대부 노릇을 하다가 '베일'이 벗겨져 경찰에 구속,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됐다.
- 「거리의 화제 : 여장남자, 서울서만 보름동안 세명 발각」, 『조선일보』 1963.2.1., 조간 7면.
 
이 곳에서 李군은 어느 술취한 남자에게 그만 본색이 탄로나서 더 있을 수가 없었다.
- 「女裝男人 "루지"를 지어본다」, 『경향신문』 1964.4.9., 7면.
 
하룻밤을 같이 지내려고 했는데 「브래저」 밑으로 앙상한 갈비가 드러나 불을 켜봤더니 여장한 남자였더라고... 
- 「돋보기 : 정체 드러난 여장 접대부」, 『경향신문』 1966.5.23., 7면.
 
변장생활은 한 곳에서 오래 계속되지가 않았다. 탄로가 나면 손님들의 매를 맞는 일도 일쑤였다. 술집을 전전했다. 
- 「뉴스의 배후 : 춤추고 장고치며 女裝한 채 26년 - 경로당 노인을 반하게 한 여자 아닌 여자」, 『선데이서울』 65, 1969.12.21.
 
지난 16일 밤 그에게 연정을 품은 단골손님 姜모씨(35)와 실랑이 끝에 남자인 것이 들통나 그만 경찰 신세.
- 「성불구 청년이 여장 접대부 노릇」, 『경향신문』 1972.2.19., 6면.
 
 
 
이렇듯 성산업에 종사하는 MTF 트랜스젠더, 혹은 여장남자에게 "여자처럼 보이는 것"은 정체성을 보전하기 위한 핵심이자, 경제적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본 수많은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의 기사처럼, 그런 필수불가결한 생존 조건을 갖추는 데 누구나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남자보다 여자가 살기 편"하다는 말의 숨은 속뜻이 되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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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 : 「남자는 안팔려」, 『동아일보』 1963.2.18., 6면. 
中 : 「남자는 안팔려」, 『경향신문』 1963.3.11., 6면. 
右 : 「여자가 더좋아」, 『경향신문』 1965.6.17., 2면.
 
 
한편, 신문지상에 여장남자의 사례가 속속들이 소개되자, 이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기에 이릅니다. 바로 임권택 감독(!)이 1963년 제작한 『남자는 안팔려』라는 영화로, "여존남비의 사회현상"을 풍자했다는 홍보문구와 함께 개봉한 코미디영화였으며,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출연했습니다.19) 또한 1965년에는 유사한 컨셉으로 김기풍(金基豊) 감독의 『여자가 더좋아』라는 영화가 개봉하였으며, 코미디언 서영춘씨가 출연했습니다.20) 이 영화가 개봉한지 불과 2주만에, 『조선일보』에는 이영길(李永吉, 24)이라는 이름의 MTF 트랜스젠더의 소식이 실립니다.21) 이분은 미군 상사의 자녀로 입양되어 도미했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후 의부에게 버림받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다가 "비밀의 「베일」이 벗겨져" 입국하게 된 것이었는데, 코미디언 서영춘씨가 이분을 돕겠다고 나서 무대에 함께 선 것이 신문에 대서특필됩니다. 故 서영춘씨는 『여자가 더좋아』에서 여장남자의 역을 맡았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이분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술회합니다.22)
 
영화 홍보를 위한 전략이었는지 진심이었을지를 떠나서, 앞서 살펴본 여장남자, 트랜스젠더 분들이 생계의 어려움과 성산업에 내몰려있던 것에 비할 때, 당대 최고의 연예인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던 이분은 당시 MTF 트랜스젠더로서는 그나마 출세한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하리수씨 이전에도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완전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린 MTF 트랜스젠더가 1965년 시점에 존재했다는 것은 퍽 새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놓고 보면, 이분이 이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누가봐도 "분명한 여성"처럼 보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MTF 트랜스젠더가 예쁜 여자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의 존재기반과 계급적 위치가 튼실해졌다는 것은, 반대로 당연히 존중받고 보장되어야 할 인권과 생존권의 가치가 가변적인 "미모"에 위험천만한 형태로 매달려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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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무대에 선 스트립퍼. "소망은 빨리 성전환 수술을", 미국서 돌아온 李군」, 『조선일보』 1965.6.26., 조간 3면.
 
 
3) 여장남자의 장발단속 - 퇴폐의 낙인
 
유신 전야였던 1970-72년에는 전국적으로 "퇴폐풍조 일제단속"이 벌어집니다.23) 이른바 "풍속 사법"이란 이름으로 남성의 장발, 여성의 과잉 노출 등을 규제하고, 검거된 이들을 강제삭발, 즉심 회부 등에 처했으며, 1972년에는 "히피족" 10,300명이 강제 삭발조처를 당하는 대규모 단속이 행해졌습니다.24) 앞서 보았던 여장남자, 트랜스젠더들도 이런 살풍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국내 성소수자 관련 기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그나마 발견되는 것이 이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의 피검 기사입니다.25) 그들은 성매매 중 '여자'가 아님이 들통나거나,26) 장발 단속에 걸려 여장남자임이 아웃팅되고 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27)
 
또한 이 시기는 이태원 등지의 "군 위안부", 성매매 여성 중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가 "중성"이란 이름으로 여타의 성매매여성과 분리되어 집중 비난된 시기이기도 합니다.28) 그들은 주로 성매매여성의 자조모임(장미회)에 협조하지 않고, "미군 손님"을 상대로 절도를 일삼으며, "포주" 일까지 겸하는 등 "「텍서스」촌의 암적 존재"로 낙인찍히기에 이릅니다.29) 이에 당시 성매매업을 하기 위한 필수 서류였던 건강진단서(보건증)이 없다는 이유로 여장남자 "접대부"를 검거하거나,30) 여장남자 "접대부"를 상대로 건강진단서를 발급해준 성병진료소 소장이 입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31) 이처럼, 젠더에 따라 편제된 생존의 길에서 생계의 수단으로, 혹은 성정체성 실현의 방법으로 성산업을 택했던 여장남자·MTF 트랜스젠더들은, 국가와 사회가 쳐놓은 퇴폐의 굴레에 언제든 걸려들 수 있는 위험한 위치에 처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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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포된 남장여공비 鄭順德」, 『경향신문』 1963.11.16., 6면.
 
 
 
3. 남장여자, FTM 트랜스젠더
 
다음으로 남장여자, 혹은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장의 동기
 
남장여자 또한 일제시대 기사에서부터 그 존재가 확인됩니다.32) 기사에 나타나는 남장의 동기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남학생만 모집하는 학교에 남장을 하고 입학한 경우를 비롯,33) 사회주의 운동 및 여타의 목적을 위한 변장 등이 있고,34) 방랑 중에 남자의 "악마같은" 성화를 피하기 위해,35) 혹은 외판원 영업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하기 위한 '남장'이 나타납니다.36) 그러나 무엇보다 빈번히 나타나는 것은 '남장강도'에 관한 기사로, 일제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 남장을 한 여성들의 강도·절도가 발각, 검거된 기사들은 줄기차게 이어져,37) 그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 곤란에 의해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기사화됩니다.  
 
