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정한 : 사랑밖엔 난 몰라

그의 별명은 '마님'이다. 항상 단아한 행동거지와 말씀씀이로 천박한 동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온 바, 마치 조선 시대 화폭에서 걸어나온 마님을 대하는 듯한 정갈함이 항상 몸에 배여 있다. 또 그는 2000년도 친구사이 회장이기도 하다. 말수를 아끼는 그 세심함 뒤엔,  '쌀'과 '살'을 구별 못하고 '의'와 '으'를 늘 흐릿하게 번갈아 사용하는 경상도 출신 특유의 혀 놀림, 그리고 이따금 드러내는 조용하되 맑은 투지, 아울러 섬마을 소년의 미소 같은 소박한 꿈이 있다. 이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선 커밍아웃 인터뷰의 열번째 주인공으로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신정한님은 오년 쯤 전 친구사이 커밍아웃 인터뷰의 첫 번째 인터뷰 주자로 나섰던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년 전 싸이트를 개편하면서 데이터를 분실하는 불상사가 발생, 이제사 다시 요청을 드리게 된 건데요, 번거롭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게요.

...... (철렁)
(인터뷰어 주 : 참고로 열 번째 커밍아웃 인터뷰 주자는 말수가 적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신상 소개부터 해 주세요. 이름과 나이는?

이름은 신정한 나이는, 음... 만으로 삼십 칠세 (얼굴 붉히며 웃음)

웃으시니까 거짓말 같은 걸요.

어, 맞잖아요.

네. 지금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회사원이죠. 학습지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직장에는 만족하시나요?

그런대로요. 다른 직장에 비해 아침에 늦게 출근해도 되고, 업무량이나 스케쥴도 내가 조절할 수 있어서 좋아요.

요즘엔 다들 혈액형 물어보는 게 유행이던데, 무슨 타입이시죠?

A형 입니다.

내친 김에 별자리까지 할까요?

네, 전갈자리요. 전갈자리로 말하자면 음... 신비스럽고 고독을 즐기지만 강한 열정을 품고 있고...

됐구요, 인터뷰의 흥행을 위해서는 빠질 수 없는 개인적 질문 한 가지만 더 할게요. 알고 보면 숨겨진 몸짱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인가요?

글쎄요. 후후(손으로 입을 가리며) 뭐 그런 편이죠.

의외로 뻔뻔스러운 면도 있으시네요. 본인이 낸 소문이라는 설에 어쩐지 한 표를 던지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평소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시죠?

어우(손사래를 친다) 안 하는데...

저런, 설마 본인을 화장품 모델 연예인으로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기왕 인터뷰에 나선 김에 네티즌들을 위해 몸매 관리법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아니면 괜찮은 피트니스 클럽이라도 소개해주시든가요.

그냥 짬짬이 운동하는 게 다인걸요.

흠, 인터뷰어의 명예를 걸고 이대로 물러설 순 없죠. 어떤 운동이요?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이죠.

흑흑. 이러다 인터뷰 망치겠군요. 하는 수 없이 제 ‘게이다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사전에 취재한 부분들을 좀 써먹어야겠습니다. 동네 수영장도 틈틈이 다니시고 장롱 속에 아령을 감춰다 놓고 가끔 운동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죠?

후후

인정하신 걸로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식이요법은 안 하시나요?

그런 거 안 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많이 먹는 걸요.

좋아하는 음식이 어떤 종류인데요?

담백한 음식을 즐겨 먹습니다. 육식보단 채식을 좋아하고요.

그래요? 비밀리에 건강 보조제를 먹고 있다는 걸로 아는데요.

아이, 참. 그건 그냥 살 좀 붙이려고... 사실 별 효과도 못 봤어요.

네, 갈 길이 머니까 여기서 넘어가 드리죠.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은 하셨어요?

형, 친구, 누나... 어머니 빼고 다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언제 하셨죠?

한참 되었지요... 한 십 년 정도?

커밍아웃을 결심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던 거 같아요. 오래 되어 잘 기억나지도 않는데...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중간에 적당한 기회가 와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 거 같아요.

커밍아웃 후 경험한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면 이야기해주시죠.

뭐, 별로... 없어요.

설마, 형이나 누나도 아무 말 안 하셨다구요?

