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크랩

title_Newspaper
[신동아]



1931년 4월8일 오후 4시, 세련된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스무 살 전후의 신여성 두 명이 영등포역에서 하차했다. 두 손을 꼭 잡은 두 여인은 마치 소풍 나온 소녀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얘, 인천 방향이 어디니?”

키가 조금 큰 여인이 지나가는 꼬마에게 10전짜리 백동전을 쥐어주며 물었다. 꼬마는 난데없는 횡재에 얼떨떨해서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두 여인은 꼬마가 가리킨 방향으로 철길을 따라 걸었다. 지난밤 때늦은 봄눈이 내려, 철로 양편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나리와 진달래 꽃잎 위에는 눈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 두 여인은 이채로운 봄 정취에 취해 두 손을 꼭 잡고 마냥 즐거워하며 걸었다.

40분 남짓 걸었을 때,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열차가 보였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며 생끗 웃었다. 열차는 점점 다가왔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그냥 걸었다.

오후 4시45분,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질주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렸고, 인천발 서울행 제428호 열차는 영등포역을 2km 남겨두고 급제동을 걸었다. 열차가 내뿜는 굉음에 묻혀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여인의 몸은 쇳덩이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 나갔지만,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꼭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의문의 철도 자살

제428호 열차 승무원을 통해 급보를 접한 영등포경찰서 경관은 시흥군 북면사무소 직원과 함께 즉각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두 여인의 시신에서는 신분증이나 유서 같은 신원을 알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호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두 여인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해줄 따름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상당한 집안 여성임에 분명했다. 경관은 두 여인의 시신을 북면사무소 직원에게 인계해 가매장하도록 지시하고 곧장 신원조사에 착수했다.

보도할 만한 사건이 터지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였던 신문기자들도 오랜만에 터진 ‘사건다운 사건’ 덕분에 활기를 되찾았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면 편집자였던 김을한은 훗날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건 발생 당일 밤, 종로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에 각각 딸과 며느리를 찾아달라는 실종신고 두 건이 접수됐다. 창성동에 사는 스물한 살 된 여학생 홍옥임은 그날 오후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함께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겼고, 동막(마포구 대흥동)에 사는 열아홉 살 된 주부 김용주는 그날 오전 병원 간다고 집을 나간 후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홍옥임의 집에서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서까지 발견됐다.


홍옥임과 김용주는 동덕여고보를 함께 다닌 절친한 친구였다. 실종 당일 홍옥임의 집에서 함께 나간 친구가 바로 김용주였다. 이튿날 오전,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두 여인의 시신이 안치된 북면사무소로 달려갔다.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 면사무소에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의사와 경찰, 기자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뤘다. 가족들이 확인한 결과 두 여인은 예상대로 홍옥임과 김용주였다.



겉보기에 홍옥임과 김용주는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홍옥임은 저명한 안과의사이자 세브란스의전 교수인 홍석후의 고명딸로 태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 자살하기 불과 일주일 전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도였다. 홍옥임의 삼촌 홍영후는 ‘난파’란 호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음악가였다. 김용주는 종로에서 덕흥서림이라는 큰 서점을 경영하는 김동진의 장녀로 태어나 3년 전 동덕여고보를 중퇴하고 동막 부호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출가한 주부였다.


.  

그러나 남들 보기에 화려했을 뿐 두 여인의 가슴은 상처투성이였다.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던 두 여인은 급기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강제 결혼이 앗아간 소녀의 꿈