나아가 1959년에는 무려 남장여자가 군에 입대하여 상등병까지 진급했다가 정체를 들켜 제대당하는 일이 있었으며,38) 같은 해에는 "나니아"(!)라는 여두목을 둔 남장 여해적단이 부산 지역에 출몰했다는 판타스틱한 이야기가 보도됩니다.39) 1960년에는 "백골단"이란 이름의 남장 "소녀 깡패단"이 밤시간 서울에서 활동했다는 기사가 있고,40) 1963년에는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남장 무장공비" 정순덕(鄭順德, 28)이 생포된 일이 보도되었습니다.41) 심지어는 1961년 병역의무를 대신하기 위한 국토건설단원 징집에 남편 대신 아내가 나가 신체검사를 받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되겠기에 자원입대하였다고 밝혔고, 『동아일보』는 이를 "순정과 순결이" 모두 보전된 케이스로서 이 사연을 "좋은 모범주부형"으로 극화하자고 추켜세우기도 합니다.42)
 
그 가운데 여장남자와 같이 성산업에 종사했던 남장여자의 경우도 발견되는데, 이태원에서 성매매 여성인 김미자(金美子)씨와 "동서생활"을 하던 정순자(鄭順子, 35)씨의 예가 그것입니다. 정씨는 동료 성매매여성과 짜고 미군을 집으로 유인한 뒤에 "왜 내 처와 자느냐"고 협박, 물품을 절도하다 경찰에 검거되었는데, 기사에서 그는 "늙거나 남자에 절망한"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 "남장 바람"이 일고 있고, 자기 외에도 수명의 "남장여인"이 "처"를 데리고 산다고 밝혔습니다. 또 그는 남장을 하고 다니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옷차림에 돈이 덜 들고", 둘째는 "사내들의 속이 보이는 유혹이 없고", 셋째는 "몸을 팔지 않아도 되어" "돈 벌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습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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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고랑찬 남장여인 - 양공주 출신의 3인조, '처' 데리고 미군 등쳐」, 『조선일보』 1964.3.3., 조간 6면.
 
 
2) 남장여자를 다룬 문화창작물
 
다음으로 남장여자를 다룬 영화, 국극, 드라마, 소설 등도 광범위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우선 국극, 국악극에선 일찍부터 남장여인이 배우로 등장하였는데, 이들 "남장낭자군"은 "서민층, 특히 중년 이상의 여성팬", 혹은 "소녀층"에게도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44) 이런 국극들은 1950년 이후 다른 매체에 의해 점점 사장되고, 남장여자 배우도 차츰 여성으로 바뀌어가게 됩니다.45) 하지만 남장여자 배우로서 인간문화재의 지위까지 오른 박귀희(朴貴姬)씨의 경우 여학생들의 혈서도 많이 받았었고, 심지어는 8.15해방 전 만주에서 「一目將車」란 창극을 공연할 때 "한국여자 30명"에게 납치를 당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46)
 
남장여자를 다룬 연재소설도 창작되었습니다. 윤백남(尹白南) 작가의 「미수(眉愁)」가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한편,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정협지(情俠誌)」, 1971-7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통곡(慟哭)」에서 남장여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1972년 『동아일보』의 「홍길동」과 1976년 「연개소문」에도 소설 중 남장여자가 등장하는 설정이 있습니다. 또한 1954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기독교 박해를 다룬 박계주(朴啓周) 작가의 소설 『구원(久遠)의 정화(情火)』에는 남장한 신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이는 이듬해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이만흥(李萬興) 감독이 연출하였고, 남장여자 역으로는 배우 한근진(韓銀珍)이 출연한 바 있습니다.47) 그밖에 악단 공연으로는 "이난영악단"이 「남장미인」이란 공연을 열었고,48) 국극으로는 서울민족가극단이 「남장미녀와 검객」이란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49) 마지막으로 남장여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 TV드라마로는 TBC의 「옥피리」(1975), 「매화」(1975), MBC의 「옥녀」(1978) 등을 들 수 있습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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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久遠의 情火」, 『경향신문』 1956.1.23., 4면.
 
 
 
이렇게 여러 매체와 다양한 작품 속에서 남장여자가 끊임없이 재현되었던 데에는, 남장여인 캐릭터에 대해 일종의 성적 호기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전형'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암시됩니다. 더불어 그 성적 호감을 느끼는 주체는 앞서 국극의 예처럼 여성이었던 경우도 있지만, 남성이었던 경우가 좀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을 드러내는 1935년작 소설 「미수」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남복한 미인(남장미인), 이 말 한마대는 육욕의 아귀가 된 양원의 호기심을 끄을기에 충분하엿다.
- 尹白南, 「眉愁 (4)」, 『동아일보』 1935.4.5., 3면.
 
楊元은 가슴에 타올르는 정욕의 불ㅅ길을 어이하면 조흘지 모른다는 듯이 눈ㅅ살을 찌프리고 화를 벌컥 내며 (...) 『남장미인인가 무슨 얘인인가 찾어 바친다던가 못헌다던가 무슨 악휘를 지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장영을 노리어본다.
- 尹白南, 「眉愁 (59)」, 『동아일보』 1935.7.7., 3면.
 
 
 
 
3) 계급적 남장
 
이렇듯 남장여자는 문화창작물에서 자주 다뤄졌고, 실제 남장여자의 경우에도 남장의 동기가 여장남자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계급적 분포도 상대적으로 다양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상위 계급에 해당되는 사례들을 일별하고자 합니다.
 
먼저 "유한마담", 즉 돈많은 여성이 심심풀이로 남장을 했다 적발되는가 하면,51) 아예 "아들을 갖고 싶은 부모의 간절한 바람으로" 집에서 남성으로 길러진 남장여자의 사례도 존재합니다.52) 그러나 무엇보다 수트를 차려입고 고위공직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유명 기업 부사장이라 자신을 속이고 돈을 가로챈 1961년의 사기사건이 단연 주목되는데, 사건의 주인공은 이을선(李乙善, 27)씨입니다.53) 그는 여종업원에게 접근하여 성적 관계를 맺기도 하였으며, 남장의 이유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편해서"라고 설명하였습니다.54) 사기를 칠 수 있을 만큼 고위층과 연줄이 있고 이른바 '큰일하는 사람'으로 행세하기에는, 남자로 분하는 것이 나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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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여자 정치인 김옥선 의원. (「救濟된 오직 한사람」, 『동아일보』 1968.6.8., 1면.)
 
