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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나우누리 레인보우 미네르바의 방패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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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 운동의 역사
  
  동성애는 인류역사에서 극히 희귀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수  천년 동안 금기와 단죄의 대상이었다. 현대 대중의 집단 의식이 표현되는  대중 매체 속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동성애자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아 있다. 동성애자들도 20세기 들어 차별적 제도와 편견에 맞서인권운동을 벌였는데, 동성애 운동은  다소나마 진전된 동성애자들의  인권상황을 일구어 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운동은 서로 합의한 성인 사이의 동성애를  규제하는 법률을 철폐하고 취업, 신용, 주거 등에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회 관행을 고치기 위해 시작된 운동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동성애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베를린에서 1897년 설립된 동성애 과학-인도주의 위원회가 최초의 동성애 운동 단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단체는 관련 간행물을 발행하고 시위를 벌이고 법률 개정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인근 네델란드나 오스트리아  등지로 뻗어나갔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 단체의 운동은 중단되고 만다. 유럽 국가  중 영국에서는 1914년 동성애 관련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띤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성애 운동의 본령은 유럽 지역보다는 미국에서 찾을 수 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후반 들어 동성애 운동 단체가 여럿  결성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남성 동성애자 단체는 헨리 헤이 등이 1950년 LA에서  결성한 '마타신 소사이어티(Mattachine Society)'인데, 오늘날에도 가장 유력한  동성애자 단체로 남아 있다. 이 단체 명은 중세 유럽의 마스크를 쓴 어릿광대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족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스크로 가려야 했던 그 광대들처럼, 동성애자들도 본래의 성행을 숨겨야만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여성  동성애자 집단은 1956년 결성된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로, 이  단체는 고대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 사포를 사랑했던 매춘부  빌리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50년대 말부터 동성애 단체가 결성되면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차별하는 사회 질서에 구체적인 저항을 펼 준비를 해  나갔다. 1960년대 말부터는 게이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친구나 가족  또는 공공에 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성해방 경향이나 정치적 자유주의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은 흐름이었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의 조직화는 결국 이성애 중심의 사회 질서와 정면 충돌하게 된다.
  
  동성애 운동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1969년 6월 28일  오전3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발생한다.  경찰이 스톤웰(Stonewall)이라는 게이  바를 습격하고 몇몇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하여 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전처럼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경찰에 맞선선  200여명의 동성애자들이 경찰에 야유를 퍼붓고 투석전을 벌인 이날의 저항은 단 45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다음 날 다시 시위가 재연되었으며 400여명의 동성애자들과 2,000명의 경찰이 대치하여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은 동성애자들이 부당한 억압에 맞서 최초로  소리를 내지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동성애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매년 6월이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게이  프라이드 위크'를 통해 동성애자들은 스톤웰 항쟁을 기념한다. 영원히 잊혀질  운명이었던 사랑이 드디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1948년 킨제이 보고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0%, 그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합의된 수치인  인구의 2~4%에 해당하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움을 벌여 나가게 된 것이다.
  
  스톤웰 항쟁 이후 미국에서 동성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항쟁 후 1년 내에 미국에서는 12개의 동성애 단체가  구성되었고, 1970년 시카고 대학에서는 660명이 참여한 최초의 공개적 게이 댄스 모임이 열려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1973년에는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정신 질환 리스트에서 제외하는데, 이는 단순히 의학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성애자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이제 정신  의학 분야에서 동성애는 치료 대상 질환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된 것이다.
  
  그렇지만 동성애 운동이 탄탄대로를 걷지는 못했다.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최초의 동성애자 민선 시장인 조지 모스콘이 암살되었다. 감히 동성애자 주제에 시 행정을 책임질 수 있느냐는  이성애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셈이다. 1981년 최초의 에이즈가 보고되자 동성애자들은 더욱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의사들은 에이즈의 발병 및 감염 경로를 발표하면서 많은 동성애자들을 거론했다. 이 때문에 에이즈는 감기처럼  누구나 감염될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에이즈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이 원인 불명의 질환을 동성애를 단죄하기 위해 신이 내린 역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성애 공동체와 동성애 개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까지 빈발하게 되었다.
  
  시련 속에서도 동성애 운동은 계속되었다. 미국 하원 의원 제리 스튜즈를비롯한 여러 공직자들이 동성애  경향을 공표하였다. 1984년에는  위스콘신주에서 최초로 동성애 반차별법이 통과되었고 현재 미국  전체 주에는 절반 정도는 합의에 의한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기했다. 클린턴 정보는 엄격한 규율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에서도 '추궁과 공표의  금지(don't, don't tell)' 정책, 즉 동성애  성향의 공표를 금지하는 동시에  동성애자에 대한 추궁도 엄격히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성애 운동이 그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사회는 미국 등 서구의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아직도 많은 사회에서는 동성애자가 운동에  나서기는커녕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이성애자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그만큼 높은 편견의 벽이 동성애자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동성애 운동은 싹을 틔우고 자기 발전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자들은 일종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자들은 모든 사회에 있게 마련이고 그들도 엄연히 사회의 일부라는  사실이 동성애 운동의 근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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