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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타나주아'를 보다 보면 에스키모인들이 '빅맨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에스키모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커다란 사람이라 지칭했을 거고, 영어권 자막은 chief이라고 옮기지 않고 'big man'이라고 옮겼다. 영어권에서 이 사람을 가리키는 공식적인 말은 '빅 맨'이다.

빅 맨은 키가 큰 사람도, 힘이 센 사람도, 또는 팬티 상표도 아니다. Big man은 바로 '고기를 나눠주는 남자'를 의미한다. 영화 아타나주아의 에스키모인들이 바로 빅맨에 관한 옛노래를 부를 때도, 아타나주아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이 사냥해온 풍성한 물개 고기를 앞에 놓고 '자, 여러분 오늘은 제가 고기 잔치를 열겠습니다!'라고 외친 직후였다.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은 신대륙의 북서안 쪽을 탐험하다 인디언들의 놀라운 풍습을 발견했다. 포틀래치potlatch였다. 겨울이 되면 인디언들 중 음식이 좀 풍성한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왜 저렇듯 경쟁적으로 음식을 나눠주고 있는지, 왜 공짜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지.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고기와 음식을 나눠주는 그 사람들을 바로 'Big man'이라고 불렀다.

이 빅맨들은 자기 집 창고에 있는 말린 고기와 음식들을 모두 내다놓고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였다. 잔치가 끝난 후면 음식이 남아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음식이 준비가 되면 또 그렇게 낭비를 해가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 포틀래치 축제에서 금기 사항은 '교환'이다. 지금도 포틀래치 문화가 남아 있는 미국 인디언 지구에서 당신이 만약 인디언들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 즉각 보답으로 그에게 선물을 준다면, 당신은 바로 반칙 위반을 하게 된 것이다. 인디언은 당신에게 무척 화를 낼 것이다. 인디언의 선물은 '대가 없는' 선물이다.

대신, 대가가 없는 대신, 교환이 없는 대신 선물을 준 자는 '명예'를 얻게 된다. 이 명예가 바로 포틀래치 축제의 핵심이다. 고기를 사람들에게 베풀고 선물을 나눠주는 big man이 순수하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명예'였다. 그가 가지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수고했소. 당신은 빅맨이오'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응답의 차원에서 바로 선물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빅맨은 고대 사회의 추장 제도 이전의 사회에서 발견된다. '빅맨'의 시대가 끝나고, 그 빅맨이 제도화된 게 바로 추장인 셈이다. 본디 계급사회는 '잉여의 축적'으로부터 발원된다. 추장이 생기고 마을 공동의 곡식이 그 추장의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노인/청년으로 대별되는 연령사회, 더 나아가 추장이 왕이 되는 계급 사회로의 이행을 목도하게 된다.

포틀래치는 바로 이 잉여의 처리 방식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당시 식량 중 가장 소중하게 여겨졌던 '고기 배분'으로부터 시작된 풍습이지만, 포틀래치는 점차 명예를 얻기 위한 풍습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자신과 식구가 먹고 남은 잉여가 생길 경우 빅맨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마지막 한톨까지 쓸어서 소비해버린다. 대가 없는 잉여의 소비, 이 낭비적인 축제는 막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물 건너 온 서구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네들의 조상들 역시 포틀래치 문화를 경유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들은 '빅맨'이 음흉한 속내가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대가를 속으로 바라면서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또는 참 마음씨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실성한 노친네쯤으로 낭만화하기도 했다.

잔치를 여느라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빅맨은 잉여를 가지고 권력을 쥐는 계급 사회 이전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생태사회주의자인 머레이 북친 류의 생태주의자들은 바로 이 빅맨 시대의 잉여 처리 방식에 주목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 포틀래치는 잉여 때문에 생긴 계급, 차별, 권력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탁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빈 해리스처럼 포틀래치 같은 문화는 인구 압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될 것이라 보는 비관론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빅맨의 시대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열심히 일하고 혹여 남는 것을 축적하지 않고 베풀어버리는 문화, 해서 빅맨의 시대에는 굶어 죽거나 낙오돼서 배를 굶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에코 페미니즘 또는 뤼스 이리가레이 류의 페미니즘 역시 상상계의 여성성을 복원, 확장하여 새로운 포틀래치를 구상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처럼 이 낭비적인 소비, 포틀래치를 더욱 확장해서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부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의도적인 포틀래치가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외연을 무너뜨리는 한 가지 방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끔 그 옛날 빅맨의 시대는 어땠을까 하고 쓸데없이 공상에 잠기곤 한다. 돈, 섹스의 교환가치, 명예, 이름값에 덜미가 잡혀버린 시대에 빅맨의 시대를 사유하는 게 하긴 낭만주의자란 오해의 표식을 받을 만하긴 하다. 이런 시대에 포틀래치는, 또는 헐값으로 빅맨을 흉내내려는 모든 제스추어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대화의 단절이 곧 오해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착한 척 구는 빅맨 행세를 내려는 태도 역시 오해를 촉발하긴 마찬가지다.

난 지금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대한 우화 하나를 빅맨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계몽주의적 합리성을 진저리나도록 증오하는 성격이어선 그런지 몰라도, 이 작은 동네에서 요동치는 참 많은 합리성으로 직조된 카프카적 세계, 온갖 말씀과 율법의 뼈다귀로 직조된 성채에서 흘러나오는 경구들보다, 가끔은 빅맨 이야기가 훨씬 더 재밌고 유머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성채 밖 그림자 속에 웅크려 사유하는 일, 조금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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