 
나아가 3·4공화국기 3선 국회의원 김옥선(金玉仙)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옥선 의원은 1960년에 처음 민의원에 입후보한 이래 공공연한 남장여자 정치인으로 언론에 알려졌으며,55) 1965년 충남 보령 지역구에 민중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 60-70년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합니다.56) 김의원은 "정치와 연애"한다고 하여, 적어도 신문기사상으로는 정무 이외 여타의 사람과 성적관계는 맺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됩니다.57) 그는 자신에게 '남장'을 "들먹이는" 것을 싫어했고, 남장 이유에 대해서는 "세상 살아가자니 이렇게 차리는 게 편했"다고 술회했습니다.58) 1960년대에 남장여자 국회의원이 활동했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수 있는데, 이러한 남장여자의 정치활동 시도는 김의원의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60년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김갑임(金甲任, 28)씨도 남장여인으로 출마하였다 낙선한 예가 있습니다.59)
 
당시 성소수자들의 처우를 생각해볼 때, 남장여자 정치인의 명실상부한 지위는 기이한 구석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론 여성이나 '사회적으론' 남성임을 자신과 대중들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광경은, 앞에서 본 성소수자의 예들과는 판이하게 비춰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정치·사회·경제적 권력에서 남성이 점유할 수 있었던 모종의 상층적 지위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즉, 그들이 취한 사회적 입지 덕에, 그들의 섹슈얼리티가 더이상 문제로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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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의원에 출마했던 「남장밀항여인」이 귀국」, 『동아일보』 1962.6.26., 3면.
 
 
 
4) 남장여자, 레즈비언, FTM 트랜스젠더의 구분선
 
이러한 까닭에, 남장여자냐 FTM 트랜스젠더냐의 여부를 언론 기사를 통해 구별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가령 여장남자와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 만약 여장의 맥락 안에서 당사자가 그 속에 성적인 의미를 담고, 그렇게 정체화된 성으로 다른 이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경우를 서툴게나마 MTF 트랜스젠더라 정의한다면, 기사 속 대부분의 여장남자들이 MTF 트랜스젠더로 분류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상당수가 '이미' 섹슈얼리티와 필연적으로 연결된 성산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 이후엔 언론이 채 포착하지 못했을, 개인의 '내면' 속 정체화의 전모는 무엇이었느냐는 불가능한 영역 속으로, 그 구분의 질문은 넘겨지게 됩니다. 
 
반면에 남장여자와 FTM 트랜스젠더의 경우, 아까의 서툰 기준으로 트랜스젠더 구별을 적용해보면, '남성'으로서 여타의 여성을 만나 관계했다고 보도되는 몇몇의 사례를 제외하면60) 모두 FTM 트랜스젠더가 아닌 남장여자로 준별되게 됩니다. 물론 이 기준은 섹슈얼리티를 개인의 직접적인 성적 행위로만 감별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했듯 '서툰' 구별이고, 가령 남장을 통해 누릴 수 있었던 사회적 운신의 폭 또한 섹슈얼리티의 범주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굳이 언론에 시시콜콜히 말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에 더욱, 그 이후엔 굳이 '사회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수 있'었던, 개인의 '아랫도리 얘기'의 안개 속으로, 남장여자/FTM 트랜스젠더의 구분선은 넘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재현되는 방식에서 남장여자/여장남자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곧, 섹슈얼리티를 말하지 않'아도 될' 권리야말로 핵심적인 가부장제적 '남성'의 권력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남장여자의 경우 FTM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의 '구분'이 의미없어지는, '남성'의 이름으로 섹슈얼리티의 구분이 '무화'되는 사회적·젠더적 지위에 오르는 것이 핵심이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히 그런 구분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례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1975년에 "남장을 한 처녀신랑"이 여성과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기사입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초원예식장에서는 지난 9일 오전 남장을 한 처녀신랑 천경자씨(32, 청양군 적곡면)와 신부 김순환양(21)이 1백여 하객이 모인 자리에서 동성결혼식을 올려 이채...
...10여년전 사방사업 공사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67년부터 함께 살아왔다는 이들 중 천씨는 1남 12녀의 딸부자집에 7번째 딸로 태어나 위로 언니들은 모두 출가, 논 20마지기와 2천평의 밭을 도맡아 지어온 여장부로...
...천씨는 "이제 네살밖에 안된 독자인 남동생을 훌륭하게 뒷바라지해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돕는 부부가 될 것"이라고 굳은 결의를 표명...
- 「휴지통」, 『동아일보』 1975.1.11., 7면.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거나 그 관계가 파탄났다는 것 외에, 한국에서 하객들을 불러놓고 '생물학적'으로 동성인 커플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록은 이 기사가 최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기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이, 과연 저 "남장신랑" 천경자씨는 레즈비언이었을까요, FTM 트랜스젠더였을까요? 
 
만약 그가 레즈비언이었다면, 우리는 언론에 보도된 한국 최초의 동성결혼식과 그 결혼에 동의해 하객으로 참여한 100명의 대중이라는 전례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앞뒤의 맥락을 살피면 도무지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당사자나 하객들 모두 천씨를 엄연한 '남자'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더 크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그가 사람들에게 '남자'로 비춰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들이 그를 "여장부"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의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천씨의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골몰하다보면, 오히려 그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고 그보다는 다른 것이 더 중요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사자가 레즈비언이냐 트랜스젠더냐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보다, 그가 어떤 계급적 기반과 결부된 '젠더적' 지위에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즉 당시의 '남자'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을 넘어서, 저렇게 뻔뻔스럽도록 '사회적'인 의미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처럼 기사를 통해 다뤄진 남장여자와 여장남자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젠더의 규범성이 얼마나 명징한지를 드러내줍니다. 물론 이는 모든 여자가 남자보다 힘들게 살았다든가, 모든 여장남자가 모든 남장여자보다 힘들게 살았다는 식의 천박한 이야기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개인은 각자의 고통을 짐지고 있고, 어떤 젠더의 구분은 개개인의 섹슈얼리티 수행을 통해 얼마든지 일정부분 완충되고 무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그것과 별개로, 여장남자와 남장여자가 앞서 본대로 젠더의 규범성 속에서 서로 다른 직업 선택의 양태를 보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는 남/녀간의 성차 '권력'이 엄연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 면에서 당시 남장여자·여장남자의 사례를 놓고, 젠더의 성역할, 즉 남/녀다움을 잃어가는 것을 걱정하는 류의 기사는 차라리 귀여운 수준입니다.61) "귀하신 남자"로 태어나 여자 "행세"를 한다고 여장남자를 비판하는 기사를 비롯하여,62) 아래 인용된 기사처럼 남자를 "有, 大, 强"으로 놓고, 여자를 "無, 小, 弱"으로 놓으면서, "'없는 걸 있는 체하는' 남장여자도 역겹지만 '있는 걸 없는 체하는' 여장남자는 더 역겹다"는 식으로 양자 모두를 비판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새된 편견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런 걸 보면, 페미니즘이 결코 없는 소리를 지어낸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남자가 아닌 체 여장한 괴인물 하나가 시내 모 署의 그물에 걸리엇다. 
원래 "체병"이란 사람에게 잇기 쉽고 고치기 어려운 404병의 圈外 末疾이겟다. 
못난이가 잘난 체, 비겁자가 膽勇잇는 체, 모르는 것도 아는 체(즉 一知半解者가 아주 博學多聞한 체), 혹은 어떤 팜프레트 한 책만 주어보아도 무슨 주의자인 체... 등등.
그러나 이 "체병"은 無가 有인 체 小가 大인 체, 弱이 强인 체 등등- 말하자면 소극적이 적극적인 체 하는 "체병"인 時에 특히 눈에 거슬리고 구역이 날 지경.
그러고 이 반대로 有가 無인 체, 大가 小인 체, 强이 弱인 체 등등- 즉 적극적이 소극적인 체 하는 류의 "체병"은 어쩐지 겸손한 맛이 잇어 구수해보이는 것이 일반의 "체병"에 대한 야릇한 제 六感.
然이나 오직 한 가지 예외- 여성이 남성인 체, 이런 류의 "체병"은 아무리 世降俗末의 괴현상으로 한목 접어보아도 어쩐지 고막에 좀 야릇한 촉감을 주는 바이어늘
하물며 남자가 여자인 체 하는 꼴에 이르러서는 한 푼 주고 보라면 두 푼 주고 안 볼 지경. 
然則 문제의 여장남자도 응당 이런 상식적 원리쯤은 해득하엿을 것인데...
구태여 남 보기 실흔 假裝 여자꼴을 지음은 이면에 "체병"을 假裝치 아니치 못할 무슨 사정이 잠재하엿을까?
여기에 사람의 쓸디없는 호기심은 100%로 환기.
그 이면 사정의 여하는 무를 것도 없이 공연이 사람의 好奇癖을 흥분시키는 이것만 하여도 여자인 체 하는 厥公의 "체병" 원인은 특효약을 구하기 어려운 고질임이 분명.
可笑可呵也로다. 난치의 "체병"이여!(강조-인용자)
- 「횡설수설」, 『동아일보』 1938.2.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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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수술을 마치고 여자로변한 백양」, 『경향신문』 1955.9.2., 3면.
 
