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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다은/ 영화평론가

최근 한국 공포영화들 속에서 소녀들의 존재는 남성 판타지가 걸러낸 기존의 전형적 이미지에서 벗어난다. 사춘기 소년들의 통과의례를 위해 그들의 언어 안에서 정의되던 따분하고 비현실적인 소녀들은 자신의 욕망과 상실감에 귀기울이기 시작한다. 소녀들은 더 이상 소년들을 위한 한순간의 마스터베이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남근 중심적 언어로는 자신들의 삶과 관계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음을 알아버린 이 똑똑한 소녀들은, 그 똑똑함 때문에 광기와 우울에 사로잡히고 귀신이 되거나 귀신을 보지 않고서는 자신을 언어화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 소녀들은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공포의 주체가 되어 오랜 시간 서사의 중심이었던 남성 인물 없이도 촘촘한 이야기의 그물을 엮는다.


남성 주체와 여성 대상 사이의 일방향적 서사가 있던 자리에는 가부장제의 엄격한 금기 속에서 뒤틀려 죽음이 되어, 혹은 더 이상 현실계의 모습이 아닌 채로 돌아온 소녀들의 욕망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된다. 이 소녀들의 욕망에는 남성이라는 매개체가 없다. 오직 귀신이 된 소녀와 귀신을 보는 소녀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성애 중심적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여고괴담> 시리즈나 <장화, 홍련>을 비롯한 일련의 공포영화들 속에 숨겨진 동성애적 의미들은 이성애 중심적 사회의 호기심을 자극할 기이함 혹은 장르적 특성이 아니다. 기존의 영화 속 이성애 담론이 성 본능 자체에만 몰두할 때, 공포영화들 속 동성애 담론은 곧 소통과 관계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녀들은 모두 학교와 집이라는 가부장제의 상징화된 폐쇄적 공간 안에 갇혀 그 공간의 규범 속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잃고 관습화된 관계에 고통받는다. 남성 중심적 질서의 금기에 억눌려버린 그녀들의 언어는 죽지도, 애도되지도 못한 채 상처 난 몸이 되어 현실로 돌아온다. 온몸을 언어로 만들어 귀신의 모습으로 귀환한 소녀들과 그 귀신의 모습을 온몸으로 아파하고 함께 피 흘리며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소녀들은 가부장제 내에서의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처럼 ‘함께’ 몸으로 체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 속 동성애는 사회적 승인 욕구가 아닌 관계에 대한 욕망이며 여성 언어, 여성 서사에 대한 욕망이다. 또한 그것은 현실의 비극적 징후가 된다.


현실의 소녀는 아이와 어른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무정형성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이 소녀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모호한 존재, 귀신과 대면하거나 귀신이 되는 것, 그리고 그녀들에게서 사회의 규범적 언어를 거부하는 동성애적 관계가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정의를 거부하는 것들의 정의될 수 없는 만남. 여기에 소녀들의 필연적인 운명과 공포와 슬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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