1929년 열일곱 살 소녀 김용주는 동덕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용주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얌전해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홍옥임 역시 김용주를 흠모하던 동급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김용주는 다른 일에는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김용주의 아버지 김동진은 그런 딸의 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딸에겐 늘 ‘모름지기 여자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남편 받들며 사는 게 제일’이라고 가르쳤다. 일찌감치 동막 부호 심정택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고, 딸이 여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시집보낼 계획이었다. 김용주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지나가는 말로 듣기는 했지만, 졸업하려면 아직 학교를 1년은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심정택은 ‘신랑의 할머니가 하루바삐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어 한다’며 서둘러 혼례를 치를 것을 청했다. 딸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동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동진은 허겁지겁 혼인 날짜를 잡고, 동덕여고보를 찾아가 딸을 억지로 자퇴시켰다. 김용주는 시집가기가 싫다고 아버지에게 애원도 해보았고, 시집가더라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호소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안 된다’는 매정한 답변뿐이었다. 김용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심종익에게 시집갔다. 당시 심종익은 휘문고보 1학년에 재학 중인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자라난 김용주에게 시집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공부하느라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부잣집 큰살림을 떠안고 보니 하루라도 실수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보는 것으로 모자라 시할머니 눈치까지 보며 살려니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린 신랑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종익은 휘문고보를 자퇴하고 비행학교를 다니겠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호랑이 같은 시집 식구들 사이에 혼자 남겨진 김용주는 더 한층 큰 적막과 고독에 잠겨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이듬해 봄, 김용주는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시부모에게 학교에 다시 다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시부모는 어린 며느리를 바깥으로 내돌리는 게 꺼림칙했지만,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사는 며느리를 마냥 집안에만 붙잡아둘 수도 없어 마지못해 승낙했다. 방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뜀뛰었다. 살림할 때 입던 치마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교복을 꺼내 입었다. 설레는 가슴을 애써 쓸어 내리며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기혼자라는 이유로 복학을 거부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일본에 간 남편이 하루바삐 비행술 공부를 끝내고 은빛 날개 번쩍이는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비행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았다. 방탕한 기질은 심씨 집안의 내력이었다.


마지막 희망이던 남편마저 자신을 저버리자 김용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결혼생활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가슴 속에 맺힌 사연을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 애태우고 있을 때, 우연히 여학교 시절 동창 홍옥임을 만났다. 홍옥임 역시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모던 가정’에 몰아친 풍파


홍옥임의 부친인 세브란스의전 교수 홍석후. 국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최초의 인물로 작곡가 홍난파가 그의 동생이다. 왼쪽은 홍옥임이 삼촌 홍난파에게 보낸 유서.  

홍옥임의 아버지 홍석후는 1908년 동급생 6명과 함께 제중원의학과 제1기로 졸업한 조선 최초의 국내파 의사였다. 제중원의학과는 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듬해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홍석후는 1921년부터 2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졸업 후 줄곧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의사인 자신과 음악가인 동생 홍난파의 영향으로 홍석후의 자녀와 조카는 모두 의사 아니면 음악가였다. 홍석후의 가정은 지극히 명랑하고 쾌활한 미국식 ‘모던 가정’이었다.

홍석후는 아들은 여럿 두었으나 딸은 홍옥임 하나뿐이었다. 홍옥임은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홍석후는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홍옥임의 말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홍옥임은 피아노까지 갖춘 자신의 서재가 따로 있었고, 언제나 미스코시백화점이나 조지아백화점에서 사온 최신 유행 옷을 입고 다녔다. 당시 피아노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호가했다. 일본 잡지를 보다가 사진 속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찬 시계가 마음에 들기라도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은 딸의 정서에 도리어 악영향을 끼쳤다. 홍옥임은 원하는 것을 갖는다고 행복해하지 않았고, 반대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친구를 사귀면 며칠이 못 돼 싸우고 갈라서기 일쑤였고, 학업 성적은 매번 끄트머리부터 세어 올라가는 것이 빨랐다.

김용주가 동덕여고보를 자퇴하고 시집간 후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로 전학했다. 1930년 이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중앙보육학교에 들어갔으나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뒀다. 여학생 시절 홍옥임은 ‘이상한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동성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던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를 졸업한 후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세브란스가 제일 좋아. 앞으로 나는 의사하고 결혼할 테야.”

홍옥임은 만나는 친구들에게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한테 시집갈 것이라 장담했다. 아버지가 세브란스의전 교수였고 오빠는 그 학교 학생이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홍옥임이 의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집안사람이 죄다 달려들어 신랑감을 물색했다. 얼마 후 홍옥임은 오빠의 소개로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홍옥임이 이성 애인과 사랑을 키워갈 때 그의 가정에 뜻밖의 우환이 생겼다.