 
 
4. 간성과 성전환
 
마지막으로 기사에 나타난 간성의 사례를 다루겠습니다. 또한 간성과 함께 트랜스젠더에게도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던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간성
 
사실 앞에서 "중성", "양성"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트랜스젠더의 경우, 실제로는 간성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63) 그러나 우선 여기서는 당시의 기사 속에서 간성임이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로 사례를 한정하여 검토하고자 합니다. 기사에서는 주로 외형상 남녀의 생식기를 다 가지고 있는 사례나,64) 어느 한쪽의 식별이 어려운 경우가 보도됩니다. 또한 이러한 경우 성기를 성형하여 남성, 혹은 여성 등 하나의 성으로 만드는 식의 성전환 수술이 집도되는데, 당시 언론은 이를 유심히 다루고 있습니다. 가령 1955년 6월 최혜숙(崔惠淑, 가명, 16)씨는 여성으로 정체화해오다 남성생식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65) 1955년 9월 백기화(白基花, 18)씨의 경우는 여자로 길러지다가 학령기에 이르러 남자의 외양이 드러나 남자로 "행세"하였고, 이후 다시 남성생식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66) 1962년 12월 박선지(朴仙只, 21), 박선의(朴仙儀, 21) 두 쌍둥이 간성은 여성으로 정체화해오다가 요도하열의 기형을 가진 남성생식기를 보유한 것이 확인되어 남성으로 성전환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67)
 
헌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전환 수술이 원칙적으로는 위와 같이 '생식기'에 이상이 있는 간성에게만 적용되고,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몸'에 "문제"가 있지 않은 경우는 "정신과 치료"가 요구될 뿐 외과시술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물론 의학계의 이러한 방침이 의료현장에서 얼마나 철저히 지켜졌는지는 별도의 문제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방침은 간헐적으로 지면에 소개되고 있습니다.68)
 
 
 
문 : 저는 당년 19세의 청년인데 심리적으로나 색정상으로나 완전히 여성입니다. 절세의 미처녀인들 저에게는 목석과 다름없고 반대로 준수한 청소년을 열렬히 연모하게 됩니다. 근래의 미국 영국 등에와 같이 저같은 사람도 '여성으로' 성전환시킬 수 있는지요? 
만일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수술이 가능합니까? (고통생)
 
답 : 두 가지로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1) "사춘기"의 남자로서 "생식기"에 이상(반음반양)이 없고도 여성에게 관심이 없고 남성에게만 있다면 일종의 "변태성"이고 동성애이니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읍니다. 우선 여성을 자꾸 대하여 보십시오. 
자신도 노력하여야 겠고 친우들이나 주위로 하여금 여성에 호기심을 갖도록 할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준수한 남성과 흡사한 성격 외모를 가진 여성을 찾고 그 여성과 같이 교제하여보시오
(2) "생식기"로 인한 것이면 그 "반음반양"의 정도를 보아 한편으로 수술해버리고 나면 남성이 되거나 여성이 될 수 있지요. 그리고 "성 홀몬" 요법을 계속하여 보시오.
이같은 수술이나 치료는 우리나라에서도 넉넉히 할 수 있읍니다. (보건부 의정국장) (강조-인용자) 
- 「한국서 성전환은 가능?」, 『동아일보』 1955.1.23., 3면.
 
 
 
 
또한 성전환수술이 간성에게만 허가되었다 해서, 간성이었던 분들의 삶이 상대적으로 나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성정체성 인식 이후의 경우에, 여성으로 정체화했던 간성이 결혼 후 남성으로 성전환하는 데 더 적합한 몸임을 깨닫고, 남편측이 남성으로 성전환할 것을 권유했는데도 이에 응하지 않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69) 정체화한 성이 생물학적 성의 향배와 맞지 않을 때 발생하는 스트레스란 극심한 것입니다. 더불어 성정체성 인식 이전의 간성에게 행해지는 성전환 수술도 기사화되고 있는데, 이 경우 수술을 통해 결정된 생물학적 성이 이후 정체화된 성과 동떨어질 경우 당사자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헌데 이 일을 다루는 언론에서는 당사자를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욕심많게도 한꺼번에 소유한 아기"라 조소하면서, 집도 중인 성전환 수술을 가리켜 "성전환수술해도 「남·녀」선택은 본인이 할 수가 없겠군"이라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70) 간성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성전환수술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성전환 관련 기사를 보면, 명백한 간성의 경우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수술비가 없어 곤란을 겪는 상황을 눈물겹게 호소하는 내용이 주목됩니다. 성전환 수술비용은 1959년을 기준으로 15-30만환,71) 1971년 기준 10만원 정도로 큰 금액이었습니다.72) 즉 간성이라고 해서 성전환수술을 아무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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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만평 : 성전환수술」, 『경향신문』 1955.9.2., 3면.
 