제가 막내라 형제들이랑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런 부분에 대해 지식이 없었는지 특별한 반응보다는 다들 듣고만 계셨던 거 같아요. 속정이 깊으신 분들이라 속으로 생각하신 건 있었겠죠.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거친 반응 같은 건 없었어요.





가족들 모두가 정한님처럼 신중하고 말을 아끼는 분들인가 봐요. 그렇다면 커밍아웃 후에 가족들과 갖고 있던 관계에 변화가 있었나요?

별로 없었어요. 다만 그 후로 결혼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엄마가 결혼 이야기 꺼내도 형이나 누나들이 막아주죠.

어머니한테도 커밍아웃 하실 계획인가요?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일부러 어머니를 빼놓은 건 아니었어요. 다만 어머니한테는 이야기할 만한 적당한 기회가 없었지요. 지금도 언젠가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주욱, 나랑 가장 가까운 분이셨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거든요.

그렇군요. 게이커뮤니티에 들어오게 된 사연 좀 들어봐도 될까요?

1998년 무렵 이었습니다.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알게 된 단체 '친구사이'가 시작이었지요. 사연이라면 글쎄요... 사실 어렸을 땐 내가 동성애자라서 남들보다 불행하다거나 불편하다는 건 못 느끼고 살았었죠. 그런데 나이가 자꾸 들어가니까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하고 나에게도 동성애자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물색하던 중에 친구사이라는 단체가 걸린 거죠.

90년대 후반이라면 극장이나 사우나 등 게이들이 모이는 공간, 아니면 피씨 통신(인터뷰 주: 당시에 활발했던 온라인 게이 커뮤니티가 피씨통신이었습니다.) 등을 통해 ‘데뷔’하는 게 더 흔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연인을 찾겠다는 욕심이 컸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 데뷔했겠죠. 하지만 저는 동반자, 혹은 파트너를 찾겠다는 생각 보다는 친구를 만나 좀 덜 외로워보자는 생각이 컸던 거 같아요.

그럼 친구사이에서 활동하시며 원하던 친구들은 많이 만나셨어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게 친구들이 있음에도 예전에 정한님은 가끔 소리 없이 사라져서는 며칠 후에 나타나곤 하는 일이 있었지요. 당시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난무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정확히 해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후후.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만나러 고향에 다녀오곤 했었죠. 그때만 해도 가끔 충동적으로 보고 싶어질 때가 있었거든요.

그게 첫사랑이었던 건가요?

아니, 두 번짼가?

자, 그럼 이제부터 첫사랑부터 이야기를 들어가 볼까요?

첫눈에 반했어요.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지요. 도서관 문을 열었을 때 그 친구가 앉아있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지더군요. 그 친구의 뒤에 후광이 비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거든요. 마치 그때 유행하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았어요. 그땐 동성애자다 뭐다 보다 무조건 저 친구가 좋다는 감정이 앞섰어요. 내가 동성애자라는 건 그 이후에 서서히 느끼게 되었던 거고요.

사랑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인터뷰가 활발해지네요. 정한님은 참 로맨틱한 학창시절을 보내셨겠군요. 그 분이랑은 얼마나 사귀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정말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어요. 학교에서 뿐 아니라 하교 후에도 우리 집이나 그 친구 집에 놀러가서 같이 자는 일이 대부분이었죠. 학교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단짝이었고요. 졸업하고 나서는 조금씩 소원해졌는데 대학교 삼학년 정도 때까지는 드문드문 만났던 거 같아요.  

그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근데 결혼은 했어요. 나한테 굉장히 미안해하더군요. 그 친구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어요. 여자 친구가 쭈욱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교회에서 만난 친구랑 결혼하게 되었다고. 그 친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거든요.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어 : 음...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커밍아웃 게시판에 올려도 될지 염려되는데요
신정한 : 흠. 걔가 어떻게 알아. 자기 이름도 안 나올텐데...


그럼 첫사랑의 남자가 결혼을 하면서 둘이 헤어지게 된 건가요?

그런 셈이죠.

지금은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가끔 소식은 들어요. 서울에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지금은 별 관심 없어요.

보기보단 굉장히 쿨하시네요.

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겠죠. 관심을 가지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닌가요?

그렇군요. 이제 정한님을 철마다 고향으로 불러들이던 문제의 두 번째 남자이야기로 넘어갈까요?

