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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람 사이의 터울 #5 : 어떤 행렬의 기록
2014-06-27 오후 21: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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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6월 
사람 사이의 터울 #5 : 어떤 행렬의 기록
 
 
 
밤새 단장된 트럭들이 신촌으로 향했다.
 
토요일 낮 창천교회 앞은 무대와 좌석이 차려졌다. 보수 기독교 단체의 머리였다. 여러분들이 버티면 저들의 행렬을 막을 수 있다는 소리가 텅빈 무대 위를 쩌렁거렸다. 연대앞을 지나도록 되었던 퀴어퍼레이드의 맥을 끊기 위함이었다.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장소 예약을 2주 전에 취소하고, 저들의 점거를 이틀 전에 허용했던 서대문구청은, 행사와 관계없이 연세로 차량통행 제한이 시작되는 2시 바로 직전까지 시내버스 운행을 허용했다. 2시 정각에 모든 부스들이 도깨비 시장처럼 일제히 펴졌고, 기둥을 들고 연거푸 뛰어 각 단위의 부스들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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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불황으로 게이바 다운 게이바가 사멸해버린 신촌에 무지갯빛 기운이 흘렀다. 장내는 발디딜 틈 없이 복작했다. 앞선 문화에 밝은 외국인들과 내국인들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게이들의 유년기를 다룬 아이다호데이 사진전에 뭇사람들의 발길이 오래 머물렀고, 부스에서 준비한 물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갔다.
 
공연팀들은 신촌교차로에서 춤을 추었다. 그곳에 사랑보다 강한 혐오를 입고 “동성애는 끊어버려야 할 죄악”이라 쓴 팻말과 꼭 닮은 중년이 서 있었다. 이해받아 마땅할 세상의 일부를 끊어낸 그의 얼굴에 확신과 조소가 번들거렸다. 그 앞에서 공연팀들은 끝까지 쾌활을 잃지 않았다.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창천교회 앞은 여전히 텅빈 무대로 막혀있었다. 조직위 측은 행렬을 T월드 골목 쪽으로 틀었다. 아웃백 골목을 지나 신촌기차역으로 빠지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아웃백 앞은 이미 복음주의 강골들이 연좌농성을 틀었고, 양 옆으로 의경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시립해있었다. 각 단위에서 공들여 꾸민 퀴어트럭들은 바로 그 앞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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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로는 순식간에 앞뒤가 막힌 공터로 변했다. 나아갈 관성을 잃은 행렬은 선 채로 자리를 버티었다. 혐오를 철갑처럼 두른 이들과, 그들을 철갑처럼 두른 경찰들이, 예정된 연극처럼 길을 안 내놓고 있었다. 경찰은 8차에 걸친 구인 방송 동안 청동 입상같이 제 자리를 지켰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길을 트라고 종용했고, 신도들은 딱 제 몸뚱이만한 신앙의 거처에 누워 꿈쩍할 줄을 몰랐다. 
 
존재를 티내지 말라는, 숨쉬는 걸 들키지 말라는, 인간의 사랑보다 신의 혐오가 더 입맛에 맞는 이들의 텅빈 유언流言이 악다구니같은 거리 위로 사무쳤다. 숨죽여 살 수 없어 거리로 나온 각 단위들은 음악을 끄고 구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해야 마땅했다. 구호 끝에 몇몇 결기섞인 음성이 감겼다. 혐오는, 대오가 걸어야 할 바로 저기 눈 앞에 누워있었다. 그 상태로 꼬박 네 시간이 흘렀다. 
 
땅거미가 지고, 앞이 막힌 차도 옆으로 유흥가의 밤이 밝았다. 존재를 온전히 가납받기 위한 노력은 나귀처럼 초라했고, 그 초라함을 걸터앉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무지갯빛 예수들 위로, 올리브가지같은 네온사인들이 흐드러지게 깜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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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선택받은 민족들과 지리한 협상을 끌던 조직위 측에서 묘안을 내놓았다. 연세로 앞의 무대가 철수한 틈을 타 원래 동선대로 퍼레이드를 진행한다는 계획이었다. 모아이같이 누운 선민들을 등지고 트럭들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 야간 퀴어퍼레이드의 시작이었다. 
 
경의선 굴다리를 지나는 순간 트럭들은 그동안 참았던 음악을 목놓아 틀었다.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해방의 음압이 가로수 사이를 번득였다. 대오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트럭 위의 춤꾼들이 젖먹던 흥을 공중으로 쏟아냈다. 우린 여기에 존재한다고, 여기 우리들이 여러분들을 축복한다고. 평소 숨죽여두었던 자아들이 저마다 봇물처럼 부풀어 터져오르는 순간이었다.
 
네 시간을 깔딱이다 비로소 트인 행렬의 힘은 장엄했다. 빠른 걸음으로 닫는 행렬들 위로, 밤거리의 빛들이 축전처럼 젖은 얼굴에 어른거렸다. 트럭은 빠르게 모퉁이를 돌았다. 제자리이되 이전과는 다른 연세로에 진입하는 홍조띤 얼굴들이, 가슴이 터진 것 같은 심호흡을 서로 나누었다. 휠체어를 타고 끝까지 침묵으로 대오를 완주한 한 여성분이, 그 광경을 뒤로 한 채 잠시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2014년의 퀴어퍼레이드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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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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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_233987 2014-07-03 오후 22:51

그러고 보니 종로보다 신촌을 더 먼저 나왔었군요
퍼레이드 때 가면없이 그냥 맨 얼굴로 행사에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뒤에 붙는 일반인행렬을 보면서 세상이 생각보다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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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울 2014-07-05 오후 19:42

예전 신촌에 몇 군데 있는 게이바들이 참 정감있었던 기억이 있군요.
'몽환' 있었을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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