 
2) 성전환수술
 
이러한 성전환수술에 대해, 당시 사회는 신기하고도 염려섞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천연의 섭리를 벗어난 지나친 외과적 술법이 인륜 대도를 어지럽힐까"73) 걱정된다는 반응부터, 앞으로는 결혼 전에도 상대방이 성전환한 사람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는 반응도 눈에 띕니다.74) 한편 수술을 원하는 사람 가운데도, 남성이 찾아와 "구직처가 없으니 차라리 '밤의 여인'이 되겠다"며 성전환 수술을 요청하기도 하였고,75) 급기야는 부모가 갓난 아들을 데리고 와 "집에 사내아이만 셋 있으니 이 아기는 여자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사례도 있었습니다.76)
 
이렇게 초창기 성전환수술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지 않은 가운데, 간성이 아닌 트랜스젠더에 대한 성전환수술도 일부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중성",77) "양성", 혹은 "태어날 때부터의 성적 불완전성"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성전환수술 관련 기사 안에서 간성과 트랜스젠더를 뚜렷이 구별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78) 특히 1955년 8월에 국내 첫 남성→여성 성전환수술로 보도된 조기철(趙基哲, 20)씨의 경우, 생식기나 의료적인 내용의 언급이 없고 전형적인 가십성 보도 일색인 것으로 미루어 MTF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시술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79) 또한 앞에서 언급했던, 故 서영춘 코미디언과 같은 무대에 선 MTF 트랜스젠더 이영길씨의 경우도, 그 스스로 "완전한 여자"가 되기 위해 간절히 성전환 수술을 원했으며, 이를 위한 "인술"을 아쉬워한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80) 무엇보다 1975년의 의학계 기사에서 "태어나서 성이 확실치 못한 것을 교정"하는 것과 '다른' 목적의 성전환 수술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81) 위 정황을 보아 어떤 형태로든 이 시기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성전환수술은 시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70년 무렵에 접어들면서 의학계는 성전환수술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계몽시키고자, 성전환수술은 남녀의 성기를 온전히 창조할 수 없음을 강조했고, 이 과정에서 간성에게만 성전환수술이 허용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종래의 주장이 강화됩니다.82) 더불어 간성과 분리된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욕구에 대해 "자궁선망증", "남근선망증"이라 명명하며 비판하고,83) 이것이 당시 기준으로 정신과 질환의 일종임을 분명히 했으며, 트랜스젠더들이 시술받는 호르몬 주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84) 앞에서 보았던 지식권력에 의한 성정체성의 분화가 1970년대에는 임상단계에까지 깊이 침투하였다는 정황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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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 남도 아닌 불완전성, 28세의 '여장행각 14년'」, 『동아일보』 1966.5.28., 7면
 
 
 
5. 나오며 - 지극히 사적인 섹슈얼리티
 
이렇듯 기사를 통해 보도된, 50-60년대를 살았던 트랜스젠더, 간성, 남장여자/여장남자분들의 경험은 참으로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늘의 성정체성의 기준으로 그러한 과거의 사례들을 구분할 때, 섹슈얼리티를 준별하는 행위 '자체'에 가로놓인 지식 권력과 젠더 규범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아쉬운 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젠더의 그물망 안에서 자기가 타고나고 길러온 섹슈얼리티와 화해하며 살아가는 것은 모든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 가운데 위에서 본 트랜스젠더, 간성, 여장남자·남장여자의 경우는 그 안팎으로부터의 긴장이 한층 첨예하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례를 통해, 온전히 개인의 깜냥일 것 같은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거미줄이 얼마나 개인의 손에서 벗어난 형태로 존재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 글에서 과거의 섹슈얼리티를 파는 작업은 오직 그것들 일체를 드러내는 속에서만 정당해지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을 살았던 성소수자분들의 섹슈얼리티를 제국주의적으로 파헤치지 않고 존중하는 길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곧 나의 섹슈얼리티를 존중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위의 기사들과 글들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피해 비교적 안전히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향유하며 살았을 익명의 얼굴들을 저는 더 들추고 싶지 않습니다. 더불어 젠더 규범의 억압이 아무리 심했다 하더라도, 그걸 받아안은 개인이 그 성역할을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비틀어 수행했을 다양한 가능성들을 애써 부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실 섹슈얼리티는 논쟁될 필요가 있지만, 온전히 논쟁되어선 안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섹슈얼리티는 얼마간 사적이어도 좋고, 나아가 사적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전에, 그렇게 사적이어야 마땅할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기 위해, 남의 섹슈얼리티를 캐묻는 위험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28일 밤 10시 30분쯤 서울 을지로 6가 한일은행 앞에서 실신해 넘어져 있는 여장한 중년남자가 순찰중인 경찰관에 발견되어 중앙의료원에 옮겨졌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실신상태로 신음하고 있다. 
여주에 살며 이름을 김봉순(37)이라는 것만이 밝혀진 이 여장남자는 17년전에 여자였으나 성전환수술을 받고 남자가 됐으나 생계가 어려워 그 후에도 줄곧 여장을 하고 식모 살이 등으로 그날그날을 살아왔다는 것인데 나흘 전에 여주를 떠나 서울에 왔으나 먹지 못해 길에 쓰러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강조-인용자) 
- 「또 여장남자. 밤거리에 쓰러져 실신」, 『조선일보』 1963.1.29., 조간 7면.
 
지난 28일 밤 을지로 6가 한일은행 앞길에 쓰러졌던 김봉순(金鳳淳, 37)씨는 10년 전인 27세까지는 버젓한 여자였다. 그러다가 성전환수술을 해서 남자가 됐지만 생활이 어려워 그 뒤에도 줄곧 여자행세를 해왔다는 것이다. 가난한 삶에 시달리다 못해 서울 거리를 방황하다 이날밤 길거리에 쓰러졌다. 경찰은 '메디칼센터'에서 응급치료를 시키고 있는데 김씨는 '비록 성전환을 했지만 나는 여자다. 돈만 있으면 다시 그것을 잘라버리겠다'고 하면서 울부짖고 있다. 
일가친척은 없이 혼자 떠돌아 다닌다는 김씨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한탄하면서 '루즈'칠한 입술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강조-인용자)
- 「거리의 화제 : 여장남자, 서울서만 보름동안 세명 발각」, 『조선일보』 1963.2.1, 조간 7면.
 
