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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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 2003-11-23 10:31:20
+0 1332


장선우 감독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우묵배미의 사랑(1990)'이다.

이만큼 담백하게 리얼리즘을 추구한 영화가 한국 영화 중 '우묵배미의 사랑' 이전과 이후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시민들의 일상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그 솜씨는, 과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몰락의 기미를 풍기는 장선우 감독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리라(현재 장 감독은 멜러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94년, 봉준호 감독이 막 영화 공부를 시작하느라 참가했던 제작 워크샵 강사로 왔었다. 그가 자료 화면으로 가져온 것도 '우묵배미의 사랑'이었다. 그는 최명길과 박중훈이 막 정사를 하려는 순간 카메라가 창문 쪽으로 틸 업했다가 새벽빛으로 디졸브 된 후에 다시 틸 다운하면 정사가 끝난 후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 콘티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서로 쪽지를 건네받던 장면이다. 최명길을 짝사랑하던 박중훈이 그녀에게 수줍게 쪽지 하나를 건넨다. 아마 대충 이런 문구 비슷했을 것이다.

'준비됐으면 말해줘요.'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뜻이다. 니 사랑을 말해 달라는 거였다.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최명길의 요구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박중훈은 기다린 보람을 봉준호 감독이 좋아하던 그 장면을 통해 충족할 수 있었다. 마침내 사랑을 얻게 된 것이다.

아직도 그 풋풋한 사랑을 생각하면 한참이나 인내력이 부족한 내가 비견돼서, 자꾸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내 소갈머리는 얼마나 얄팍한 걸까? 차갑게 등을 돌려버림으로써 애써 내 속을 '쿨'한 것처럼 위장하려했던 건 아니었을까? 자명하게도, 내 존재의 기반이 부실하고 허약해, 한번도 그렇게 말하지 못한 채 속에 켜켜이 쌓인 미련덩어리들을 그렇게 마름질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준비됐으면 말해줘요.

기어이 그 말은 오늘도 젖은 새처럼 입 안에서만 퍼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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