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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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 2003-10-23 19:09:07
+1 3065





지난 파고다 퀴어 영화제 때 올려져 있던 글입니다. 이미 읽으신 분은 패스~~~~ 강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 올립니다.

* 하단의 '수정' 버튼을 누르면 홍보 소스가 보일 겁니다. 이번엔 플래쉬 두 개입니다. 친구사이 회원 열분!~~~~ 퍼다 날라주셈...



P싸롱의 몰락과 전설

'P싸롱'은 은어다.
'P싸롱'은 파고다 극장의 은어다. 70, 80년대 남자 동성애자들이 은닉하고, 과장하고, 자기 삶을 조롱하면서도 반대로 위안하기 위해 고안해낸 슬픈 빛감의 그 은어다.

80년대의 야사와 실화를 주름 잡은 '썬데이 서울'도 역시 그들의 언어를 따라 파고다 극장을 P싸롱이라고 표현했다. 잡지를 보고 자신의 욕망을 직접 대면하고픈 수줍은 꽃띠(은어 : 게이 커뮤니티에 처음 들어오거나 젊은 사람들)들은 P라는 단어 앞에서 머뭇머뭇거리다 못내 피카디리 극장 앞을 서성이거나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은 극장을 점잖게 나무라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극장 이름의 'P'자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다가 당도한 곳, 그곳이 바로 P싸롱의 실체인 파고다 극장이었다.

파고다 극장이 게이 커뮤니티의 '메카'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이다. 유명 디자이너 A씨의 젊은 날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주문으로 발효되곤 하는 60년대 명동의 극장과 파랑새 다방, 한국 최초로 기억되는 게이 바들이 점차 느티 버섯처럼 조용히 생기시 시작한 지저분한 을지로 인쇄소 골목들(최초의 게이 바는 '아담'이었고 그곳의 주인은 영원한 이중 스파이의 대명사인 '배정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을 경유하여 박정희 정권의 윤락가 청소 작업으로 공동화된 70년대 중반의 종로 일대에 서서히 얼굴 없는 게이들이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는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극장을 중심축으로 꿈틀거렸다. 60년대의 명동이 그랬고, 80년대 말엽 순식간에 붕괴된 신당동이 그랬으며, 현재까지 이태원과 함께 서울의 게이 커뮤니티를 양분하고 있는 종로가 그랬다.

90년대 중반쯤, 파고다 극장 바로 맞은편 2층 카페가 새로 들어서면서 간판을 내걸었었다.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간판이었다. 절묘한 뉘앙스이자 발칙한 저항이다. 왜냐하면 파고다 극장 안에 있는 남자들 대부분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짝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짝을 기다리느라 벽면에 붙어 서 있다. 그들은 혼자 명멸하는 영사기 불빛 사이사이에 모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80년대 중반까지 갖가지 대중적 공연이 벌어진 곳이긴 했지만 왼쪽에 붙은 2관에선 바로 이 '서 있는 사람들'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극장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험하고 선택했으며, 저주와 희망의 진자 운동을 거듭했다. 어떤 부자는 그곳에서 만나 서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자살했다는 소문이 횡행했고, 주변 상가들의 항의에 못이겨 찾아온 경찰 때문에 극장 주인은 죽도를 들고 돌아다니며 붙어 있는 남자들을 떼어내야 했다. 한편, 다른 이들은 거기에서 처음 만나 30년이 넘는 행복한 동거를 유지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곳에서 짝을 만나 배신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더욱 심각하게도 파고다의 늙은 부랑아들은 자신에게 밥을 사주고 아랫도리를 축축하게 해줄 '싹싹한 게이들'을 사냥하러 극장에 몇 천 원을 투자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시인 '기형도'는 그곳에서 성기를 드러내놓고 복상사로 죽었다. 예컨대 파고다 극장은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한 시대의 역사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유전 인자, 특별한 두뇌 구조, 치켜 올라간 약지, 늘 색기에 들떠 벌름거리는 똥구멍이 있다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동성애자들은 더욱 그런 생각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팔자 소관'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파고다 극장은 이 체념의 정서가 주되게 끓고 있는 배양소였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고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에게 자신의 이 발칙한 정념이 '유전'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파고다 극장에 들어섰다. 주말에는 극장에 온통 남자들로 들끓었고, 그들은 능란한 눈빛 교환, 손장난으로 만난 파트너와 함께 종로 술집과 여관을 찾아 극장을 떠나곤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십여 년 동안 종로에 생긴 게이 바만 해도 60여 개나 되었다.

파고다 극장, 아니 P싸롱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대면적 커뮤니티를 발효, 숙성시킨 1등 공훈자였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동성애는 이성애자 신체의 '결여'이거나 '과잉'이 아니다. 치켜 올라간 약지와 벌름거리는 똥구멍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동성애자의 몸에 '신호기'처럼 부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위안거리용 픽션에 불과하다.

60년대 이후 시작된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 그로부터 빚어진 공동체의 도덕적 감시 체계의 붕괴와 익명성이 동성애자 출몰의 직접적 '원인'이다. 전혀 얼굴을 모르는 타인, 자신의 행동과 성 모랄을 감시하지 않는 무방비의 게토. 좁은 농촌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길만 가도 만나는 친지들, 친구들에게 동성간 섹스를 제안하지 못하며, 이것은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표현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하부구조다.

익명이 보장된 도시는 동성애의 배양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산에서 만나고, 탑골공원에서 탑을 돌다 만나며, 지저분한 종로 뒷골목에서 만나는 이 모든 '얼굴 맞대기'의 과정이 훨씬 더 집약되고 농축된 곳이 바로 파고다 극장이다. 서울의 지도를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 접어 보라. 접힌 부분에 남산이 나오고, 탑골 공원이 나오고, 그리고 정중앙에 파고다 극장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파고다 극장은 한국 근대화 과정과 긴밀히 맞물려진 호모섹슈얼리티의 가시화를 대변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그런 파고다 극장이 얼마 전 완전히 문을 닫았다. 다른 시설로 교체되었단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상징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훨씬 더 개방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이태원 커뮤니티의 비약적 발전,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급작스런 발흥이 파고다 극장의 존재가치를 무력화시킨 직접적인 이유다.

2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파고다 극장의 운명은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가운데 조용히 막을 내렸고, 다시는 결코 귀환하지 못할 것이다. 쭉쭉이, 보갈, 선녀하강, 생짜, 널짜, 마짜, 때짜, 꽃띠, 작순이, 길녀 등의 숱한 은어들 위로 든든한 우산이 되어진 'P싸롱'의 대명사 은어의 운명은 말이다.

하지만 일종의 시대적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 사건이 다소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젊은 게이들이 함께 모여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며 P극장을 역사의 무덤 속으로 가차없이 밀어넣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했을까? 아니면 눈물이라도 글썽이며 저 한탄의 세월, 갖은 신파와 오욕으로 멍울진 저 체념의 세월을 향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야 했을까?

아마도 아픔과 기억을 언어로 다듬어 책 한 권에라도 담아낼 수 없는, 저 무책임한 속도의 권력이 얄미워서인 것 같다. 앞으로 십 년이 흐른 뒤 젊은 친구들은 과연 P싸롱을 기억할까?

2002년 이송희일

이열 2003-10-23 오후 19:41

읽으면서 "시네마 천국"의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마지막으로 폭파되는 극장건물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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