 
 
이 두 기사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주인공 김봉순씨는 두 기사 모두에서, 
 10(17)년 전까지 여자였고, 
 그 때 성전환 수술을 해서 남자가 되었는데, 
 그 후로도 줄곧 여장을 하고 살아왔고, 나아가 
 "성전환을 했지만 나는 여자이며 돈만 있으면 그것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김봉순씨는 여자였다가 남성의 성기를 만드는 성전환수술을 했고, 헌데 그 후에도 왠지 여자로 살았다가, 현재는 FTM 성전환으로 만든 성기를 다시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이는 여러모로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인데, 우선
 가난한 주인공이 막대한 비용이 드는 FTM 성전환 수술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설사 그 수술을 했다 하더라도 금세 본인의 성별 정체성을 변심(?)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③ 기자의 오기라고 보기엔, 두 기사가 모두 같은 내용을 쓰고 있어 그렇게 보기도 어렵습니다. 
과연 이 섹슈얼리티에 얽힌 사연의 전모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가장 실체에 근접하는 해답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김씨는 비수술 MTF 트랜스젠더였고, 
② '남성'으로 태어난 자신의 생물학적 성이 너무 싫었던 나머지 자신의 '남성'이 성전환 수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얘기하고는, 
③ 자신이 정체화한 '여성'을 애초 태어났을 때의 성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85)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김씨는 그런 거짓말을 통해 기자와 언론, 세상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끝내 '사적'인 위치에 봉인하였던 셈입니다. 여긴 내 곳이라고, 여기만은 들어오지 말라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아귀같이 캐묻는 사회 앞에서 가장 눈물겹고 아름다운 거짓말로 자신을 지켰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섹슈얼리티를 진정 '사적인' 것으로 향유할 권리가, 과거에 얼마나 특정 계층에만 집요하게 독점되었는지를 드러내주는 슬픈 일화입니다. 
 