대학 일학년 때부터 알던 친구였고 삼학년 무렵 급격히 친해졌어요. 도서관에서 만났는데 같이 어울리다 보니까 가까워졌죠.

또 도서관이요? 의외로 학창시절엔 공부벌레였었나 보군요. 아님 다른 이유가 있었거나요. 그런데 보통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알고 지내다가 나중에 사귀게 되는 건 흔하지 않잖아요. 혹시 첨부터 흑심을 갖고 기다리셨던 건가요, 아님 다른 계기가 있었나요?

글쎄요... 그 친구는 아주 이쁘게 생긴 아이였어요. 꽃미남이었죠. 첨부터 호감은 있었는데 성격이나 사는 모습이 나랑은 잘 안 맞았어요. 그래서 안면만 트고 지냈죠.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자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음... 그 친구가 저를 자기 친구의 생일파티에 데려간 적이 있었어요.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좀 당황했었죠. ‘얘가 왜 이러나’ 하면서요. 하지만 그때부터 저도 예전과 다른 느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밤이나 낮이나 그림자처럼 붙어서 지내게 되었죠.

한 번 더 헤어지게 된 동기를 물어봐도 될까요? 곤란하시면 노코멘트로 넘어가도 되요.

막연했어요. 두 사람 다 머리 속에 꿈꾸는 동성애자로서의 삶은 있지만 구체적이진 못했거든요. 한국에서 살기는 힘들 것 같고 다른 나라로 같이 갈까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너무 미래가 불투명했죠. 그런 식으로 둘의 관계를 끌고 가다가 나이가 들면서 힘도 빠지고 흐지부지 되었지요. 그 친구는 결혼을 했고요. 결혼 소식을 듣고부터는 제가 의도적으로 연락을 자제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뭐 다 옛날 이야기죠. 시간도 많이 흘렀잖아요. 희미해진 거 같아요.  

네. 이쯤에서 옛날 남자들 이야긴 그만 접기로 하겠습니다. 지금도 애인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만나셨어요?





어느 동호회 모임에서 만났는데 후후후. 그 쪽에서 계속 만나자고 해서...

설마 아무나 만나자고 해서 그냥 만나는 건 아닐 거잖아요? 약간이라도 끌리는 점이 있었으니까 오케이 했던 거 아닌가요?

(오프 더 레코드 : 대답 잘해야 해요.)


글쎄... 첫눈에 끌렸다기보다 날 좋아해주니까...

에이, 약해요. 약해. 좀 더 자신있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그 분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음... 자상하고, 성실하고, 인간 됨됨이도 괜찮은 사람인 거 같고...

그래서 현재까지는 잘 되고 있어요?

그런 거 같아요.

그런 거 같다니... 성격 참 특이하시네요. 예스 오어 노를 분명히 해주세요. 애인이 이 인터뷰 읽고 정한님한테 삐칠 수도 있으니까.

예스.

오랜만에 다시 연애를 하면서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어렸을 때랑은 다를 텐데요.

글쎄요, 왠지 모를 불안감이랄까. 첨엔 가치관이 좀 다른 것도 힘들었고...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게 앞으로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존재잖아요.

저런, 애인이 그 이야길 들으면 불안해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제 질문 방법이 잘못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럼 어렸을 때랑 다르게 연애를 하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음... 좀 안정된 거 같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친구사이 활동하는 것들도 잘 이해해주니까 좋아요. ‘나는 못했지만 너는 지금껏 해온 거 있으니 열심히 해.’ 라는 식이죠. 서포트 해주겠다고 하네요.

아하 네. 내조를 잘하신다는 말씀? 아니, 외조인가? 아무튼 이번 애인은 절대 놓치면 안 되겠군요.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애인과의 관계에서 이런 것 하나는 꼭 개선시키자는 부분이 있다면 이 기회에 밝혀주시죠.

글쎄... (삼 분간 침묵)





(인터뷰어, 대답을 기다리다 거의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음) 백프로 마음에 든다는 말씀? 그럼 제가 한 발 물러서서 질문 드리지요. 애인과의 관계를 더 기름지게 발전시키기 위해 본인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없어요?

음... 관대해져야 되는데 애인이라서 안 되는 게 있어요. 제가 친구들이나 동생들한테는 너그러운 편이거든요. 하지만 애인에게는 내 사람이라서 생기는 욕심 같은 게 있더군요.