당시 신문·잡지는 홍옥임이 아버지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보도했지만, 복자(伏字)로 처리해서 홍석후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일반인이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면 편집자였던 김을한은 홍옥임 집안의 우환이 무엇이었는지 30년 후에야 밝혔다.


원동에 사는 김화동은 늘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녀 ‘원동 재킷’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1921년 김화동은 일본 유학을 보내줄 남자를 찾다가 유부남 박석규에게 속아 정조를 유린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언니 김후동은 미두왕 반복창과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려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신동아’ 2007년 1월호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참조).

홍옥임은 존경하는 아버지가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인 ‘원동 재킷’과 연애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안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홍옥임의 애인마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애인에게 연이어 배신당한 홍옥임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해맑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고, ‘삶이 허무하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방안에 틀어박혀 일본 연애소설만 줄기차게 읽어댔다. 김용주는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갈등하던 홍옥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동정에서 비롯된 사랑

남자에게 배신당한 홍옥임과 김용주는 서로 깊이 동정하며 서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홍옥임은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다. 두 여인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추악한 현실과 허무한 인생에 대한 절망은 커져만 갔다. 홍옥임은 친구들에게 “차마 죽어버리려 해도 아버지의 명예와 나밖에는 동정해줄 사람이 없는 김용주가 가여워서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도원에 들어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개신교를 믿는 집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1년 3월, 홍옥임과 김용주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마지막 전차를 타고 한강으로 향했다. 전차에서 내린 두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강변으로 내려갔다. 모래 위에 옷을 벗어놓고 물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두 여인은 괴로운 세상에서 벗어날 유일한 도피처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초봄 차가운 물살이 두 여인의 목 밑까지 차올랐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덧없는 이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 강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두 여인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누군가 급하게 노를 저어온 것이었다. 구조를 받은 두 여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1931년 4월8일, 이화여전 음악과 신입생 홍옥임은 그날 따라 무척 행복해 보였다. 수요일이었음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몸단장을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스물한 살 탄력 있고 발그스름한 두 뺨에 미스코시백화점에서 사온 ‘코티(Coty) 분’까지 바르고 나니 웬만한 여배우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빛났다.


“얘 학교 안 가니?”

“오늘은 수업 없어요.”

홍옥임은 어머니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옷장에서 옷이란 옷은 죄다 꺼내 옷맵시를 맞춰보았다. 걸쳤다 벗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조지아백화점에서 새로 산 실크 양장을 골라 입었다. 얼마 후 김용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용주는 시집간 지 3년이 지난 주부였지만, 그날따라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이었다.

“엄마, 우리 놀러 나가요.”

“아니 점심때 다 됐는데 밥이나 먹고 가야지.”

“나가서 먹을 게요. 우리 바빠요.”

오전 11시, 홍옥임은 김용주와 함께 허겁지겁 대문을 나섰다. 5시간 후 두 여인은 영등포역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서 갈가리 찢겨 나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19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성연애가 유행이었다. ‘여성’ 1937년 7월호에 실린 ‘여학생 스케치’.  

여학생 동성애

1920~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 동성애는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도 금기시 되지 않았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중외일보’ 기자 황신덕, 이광수의 아내이자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 기독교 여성운동가 이덕요 등 쟁쟁한 여류명사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황신덕은 자신의 동성연애 경험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허영숙은 김경희, 배영순 등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과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배영순을 그처럼 사랑했던 허영숙은 졸업 후 이광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당시 여학생 사이에 만연한 동성연애는 성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동성애에는 상대에 대한 깊은 ‘동정(同情)’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대 초반의 소녀가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여간 외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외로움을 동정하고 감싸주는 친구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교제를 가로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기성세대는 되도록 남학생과 여학생을 갈라놓으려고 노력했다. 여성들끼리 모여 있으니 여성들끼리 사랑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같은 맥락에서 남학생들 사이의 동성연애도 드물지 않았다.