-
 
이렇듯, 섹슈얼리티는 끝내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 맞습니다. 더불어 섹슈얼리티가 정말로 온전히 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 앞에서 보았듯 이제껏 돌아가야 했고, 또 앞으로 돌아가야 할 굽잇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도와 공력의 시간이 다하고 난 후에, 이제는 비로소 온전히 사적이어도 좋을, 아무것도 더는 논쟁되지 않아도 될 섹슈얼리티를 간직한 채, 모든 성정체성들이 저마다의 날개로 한점 부끄럼없이 훨훨 날아가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오기를, 이 자리를 빌어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1)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최종보고서』, 2014.10., 138쪽. 이 밖에 크로스드레서 중에도 특히 이성의 복장 및 언행을 취하는 것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을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이라 부르고, 이 경우를 성별 정체성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김학이, 『나치즘과 동성애: 독일의 동성애 담론과 문화』, 문학과지성사, 2013, I부 참조.
3) 「여장한 미남자를 연모한 생도 출학」, 『동아일보』 1929.9.4., 5면 ; 「여장한 미남자 중성으로 판명」, 『동아일보』 1938.2.2., 3면.
4) 「沮止網 넘고저 남자가 여장」, 『동아일보』 1928.1.20., 5면.
5) 「미녀의 정체는 남자, 여급에서 절도로 전락된 남배우, 반한 남자 때문에 발견」, 『동아일보』 1937.9.7., 3면 ; 「여도 남도 아닌 불완전성, 28세의 '여장행각 14년'」, 『동아일보』 1966.5.28., 7면 ; 「고금동석(6) 저승 면회실에서의 李人稙 회견기」, 『경향신문』 1968.1.17., 5면.
6) 「색연필 : 여장 남자 차장… 2년만에 발각」, 『조선일보』 1970.10.25, 조간 7면.
7) 1950-60년대 성산업에 종사한 것으로 확인되는 여장남자, MTF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제의 주인공 趙榮熙군 까까중 접대부」, 『경향신문』 1950.2.4., 2면 ; 「여장미남 「趙군」의 전일담」, 『경향신문』 1950.2.7-8., 2면 ; 「화제의 여장한 남자」, 『동아일보』 1956.11.10., 3면 ; 「병신년 뉴스 其後 소식(9) 여장의남자 文錦成군」, 『동아일보』 1956.12.13., 3면 ;  「『땐서』노릇하다 절도까지」, 『동아일보』 1957.12.18., 3면 ; 「"남자의 행세를 시켜주오", 18세 가짜 처녀 가장 탄로되자 애원」, 『조선일보』 1957.12.22, 석간 3면 ; 「여장으로 5년간 『레지』노릇한 소년, 취직시켜달라고 경찰에」, 『동아일보』 1957.12.22., 3면 ; 「요모조모」, 『경향신문』 1957.12.25., 2면 ; 「여장남자가 접대부 노릇, 기피자로 구속」, 『동아일보』 1959.8.13., 3면 ; 「잡혀들은 가짜 미인, 청년이 여장」, 『조선일보』 1960.4.2., 석간 3면 ; 「여자로 변장한 청년 펨푸노릇하다 피체」, 『동아일보』 1960.4.3., 3면 ; 「잡혀든 가짜여인 새로운 사실 판명」, 『조선일보』 1960.4.5., 조간 3면 ; 「돋보기」, 『경향신문』 1963.1.21., 7면 ; 「색연필」, 『조선일보』 1960.10.21, 석간 3면 ; 「꼬리밟힌 여장청년, 油頭粉面.. 접대부 노릇까지」, 『조선일보』 1963.1.18., 조간 7면 ; 「여장남자" 또 하나, 작부노릇하던 김군, 경찰에 덜컥」, 『조선일보』 1963.1.26., 조간 7면 ; 「또 여장남자. 밤거리에 쓰러져 실신」, 『조선일보』 1963.1.29., 조간 7면 ; 「거리의 화제 : 여장남자, 서울서만 보름동안 세명 발각」, 『조선일보』 1963.2.1., 조간 7면 ; 「女裝男人 "루지"를 지어본다」, 『경향신문』 1964.4.9., 7면 ; 「돋보기 : 정체 드러난 여장 접대부」, 『경향신문』 1966.5.23., 7면 ; 「노인 위로하다 걸려든 여장남자」, 『경향신문』 1969.12.6., 7면 ; 「뉴스의 배후 : 춤추고 장고치며 女裝한 채 26년 - 경로당 노인을 반하게 한 여자 아닌 여자」, 『선데이서울』 65, 1969.12.21., 91-92쪽 ; 「색연필 : 여장 26년의 중년... "영감"을 유혹, 징병검사도 불합격, "요리는 잘해요"」, 『조선일보』 1969.12.7., 조간 7면.
8) 「화제의 주인공 趙榮熙군 까까중 접대부」, 『경향신문』 1950.2.4., 2면.
9) 「여장미남 「趙군」의 전일담」, 『경향신문』 1950.2.7-8., 2면.
10) 「거리의 화제 : 여장남자, 서울서만 보름동안 세명 발각」, 『조선일보』 1963.2.1., 조간 7면.
11) 「색연필 : 여장 26년의 중년... "영감"을 유혹, 징병검사도 불합격, "요리는 잘해요"」, 『조선일보』 1969.12.7., 조간 7면 ; 「노인 위로하다 걸려든 여장남자」, 『경향신문』 1969.12.6., 7면.
12) 「뉴스의 배후 : 춤추고 장고치며 女裝한 채 26년 - 경로당 노인을 반하게 한 여자 아닌 여자」, 『선데이서울』 65, 1969.12.21., 90-91쪽.
13) 「화제의 주인공 趙榮熙군 까까중 접대부」, 『경향신문』 1950.2.4., 2면.
14) 「남대문 여장 남성 식모살이 상경」, 『경향신문』 1971.3.3, 8면.
15) 「휴지통」, 『동아일보』 1963.7.23., 7면.
16) 「여장남자 취객 위혹... 「즉심행」」, 『경향신문』 1980.6.11., 7면 ; 「색연필 : 여장남자 2명 취객 유혹하다 들통」, 『조선일보』 1980.6.11., 조간 7면.
17) 「단상단하」, 『동아일보』 1958.10.2., 1면.
18) 「여적」, 『경향신문』 1963.2.1., 1면.
19) 「남자는 안팔려...」, 『동아일보』 1963.2.18., 7면 ; 「남자는 안팔려」, 『경향신문』 1963.3.11., 6면.
20) 「여자가 더좋아」, 『경향신문』 1965.6.17., 2면.
21) 「색연필 : 미국서 스트립 생활한 고아, 성전환 수술 돈 없어 못해. 누가 내게 온정을…」, 『조선일보』 1965.6.25., 조간 7면.
22) 「쇼 무대에 선 스트립퍼. "소망은 빨리 성전환 수술을", 미국서 돌아온 李군」, 『조선일보』 1965.6.26., 조간 3면.
23) 「또 하나의 평지풍파, 풍속사범 처벌법안」, 『경향신문』 1970.9.24., 6면 ; 「퇴폐풍조 일제단속 개시」, 『동아일보』 1971.10.1., 7명.
24) 「히피族 1만3백명 삭발, 21명 입건, 882명 즉심」, 『매일경제』 1972.10.3., 7면.
25) 「여장남자 즉심에」, 『조선일보』 1971.10.1., 조간 7면 ; 「여장 10대 남자 즉심에 회부」, 『경향신문』 1975.6.3., 6면.
26) 「여장 20대 청년 동침하다 들통」, 『경향신문』 1975.11.25., 6면 ; 「휴지통」, 『동아일보』 1979.7.24., 7면.
27) 「장발족 일제 단속」, 『동아일보』 1975.7.24., 7면 ; 「여장남자 다방종업원... 2명 즉심」, 『경향신문』 1979.6.14., 7면.
28) 「서울 새 풍속도(184) : 외국인촌(34)」, 『경향신문』 1971.6.25., 6면.
29) 「서울 새 풍속도(189) : 외국인촌(39)」, 『경향신문』 1971.7.1., 6면.
30) 「휴지통」, 『동아일보』 1969.11.12., 3면.
31) 「5명에 허위진단서 떼」, 『동아일보』 1972.3.7., 6면.
32) 「기담·애화·진문·일사(11)」, 『동아일보』 1925.3.4., 3면. 
33) 「남장한 단발처녀와 中東校의 큰 두통」, 『동아일보』 1924.9.13., 3면.
34) 「남장한 여자」, 『동아일보』 1923.4.18., 3면 ; 「남장코 도주」, 『동아일보』 1931.6.30., 3면 ; 「남장한 미인 夜走중 被捉」, 『동아일보』 1933.6.15., 3면.
35) 「남자의 농락 피해 삭발 남장한 청상」, 『동아일보』 1929.6.1., 5면.
36) 「남장한 두 여인 도로취체령에 걸려」, 『동아일보』 1960.2.25., 3면.