이해가 갑니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인데요, 옛사랑의 남자가 지금 나타나서 매달린다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건 지금의 애인에 대한,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죠. 옛 남자친구들을 만난다고 해도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구요.

우문현답이네요. 이 자리를 빌어 지금 애인한테 하고 싶은 말은?

그 사람이 언젠가 반지를 주면서 ‘우리 절대로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말자’는 말을 했었어요. 그러기로 약속 했는데, 그 바로 얼마 후 ‘헤어지자’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뒤에 잘 풀어냈지만 아직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가 성급했던 부분도 있었고.

짓궂은 질문이지만, 어떻게 풀어냈어요? 티격태격하는 다른 연인들을 위해 노하우를 전수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웃음) 그냥... 아무튼 잘 풀렸어요.

네. 공개하기 곤란한 둘만의 비밀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넘어갑니다.. 솔로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뭐랄까...... 누구나 다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

?  정한님이 갖고 있는 장점을 애인되시는 분이 용케도(!) 발견했다는 말이군요. 좀 더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마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던데 어떤 연유일까요?

아이 참. 나도 몰라요. 그냥 예전 룸메이트가 마님이라고 불렀어요. 같이 살면서.

네. 커밍아웃 두 번째 주인공이었던 천정남씨가 예전 룸메이트였죠? 그 분이 들려준 바에 의하면 같이 살림을 하면서도 손끝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늘 부잣집 마님처럼 처신을 해서 그랬다던데요.

글쎄.

마님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죠?

별로.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어 :  형이 마님이 아닌 거 같아?
신정한 : (정색하며) 내가 무슨 마님이야.


네. 성공적인 인터뷰를 위해 제가 또 한 발 양보해드리지요. 아마도 몸가짐이 조신하고 성품이 온화해서 그렇게 불리는 거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솔직히 제가 인터뷰하면서 느끼기에도 마님보다는 본인이 가끔 쓰는 ‘물바람’이라는 닉네임이 성격이나 분위기에 더 잘 맞는 거 같군요. 물바람이라는 닉네임 어떻게 생각해냈어요?

책, 시 등에서 나왔던 말 같은데... 물처럼 바람처럼 순리에 맞게 흐르는 듯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원대한 목표를 정해놓고 살아야겠다는 욕심이 없어요?

네 없어요. 사실은 너무 욕심이 없어서 문제죠.

요즘엔 그런 욕심 없는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후후... 사실은 나도 욕심 없는 사람이 좋아.

그럼 결국 본인의 삶에 만족하신다는 말씀? 아둥바둥 사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음... 욕심 그릇을 조금만 작게 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답니다. 사실 저를 무소유주의자라고 하는데, 저라고 욕심이 없겠어요? 하지만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고 편법을 쓰지는 말자는 거죠.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책이나 종교의 영향인가요, 아니면 가정환경, 혹은 천성인가요?

어릴 때부터 ‘내가 좀 더 손해보고 살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던걸요. 아버지가 남한테 손 안 벌리는 스타일이었어요. 옛날 선비 같은 분이셨죠. 집에 오는 객들 다 거두어 먹이고... 아마 저도 아버지를 많이 닮은 거 같아요. 돈이 되어도 안 좋은 일은 안하게 되고... 누나들이나 우리 가족들은 다 그렇게 사는 거 같아요.

한 마디로 법 없이도 살 분들이겠군요. 다음 화제로 넘어가죠. 청소년 동성애자들이라면 삼십대 이상 동성애자들이 살아온 길에 대해 궁금해 할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일전에 어느 청소년 동성애자가 ‘보고 따라갈 상’이 될만한 어른 동성애자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어른 동성애자로서 정한님이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동성애자 이성애자를 떠나서 인간적인 삶의 문제인거 같아요. 사람으로서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갈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내가 동성애자라서 이렇게 저렇게 살고,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 말 듣다 생각났는데 정한님은 청소년기에 특별히 동성애자로서 갖는 고민이 적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글쎄요,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신이 나를 더 끔찍이 사랑해서 동성애자로 만들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죠. 그때는 앞으로 나는 남들보다 약간 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하나보다. 결혼을 못하겠구나 하는 등의 생각을 했었고 때문에 직업 선택이 조금 더 달라졌겠죠.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중에 상처받기 싫어서 피했거든요. 아무튼 저는 즐겁게 지냈어요. 지금 어린 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로 즐겁게 친구들 많이 사귀고 소통하며 지내라고 말하고 싶고요.

