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낯선 외국 땅에 도착해서 여장을 대충 풀고 밖에서 맥주를 마시며 낯선 밤의 풍경을 바라볼 땐 묘연한 기분이 들곤 한다. 잘못 배달된 주인 없는 편지처럼, 고국에 쌓아놓고 온 마음의 짐들을 덜고픈 욕망 때문인지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은 하나같이 슬픈 외연을 지니고 있음에도 아이러니칼하게 새로운 욕망을 거침없이 자극하곤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혼잣속으로, 마닐라의 허름한 호텔, 금연 건물인지라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난 처음 그를 보았다, 라고 시작되는 흔하디 흔한 싸구려 소설처럼 그렇게 개폼 잡는 여행담을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마닐라 여행에서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미 귀국한 마당에 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실은 이제 막 몽글기 시작한 추억이니만큼 내 혼자만의 응큼한 신비의 양념을 곁들일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정말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여장을 풀고 나서 호텔 바깥에서 맥주를 마시다 처음 그를 만났다.
그 허름한 호텔 바로 왼켠에는 스타벅스가 있었고, 그는 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 거기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물론 내 주둥이로 퍼뜨린 소문과는 전혀 판이하게도, '내 사랑 마닐라'을 충족시켜줄 만한 사건은 3박 4일 동안의 여정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그를 더 가깝게 보기 위해 스타벅스에서 두어 번 커피를 마셨고,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아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사진 두 방을 찍고, 악수를 나누고, 떠나기 전에 'You are so beautiful'이라고 박아 넣은 명함을 주었을 뿐이다.
막 호텔에서 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긴 했지만,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다른 점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전날, 용기 없는 나를 대신해 재우 형이 일 끝났으면 우리와 함께 맥주나 함께 하자고 찾아갔지만, 스타벅스의 수호신인 그 경찰 때문에 말도 못 붙이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의 마지막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내 사랑 마닐라'의 내러티브는 미완성인 채로 그렇게 내 손에 사진 두 장만 덩그라니 남겨놓고 끝났다.
나도 잘 알고 있다. 20대 중초반의 그 필리핀 청년이 우리에게 보여준 호의는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일 거라는 것. 재우 형은 보아하니 이성애자 같으니 진즉에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왜 그리 회의 일정이 끝난 후의 밤마다 그에게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나에겐 사건이 더 중요했다.
그는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서의 미소년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건? 이국에서 벌이는 어떤 연애 사건, 일상에 대한 보복을 위해 벌이는 동화 속 같은 은밀한 음모. 이미 지독하게 이미지에 중독되어 버린 난 필리핀 도착 첫날 밤, 텅 빈 스타벅스 안에서 의자를 챙기던 미지의 젊은 미소년을 보자마자 단박에 '사건' 냄새를 포착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였다.
심지어 우리가 흔든 손에 대꾸 한답시고 군인처럼 거수 경례를 붙이며 배시시 웃던 그 백치 같은 이미지조차 차츰차츰 사건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보여준 거수 경례, 자잘한 친절, 굵은 음성, 종이컵을 잘라 만들어 우리에게 내민 재털이 등 그 모든 것이 내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증거'라 믿는 아주 독한 판타지 소년인 것이다.
내 사랑 마닐라, 그렇게 단언하기 위해 추렴해놓은 단 하나의 이미지, 새벽 2시 텅 빈 스타벅스 가게에서 일을 하다 뒤를 돌아다보는 외국의 젊은 미청년, 그 축축한 눈과 백치 같은 미소, 기억 속에서 간단없이 사랑해마지 않을.
p.s
그곳이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엉망입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 낫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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