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_Free
2003.11.21 12:50

내 사랑 마닐라

조회 수 1423 추천 수 5 댓글 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Macy's Day Parade], Green Day


늦은 밤 낯선 외국 땅에 도착해서 여장을 대충 풀고 밖에서 맥주를 마시며 낯선 밤의 풍경을 바라볼 땐 묘연한 기분이 들곤 한다. 잘못 배달된 주인 없는 편지처럼, 고국에 쌓아놓고 온 마음의 짐들을 덜고픈 욕망 때문인지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은 하나같이 슬픈 외연을 지니고 있음에도 아이러니칼하게 새로운 욕망을 거침없이 자극하곤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혼잣속으로, 마닐라의 허름한 호텔, 금연 건물인지라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난 처음 그를 보았다, 라고 시작되는 흔하디 흔한 싸구려 소설처럼 그렇게 개폼 잡는 여행담을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마닐라 여행에서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미 귀국한 마당에 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실은 이제 막 몽글기 시작한 추억이니만큼 내 혼자만의 응큼한 신비의 양념을 곁들일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정말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여장을 풀고 나서 호텔 바깥에서 맥주를 마시다 처음 그를 만났다.

그 허름한 호텔 바로 왼켠에는 스타벅스가 있었고, 그는 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 거기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물론 내 주둥이로 퍼뜨린 소문과는 전혀 판이하게도, '내 사랑 마닐라'을 충족시켜줄 만한 사건은 3박 4일 동안의 여정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그를 더 가깝게 보기 위해 스타벅스에서 두어 번 커피를 마셨고,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아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사진 두 방을 찍고, 악수를 나누고, 떠나기 전에 'You are so beautiful'이라고 박아 넣은 명함을 주었을 뿐이다.





막 호텔에서 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긴 했지만,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다른 점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전날, 용기 없는 나를 대신해 재우 형이 일 끝났으면 우리와 함께 맥주나 함께 하자고 찾아갔지만, 스타벅스의 수호신인 그 경찰 때문에 말도 못 붙이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의 마지막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내 사랑 마닐라'의 내러티브는 미완성인 채로 그렇게 내 손에 사진 두 장만 덩그라니 남겨놓고 끝났다.

나도 잘 알고 있다. 20대 중초반의 그 필리핀 청년이 우리에게 보여준 호의는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일 거라는 것. 재우 형은 보아하니 이성애자 같으니 진즉에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왜 그리 회의 일정이 끝난 후의 밤마다 그에게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나에겐 사건이 더 중요했다.

그는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서의 미소년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건? 이국에서 벌이는 어떤 연애 사건, 일상에 대한 보복을 위해 벌이는 동화 속 같은 은밀한 음모. 이미 지독하게 이미지에 중독되어 버린 난 필리핀 도착 첫날 밤, 텅 빈 스타벅스 안에서 의자를 챙기던 미지의 젊은 미소년을 보자마자 단박에 '사건' 냄새를 포착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였다.

심지어 우리가 흔든 손에 대꾸 한답시고 군인처럼 거수 경례를 붙이며 배시시 웃던 그 백치 같은 이미지조차 차츰차츰 사건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보여준 거수 경례, 자잘한 친절, 굵은 음성, 종이컵을 잘라 만들어 우리에게 내민 재털이 등 그 모든 것이 내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증거'라 믿는 아주 독한 판타지 소년인 것이다.

내 사랑 마닐라, 그렇게 단언하기 위해 추렴해놓은 단 하나의 이미지, 새벽 2시 텅 빈 스타벅스 가게에서 일을 하다 뒤를 돌아다보는 외국의 젊은 미청년, 그 축축한 눈과 백치 같은 미소, 기억 속에서 간단없이 사랑해마지 않을.  







p.s

그곳이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엉망입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 낫다는.




?
  • ?
    꽃사슴 2003.11.21 13:01
    덤입니다. 대표 님은 목숨 걸고 워크샵이랑 회의랑 참가하고 있는데, 저는 졸다졸다 지쳐서 잠시 1시간 동안 그 근처 해변으로 도망쳤었습니다.