고민이 적었다기보다는 고민은 많았지만 그걸 힘든 일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씩씩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들려집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도 교육에 관련된 일이니 청소년들과의 접촉이 많으실텐데  지금이랑 정한님의 청소년 시절이랑 비교해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요?

청소년들보다 부모님들에게 큰 차이를 느껴요. 가족이기주의라고 할까? 자기 자식이라면 무조건 모든 걸 잘하게 만들려는 부모님의 욕심에 가끔씩 당황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정한님의 무소유 무욕심 가치관을 전파시켜야겠네요?

그냥... 인간 일등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일등인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게 문제인거 같아요. 그네들이 말하는 일등이란 돈이나 권력 그런 거겠죠.

흠, 인간 일등을 만들자. 좋은 말이네요. 참. 2000년도 친구사이 대표를 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서기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으로 봐서는 대단한 결단 같은데요?

(한숨) 떠밀려서 하게 되었죠.

대체 누가 떠밀었어? 그래도 정한님의 능력을 주위에서 믿었으니까 밀었던 거지, 뭐 벼랑 밑으로 민 건 아니잖아요?

네. 사전 준비 없이 시작하긴 했지만 그 후로 친구사이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향성, 일처리 방식에 대해서 윤곽이 선 거 같아요.

대표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음... 지도력 부족? 개인적인 마음속의 침체기도 있었고 당시에는 같이 일하던 활동가들도 모두 정체되어 있었고... 지쳤다고 해야 하나? 분위기 자체가 침체되어 있어요. 그걸 깨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위 친구들은 힘들 때 정한님을 많이 찾습니다. 그게 정한님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인 듯도 싶고요. 그때와 지금의 친구사이를 비교한다면요?

북적대기도 하고 많이 밝아져서 좋은 거 같아요. 이런저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냥 포기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요.

퀴어문화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죠? 해마다 퀴어퍼레이드 때면 늘 앞장에서 행진을 하시거나 춤을 추시잖아요. 거리에 서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열심히 해야겠다. (웃음) 동작 안 틀리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거.

사람들 시선은?

그런 거 의식 안 해요.

타고난 무대체질인가요?

아냐, 아냐.

그렇다면 처음 거리에서 춤을 추게 된 동기는?

몰라요. 그냥 주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거죠. 솔직히 저는 먼저 나서서 뭘 하자고 하는 게 잘 없어요. 주변 환경의 변화, 사건에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고요. 대신 어딜 데려다 놔도 대신 적응은 아주 잘 하지요.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잘 지냈어요.

계속해서 ‘물바람’ 의 콘셉으로 인터뷰를 몰고 가시는 군요. 좋습니다. 지금 정한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어떤 게 있을까요?

(삼분 공백) 그냥 작은 일이나마 나를 위해서 또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무인도에 갈 때 가지고 갈 것 딱 세 가지만 꼽으라면요?

없는 거 같은데...

애인도 안 데려가고 싶으세요?

(웃음)

여행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요?

히말라야 산

혼자?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어 :  인터뷰 읽으면 애인이 화내겠군.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요?
신정한 : 괜찮아요.
인터뷰어 :  그렇게 자신 있어요?
신정한 : (웃음)


히말라야 산이라니, 대단하시네요. 가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

그냥 산이 좋아요.





인터뷰어의 기운을 빼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산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지요. 물론 산악인들에게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요. 이제 마지막으로 빼먹은 질문 꼭 하고 싶은 말이나 '미모의‘ 인터뷰어에게 묻고 싶은 말은요?

글쎄... (오 분간 침묵)

죄송합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요. 정한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권의 책과 한 곡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 그리고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대중가요지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정한님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지면 자연스레 하나로 융화가 되는 거 같아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쪼록 물바람처럼 유유자적하고 멋진 삶 사시길, 또 애인과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인터뷰 내용과 사진은 신정한 씨와 인터뷰어의 허락없이 다른 곳에 절대 게재할 수 없습니다.
(신정한 : moolbalam@hanmail.net)
(글 : 전재우 jjoohyun@chol.com, 사진 : 이송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