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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유철종 특파원] 레프 톨스토이.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안톤 체호프와 같은 세계 문학의 거장들과 무려 5명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문학의 고향' 러시아가 요즘 탐정 소설과 연애 소설에 빠졌다.

서점가의 도서 판매 순위에서 탐정.연애 소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독서계의 전반적 분위기에 반란을 일으키는 본격 문학 작품 하나가 러시아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어 화제다.

러시아 포스트 모던 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빅토르 펠레빈(41)의 최신작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행기의 변증법'이다.

지난 8월 작가가 5년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이 장편소설은 줄곧 모스크바 시내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라 있다.

작품은 숫자에 파묻혀 사는 어느 은행가의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다.

34라는 숫자의 신비를 광적으로 신봉하며 성공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던 한 은행가가 43세 되던 해에 43이라는 숫자를 믿는 또 다른 환상가를 만나 동성애에 빠지면서 끝내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다분히 포스트 모던적 분위기를 담은 소설이다.

많은 독자는 이 작품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놓여 있는 러시아의 현실을 그린 것으로 받아들인다.

일부 독자는 심지어 이 소설이 수치로 표시되는 경제의 외형적 성장을 강조하며 독재적 통치스타일을 보이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간접 비판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펠레빈은 이 같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작품은 인간 이성의 보편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주위에 감옥을 만들고 스스로 평생 그 속에 갇혀 지내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펠레빈은 타티야나 톨스타야.블라디미르 소로킨 등과 함께 개방 이후 현대 러시아 문단의 대세가 된 포스트 모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다.

소련군 장교의 아들인 그는 1990년대 초반에 쓴 그로테스크한 성향의 소설 '오몬 라'가 20만부 이상 팔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적 문학 전통에 익숙한 비평가는 일반 독자들만큼 펠레빈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펠레빈의 문장에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요소들, 즉 귀족성과 대중성, 현대와 과거, 사실과 환상 등이 절묘하게 녹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책이라곤 전화번호부 외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독자들도 한번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 놓지 못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cjyo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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