여학생들이 동성애에 빠져든 근본 원인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있었다. 자유연애가 도입된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남성은 여전히 여성이 ‘순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정(童貞)이니 순결이니 하는 말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성은 ‘가볍게’ 연애를 걸었지만 여성은 ‘심각하게’ 연애를 생각해야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사랑을 구걸하다가도 일단 구애에 성공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게 당대의 조선 남성이었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남성에 끌리더라도 남성을 믿지 못해 동성을 사랑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결국 여학생이 동성에게 끌린 것은 남성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렇게 보면 꽃다운 두 여인이 철길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 비운의 사건 역시 당대 남자들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

정봉관이대체누구냐; 2008-05-26 오후 22:35

이런 글도 결국엔 이성애가 당연한 것이고 절대적인 중심인냥 적혀지는군요. 동성애에 '빠졌다'느니, '동정에 의한'이라느니, '이성과 떨어져있어 동성과 사랑하게 될수밖에 없었다'느니...어쨌든 그것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거 아닌가.사랑이란것에 '빠지는'게 쉬운건줄아나?아니 그전에 사랑이라는게 '착각'이라는걸로 이루어질것같냐?;게임중독이나 마약에 빠졌다는 듯이 표현하니 이거 원...ㅡㅡ;말그대로 그냥 사랑이 사랑인거지..꼭 동성과의 사랑이라하면 온갓 변명을 다 갖다붙혀서 '이렇게해서 저렇게된거지 원래는 이래야만했다'라는냥 어떻게든 이성애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결과를 나오게하려 안달났군요아주.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게 된게 큰 실수나 잘못된 것 인냥 묘사되어있는게 영 기분나쁘네요.
지금까지 동성과 사랑을 나누다 나중에 이성과 사랑을 나누게되면 '우정과 사랑을 착각하였던 미성숙한 청소년기의 방황끝에 진실한 사랑을 되찾은 것'이라 묘사되고 ㅡㅡ;
지금까지 이성과 사랑을 나누다 나중에 동성과 사랑을 나누게되면 '이성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해 ,또는 그 이외의 어느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부자연스런 길로 빠지게된 것'이라 묘사되고...
지금 나랑 장난하냐..?ㅡㅡ
진정 인간들은 자신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모순을 느끼지 못하나보다... 다들 바본가 ㅡㅡ;
사람이라는게 이성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동성에게 관심이 생길수있는 것이고,동성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이성에게 관심이 생길수있는 것이고...
그냥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면 그만인거지ㅡ,.ㅡ 꼭 정의와 악이 있어야하고 극단적인 구분을 해야한대요.바보같은 놈들ㅉㅉ
이건 말이다.한마디로 '생식'과'성애'와'애정'은 서로 다른 개념의 것으로서, 흔히 말하는 '사랑'은 대부분 '성애'혹은'애정'or'양쪽모두'로 구성되어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냥 그런거지. 꼭 '이성애'에 집착하더라 -0-;;;ㄷㄷㄷ이것도 인구뭐시기때문에 부담스러울정도로 이성애를 우선시하는것같은데,동성과 사랑하고 누워잔다고 생식기능이 사라지냐-0-ㅋ다들착각하더라고..어이 잊지마.게이도 레즈비언도 생식기능이 없는건 아니다ㅡㅡ;사회에서 배제되지말라고 신이란 작자가 생식기능은 떡하니 줬나어쨌나 모르겠지만,가족구성의 개념을 바꾸면 동성애가 판을 쳐도 사회쯤은 유지되니까 걱정은 하지마시고요~.너나 생각을 여세요~.
이성과 사랑하다 동성과 사랑하게 되었다는걸 다르게 표현하자면, '주변분위기도 그렇고 사회자체가 이성애를 옹호하니까 자기도 그래야하나보다하면서 그러려니 세뇌당한채 그냥 이성과 사귀다가 어느날 억누르지못할 본능으로인한 혼란끝에 진짜 자신을 깨닫고 진심으로 끌리는 동성과의 진실어린 사랑을 하게되었다'라고도 표현할수있는 것이고,