37) 「남장한 여강도송국 포천군여자」, 『조선일보』 1934.4.14., 조간 2면 ; 「남장한 여자강도, 뜻도 못 이루고 잡혀」, 『조선일보』 1955.1.14., 조간 2면 ; 「모성애에 타는 청상, 남장 차리고 강도 노릇」, 『동아일보』 1928.1.16, 3면 ; 「남편옷 가러입고서 남장한 괴여강도」, 『동아일보』 1934.4.6., 3면 ; 「남장미녀의 강도」, 『동아일보』 1938.3.3., 3면 ; 「남장한 여강도 피체, 식도로 3만환 내라고 협박」, 『동아일보』 1955.1.13, 3면 ; 「「남장」한 여자강도 출현」, 『경향신문』 1956.3.30., 3면 ; 「남장한 여강도 모의권총 들고 범행」, 『경향신문』 1958.11.2., 3면 ; 「남장한 여인 도둑」, 『동아일보』 1959.3.21., 3면 ; 「남장하고 부대에 침입, 대담한 여자 - 군수품 다량을 절취」, 『조선일보』 1959.3.21, 조간 3면 ; 「남장을 하고 범행하다 체포, 복면한 여자 강도」, 『조선일보』 1959.7.23., 조간 4면 ; 「복면한 「처녀」 강도」, 『동아일보』 1960.5.8., 3면 ; 「깨어진 계돈을 마련키 위해, 남장여인 강도의 범행동기」, 『경향신문』 1961.8.30., 2면 ; 「남장한 여절도단」, 『경향신문』 1964.3.2., 7면 ; 「남장여강도 검거」, 『매일경제』 1970.2.13, 3면 ; 「태권도 유단 남장처녀 행패」, 『경향신문』 1976.6.10., 7면.
38) 「신세 타령하는 남장여군. 여자임이 드러나 제대 당했다고」, 『조선일보』 1959.8.3., 석간 3면.
39) 「「여해적」을 타진, 부산서 일당 6명 체포」, 『동아일보』 1959.6.4., 3면.
40) 「10대의 소녀깡패 「백골단」 일당 50명 밤엔 남장」, 『경향신문』 1960.11.11., 3면.
41) 「지리산에 평화왔다」, 『경향신문』 1963.11.16., 6면.
42) 「횡설수설」, 『동아일보』 1962.4.16., 1면.
43) 「쇠고랑찬 남장여인 - 양공주 출신의 3인조, '처' 데리고 미군 등쳐」, 『조선일보』 1964.3.3., 조간 6 면.
44) 「변두리 공연이 고작, 군소단체 열두개나 있으나」, 『동아일보』 1960.2.5., 4면.
45) 「여자들을 연극으로 이끌게」, 『경향신문』 1966.11.2., 7면.
46) 「여자들을 미치게 한 그 여자의 전부 - 무대생활 30년 기념공연 갖는 햇님 朴貴姬의 흘러간 무대생활 비화」, 『선데이서울』 54, 1969.10.5., 45쪽 ; 「국악에 산다 (1) 인간문화재 朴貴姬」, 『동아일보』 1979.8..2, 7면.
47) 「久遠의 情火」, 『경향신문』 1954.3.1., 3면.
48) 「이난영악단」, 『동아일보』 1954.8.31., 2면 ; 「이난영악단」, 『동아일보』 1954.9.1., 1면 ; 「연예푸로」, 『동아일보』 1954.9.5., 4면.
49) 「國樂部 마련 서울民俗歌劇團」, 『경향신문』 1964.1.7., 5면.
50) 「TBC 「옥피리」」, 『경향신문』, 1975.5.20., 6면 ; 「TBC 「매화」」, 『경향신문』 1975.12.5., 8면 ; 「MBC 「옥녀」」, 『경향신문』 1978.1.20., 6면.
51) 「"남장한 묘령미인 여성으로 환원하라"」, 『동아일보』 1937.8.9, 3면.
52) 「아들 바라던 부모, 사내로 길러 남장 28년」, 『동아일보』 1965.4.2., 3면.
53) 「남장여자 사기군」, 『동아일보』 1961.4.16., 3명.
54) 「만화경 : 남장생활 「6년」, 어느 여인의 사기행로 - 동거하자고 여인속여, 남자에겐 취직미끼로」, 『조선일보』 1961.4.5., 조간 3면.
55) 「남장여인 입후보자」, 『동아일보』 1960.7.8., 3면.
56) 「『넥타이』맨 남장의 압도」, 『동아일보』 1965.5.25., 2면.
57) 「6·8선거속의 네 여성 후보 : 보령구 金玉仙양 - 인습 타파위해 남장」, 『조선일보』 1967.5.18., 조간 3면.
58) 「남장 여의원, 의지의 여인 金玉仙양, 「남장」이란 소리 듣기 싫은…. 15년간 정든 신사복, 자아혁명 - 고향에선 노상 작업복차림」, 『조선일보』 1967.12.19., 조간 4면.
59) 「민의원에 출마했던 「남장밀항여인」이 귀국」, 『동아일보』 1962.6.26., 3면.
60) 「색연필 : 남장여인 체포」, 『조선일보』 1960.6.15., 석간 3면 ; 「「동성부부」 음독」, 동아일보 1963.8.5., 7면 ; 「아들 바라던 부모, 사내로 길러 남장 28년」, 『동아일보』 1965.4.2., 3면 ; 「동성애인 바람피운다고 칼질」, 『경향신문』 1975.8.27., 7면.
61) 「횡설수설」, 『동아일보』 1937.9.8., 1면 ; 「여적」, 『경향신문』, 1971.10.5., 1면.
62) 「雜記帳」, 『동아일보』 1957.10.15., 3면.
63) 「돋보기 : 美병이 위안부 옷가지 훔쳐」, 『경향신문』 1969.4.11., 7면.
64) 「양성 갖추어 화제」, 『동아일보』 1960.10.22., 3면.
65) 「지방소식 : 반음반양 소녀, 여성으로 완전수술」, 『조선일보』 1955.6.10., 조간 4면.
66) 「「남성」의 수난시대? 또 한 명이 여자로 전환」, 『경향신문』, 1955.9.2., 3면 ; 「성전환 제2호 17세 소년이 여자로」, 『동아일보』 1955.9.3., 3면.
67) 「쌍동이처녀, 남자로 돌변. 부산대학병원서 수술성공」, 『조선일보』 1963.2.16., 조간 7면 ; 「쌍동이 자매가 남자 형제로」, 『경향신문』 1963.3.7., 7면. 그 밖에 요도하열로 인한 남성성기 재건수술의 사례로는 「두살 여아 성전환 성공」, 『동아일보』 1970.6.22., 7면 참조.
68) 「소위 성전환이란 어떤 것인가 : 반음양과 위반음양」, 『동아일보』 1955.9.10., 4면 ; 「여자가 되고 싶어」, 『경향신문』 1957.9.20., 3면.
69) 「요모조모」, 『경향신문』 1957.10.8., 2면.
70) 「남녀성기 모두 갖춰, 수술 결과가 궁금」, 『선데이서울』 129, 1971.3.28., 93쪽.
71) 「휴지통」, 『동아일보』 1959.3.24., 3면 ; 「불행한 남편, 불행한 어머니」, 『동아일보』 1959.4.5., 3면.
72) 「珍種 : "엄마, 나 여자가 좋아 수술할래" - 兩性을 가진 11세 소녀의 애절한 호소」, 『선데이서울』 109, 1970.11.1., 14-15쪽.
73) 「여적」, 『경향신문』 1955.8.30., 1면
74) 「휴지통」, 『동아일보』 1955.8.15., 3면 ; 「단상단하」, 『동아일보』 1955.9.3., 1면.
75) 「물방울」, 『동아일보』 1955.9.10., 4면.
76) 「李熙永 교실 : 퇴근후의 애정관리 - 성전환」, 『선데이서울』 63, 1969.12.7., 40쪽.
77) 「여도 남도 아닌 불완전성, 28세의 '여장행각 14년'」, 『동아일보』 1966.5.28., 7면 ; 「인제 의사가 제의, 여장남인 성전환 무료로 해 주겠다」, 『동아일보』 1966.6.2., 7면.
78) 「색연필 : 성전환 수술때문에…」, 『조선일보』 1971.1.24., 조간 7면.
79) 「휴지통」, 동아일보 1955.8.15., 3면 ; 「미용실에 나타난 趙基哲양」, 『조선일보』 1955.8.29., 조간 2면 ; 「최신형으로 整髮」, 『동아일보』 1955.8.29., 3면 ; 「단상단하」, 『동아일보』 1955.9.3., 1면. 
80) 「쇼 무대에 선 스트립퍼. "소망은 빨리 성전환 수술을", 미국서 돌아온 李군」, 『조선일보』 1965.6.26., 조간 3면.
81) 김진환, 「상식의 허실(664) : 성형, 性전환 수술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 1975.10.1., 조간 4면.
82) 「李熙永 교실 : 퇴근후의 애정관리 - 성전환의 조건」, 『선데이서울』 64, 1969.12.14., 40쪽 ; 「李熙永 교실 : 퇴근후의 애정관리 - 성전환」, 『선데이서울』 63, 1969.12.7., 40쪽 ; 허정, 「상식의 허실(157) : 건강. 완전한 성전환은 안된다」, 『조선일보』 1973.11.28., 조간 4면 ; 곽대희, 「상식의 허실(397) : 비뇨기과, 성전환을 했다고 구실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74.10.1., 조간 4면.
83) 「해외화제 : 미국의 이색신경질환 「자궁선망증」 - "여자가 되고 싶다", 가벼운 책임·「특권」에 매력, 억지 성전환 수술 시도도」, 『조선일보』 1971.4.28., 조간 4면 ; 朴贊武, 「의학 에세이 54 : 조물주가 개탄할 성전환수술」, 『동아일보』 1974.2.11., 5면.
84) 「서구의학계 쇼킹한 보고서, 인간의 성 이상현상 가축 호르몬 주사 탓」, 『동아일보』 1972.11.27., 4면. 
85) 이 기사의 해석에 도움을 주신 정숙조신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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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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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조신 2015-06-01 오전 11:35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정리된 글로 보니 부분적으로 따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랑은 또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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