  • ?
    한상궁 2003.11.21 19:09
    아니오. 조명이 어두워서 그렇지 스타벅스 청년은 실물과 똑같이 나왔소. 꽃사슴 그대는 무어가 두려운 게요...
  • ?
    ugly2 2003.11.21 19:18
    꽃사슴님의 글을 읽으면...
    이번 여름휴가때 일본여행에서 뭔가 "사건"을 만들고자 했던 저의 바램이 생각나서, 배시시 웃고있습니다. ^^ 저도 몇장의 사진속에만 남아있는 그 사람이 다시한번 보고싶네요~
  • ?
    한? 2003.11.21 21:33
    사진 잘 받고요?
    제가 아는꾳미남 동생이 하나있는데 꽃사슴께 머지않아 바치겠나이다.(기대해도 좋음)
    키:175,몸무게:58~61,나이:24세 현재:학생.특징:백치미,한가지 단점이 있는데 아직 일반이여요 호호호 꽃사슴님 힘내세요. 좋은일이 많이 있겟죠!!
  • ?
    민정호 2003.11.21 21:59
    코윗부분은 고수를 닮았는데 아랫부분이 영 어설프구만...
    그래도 어설픈 고수쯤으로 여겨주마.
    꽃사슴이 좋아할 스타일이네?
  • ?
    꽃사슴 2003.11.21 23:04
    한상궁/두렵소. 나의 심미안이 바닥 드러낼 것 같아서 말이오.

    어글리2/해외여행을 많이 하여, 각국의 저런 사건들을 수집, 나중에 사진 전시회를 여는 게 내 꿈이오.

    한?/일반이든 이반이든 삼반이든, 소개는 언제든 대환영. 다만 부끄럼을 잘 타는 절 고려하여, 언제 친구사이사무실에 데려 오세요. '공개적 추근덕거림'은 나의 힘.

    민정호/본디 두 손으로 아슬하게 받아내야 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쌍꺼풀지고 큰 눈은 내 스타일이 아니오. 고수는 만리녀한테나 주셈. '실연'을 주엔진 삼아 이제는 변신모드 중. 남자면 다 됨.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28 오늘은 보드게임(카탄)정모가 있는 날입니다. 내의녀 시연 2003.12.03 2221
427 그 때가 좋았지~ 에휴~~~ 2 황무지 2003.12.03 7256
426 장수모 오늘도 모입니다. 1 수랏간최고상궁 2003.12.03 2121
425 쌀쌀한 날씨에... 1 M.W.H(maxwellhouse) 2003.12.02 2308
424 나도 올해의 신입회원인데 -.-+ 5 차돌바우 2003.12.02 2046
423 드디어 12월입니다.. 3 MC 몸 2003.12.02 3108
422 역시 힘들군요... 2 파김치 2003.12.02 3409
421 [12월 1일 에이즈의 날을 맞이하여] 정부는 에이... 동인련 2003.12.02 1034
420 [국가인권위에 진정하며] 동성애자는 헌혈할 권리... 동인련 2003.12.02 1005
419 토요일행사 오신분들 감사합니다. 3 2003.12.01 1180
418 호주제폐지, 촛불대회로 앞당겨요. 교보문고에 2003.12.01 1159
417 (펌)스웨덴 동성 커플 인정에서 동성 결혼 인정으... 모모 2003.12.01 1139
416 때 이른 인사 2003.12.01 988
415 지금 퇴근합니다. ㅠ.ㅠ 2 차돌바우 2003.12.01 1040
414 한가한 일요일입니다.. MC 몸 2003.12.01 1478
413 퀴어영화제 12월 다큐멘터리 내일부터 시작입니다!! 서울퀴어아카이브 2003.12.01 983
412 난... 다 좋아~~ ^^; 1 황무지 2003.11.30 1110
411 앗싸~~ 사진 나오는 구나~~ ^^ 2 차돌바우 2003.11.30 1122
410 울다 지쳐 잠들고 싶었습니다. 2 영로 2003.11.30 1179
409 주말에 채팅방좀 활성화 되었으면 잠금이 2003.11.30 948
Board Pagination Prev 1 ... 689 690 691 692 693 694 695 696 697 698 ... 715 Next
/ 715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