동성과 사랑하다 이성과 결혼하게되었다는걸 또 다르게 표현하면 '원래는 동성과 있을때 진실한 만족감을 느끼지만 주변사람들의 결혼부담과(노골적인이성애옹호와) 곱지않는 시선끝에 진짜 자신인 것이 거짓된 인생을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져서 결국 인정과 축복을 받지못하는 소외감과 외로움끝에 애를 써서 어거지로 그나마 정이 가는 이성과 결혼하여 어거지로 애를 낳고 어거지로 행복하다는 자기암기를 하면서 애매모호하게 살아가지만 사랑하는 동성이 생기게되고~결혼하고 애까지있으니 그걸 억눌러야하고~되돌릴수가없고~'이렇게 표현할수도있는거다.
솔직히 어느쪽이냐하면 이런 케이스가 현실적으로 더 많지않나요?ㅋ 글쓴이의 이성의 잘못으로인하여 동성애에빠졌다는 설보단 사회적압박으로 오히려 동성애자들이 어거지로 이성애를 연기하며 살아가고있다는 말이 사실적이지. 끌끌
여자 나체를 보고 흥분하는 여자들 정말 많습니다. 대부분이라 할수있을 정도로 많죠. 그게 착각이내뭐내 원래 그런거다~하면서 대충 넘어가는데, 짚어볼건 짚어봐야죠 ㅋ 솔직히 이게다 동성성향의 본성이라 생각되거든요ㅎ 그래서 어쩌라고? 무조건적으로 이성과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한다는게 아닌, 그때그때 끌린 진실된 사랑을 소중히 생각했으면 하네요. 이성이든 동성이든.
일일히 이건 본래 이래야하는 어째저째해서 저렇게됐네뭐네 하면서 그 소중한 사랑을 멋대로 부정하지나 말고;;;;동성애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주범은 다름아닌 그걸 부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라 생각되네요. '응,너만그래^^' 말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떠오르는대로 그냥 내뱉기전에 여러가지 좀 생각을하고 말하세요. 적어도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정도는 갖추고말이죠.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한 대하드라마찍는데 그때 당시 시대분위기나 흐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없이 지멋대로 만들어가면 쓰냐. 그건 그냥 역사왜곡이지; 다룰거면 기본적 지식과 예의를 갖추라규~그리고 너의 잣대로 감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규~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661 [국민일보] 이통사 얄팍한 ’동성애 상술’ 2003-04-18 2697
2660 [한겨레21]장궈룽의 죽음과.. 동성애 혐오증.. 2003-04-29 2695
2659 [연합뉴스] "단어 '게이' 가장 많이 쓴 美대통령은 오바마" 2014-01-24 2687
2658 [보릿자루] 최초로 이반 올림픽 생중계 될 예정 2003-09-07 2687
2657 [연합뉴스]홍석천 "김한석씨 덕분에 커밍아웃" 2007-05-19 2684
2656 [주간한국]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동성애 2003-05-11 2679
2655 [경향신문]군대 내 성폭력 2003-09-28 2676
2654 [조선일보] 청소년 100명중 6명 “나 혹시 동성애?” 2003-05-02 2674
2653 시사저널 <퀴어문화축제>기사 및 사진 2003-07-08 2670
2652 中 `동성연애 매춘' 재판 큰 관심 2004-02-07 2664
2651 미국 장로교 첫 여성총회장 선출 [국민일보] 2003-06-07 2664
2650 [중앙일보 하현옥 기자] 수혈을 통해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례가 또다시 발생했다. +1 2003-08-29 2657
2649 [동아일보-위크엔드 포커스]'머드팩 하는 남자' 性경계 갈수록 희미 2003-08-29 2653
2648 [보릿자루] 아놀드 당신은 이반들에게 근육말고 다른 거 보여줄 2003-08-23 2650
2647 엄정화 효과 2003-10-27 2648
2646 미국인,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여론조사> 2004-02-12 2646
2645 배두나, 동성애 연기를 해보고 싶다 2003-10-09 2643
2644 편견은 에이즈를 예방할 수 없다. 2003-06-12 2638
2643 [국민일보] 인권위,동성애단체 지원 논란 2003-04-28 2631
2642 ‘정보 인권’이 짓밟힌다 _[한 겨 레] 2003-06-07 2629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