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김상백 : P싸롱의 추억

인터뷰 및 정리 코러스보이

사진 선가드

 

마흔이 넘은 사람의 인생은 얼굴에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그렇다. 이십대 시절의 그는 우수에 젖은 표정의 순정만화 속 창백한 청년 이미지 그대로였다. 소녀들이 꽤나 따라다녔을 게다. 인터뷰이의 친구인 이성애자 여성 또한 그가 게이인줄 알면서도 소개시켜달라고 조르곤 했었으니까.

세월이 훌쩍 지나고 여느 게이들처럼 만만치 않은 삶을 헤쳐 온 지금 그의 모습은 꽤 달라졌다. 인상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에서는 편안함과 여유가 넘친다. 마주 앉기만 해도 멘토링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잔뜩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종로3가역 근처 큰 길가에 위치한 그의 일터인 게이바 ‘비바(Viva)'로 당신들을 안내한다.

 

코러스보이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소개 부탁드릴게요.

김상백 : 이름은 김상백이고요, 나이는 한국 나이로 마흔 넷 69년생입니다.

 

코러스보이 : 친구사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커밍아웃 인터뷰 보시고 혹시 본인에게 제의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은 하셨는지?

김상백 : 전혀 못했어요. 아... 우리 그냥 편하게 하자.(웃음) (주:김상백님은 인터뷰어랑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이로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 존칭어를 생략한 점 양해 바랍니다.) 인터뷰 제안이 올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지. 어? 내가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나 이렇게 생각했지.

 

코러스보이 : 작년에 다른 일로 형 만나러 와서 이야기 하다가 아, 참 이야기 해줄 거리가 많은데 왜 여태까지 안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친구사이 회원들 모두가 형 이야기 너무 듣고 싶어 했어요. 맨날 상백이 형 인터뷰는 왜 안하니? 그러면서.

김상백 : (웃음)

 

# 후덜덜 하면서 가판대에서 ‘선데이서울’을 샀어.

 

 

코러스보이 : 커뮤니티 데뷔하던 시절 이야기부터 얘기 들어볼게요.

김상백 : 아, 나는 음... 성향 문제로 고민을 할 때, 사춘기 때부터 내가 남하고 다르구나 하는 걸 너무 잘 알았고, 계속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땐가 ‘선데이서울’을 봤는데(웃음) 응. 호모들의 무슨 뻘짓거리 막 이런 게 표지에 있는 거야. 내가 굉장히 소심한 애였거든. 근데 그때 후덜덜 하면서 가판대에서 선데이서울을 샀어. 봤더니 극장에서 막 호모들이 변태 짓을 하고 이런 게 막 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복음처럼 들리는 거야. 그러니까 섹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헉, 나 말고도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 그걸 보고서 희망을 가졌어. 그래가지고 대학에 들어왔는데 처음으로 짝사랑을 하게 되면서 가슴앓이를 너무, 너무너무 크게 하고 정체성의 고민도 너무 하다가... 여름방학 때 아, 나 같은 사람을 너무 보고 싶어서 종로에 처음 나왔지. 선데이서울이 가르쳐준 P극장(주: 파고다극장- 지금 파고다고시원과 파고다타운이 있는 건물에 있던 극장으로 70년대 중반이후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고 2002년 폐관되었다. P싸롱으로도 불리웠다.)에 왔었다가. 쌍팔년도, 88년도에. 두 번인가 갔다가... 사람이 (갈 데가 없으니) 오게 되잖아.

 

코러스보이 : P극장 분위기는 어땠는데요?

김상백 : 그땐 단관이었어. 지금은 망했지만, 옛날 극장이니까 얼마나 거대해. 화면도 크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좀 웃겼었어. 뒤에 다 서 있고,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어둠속에서, 그리고 뭐 앉으면 옆에 와서 탁 붙고, 또 그때는 뭐 정보가 별로 없던 시대였으니까 화장실 낙서, 선데이서울 이런 걸 통해서 사람들이 알음알음 오던 땐데, 모르는 사람이 오니까 쫓고 쫓기고 이런 추격전도 보이고, (웃음) 진짜로 막 그랬지.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인데 극장은 가기 싫고, 사람하고 대화를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근처를 빙빙 두 시간을 돌았어. 게이빠를 못 찾아서. 고민이 많으니까 낙원동 일대를 다니는 데 발은 젖고 다리는 아프고... 너무 피곤해서 들어간 데가 파고다공원 뒤편에 일층... 어디 커피라도 먹으러 들어갔는데 앉는 순간 딱 알았지. 아, 여기구나. 그 담에 일주일 후에 또 두근두근 대면서 한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들어갔는데, 딱 앉아마자 사장님이 ‘저번에 오셨죠?’ 하면서... 그러면서 빠의 단골이 되었지.

 

코러스보이 : 그때는 게이빠들이 간판도 잘 없던 시절 아닌가요?

김상백 : 그렇지 그때는. 밤에 빠에 갈려면 그 심지어는 문을 세 개 지나서 들어간 적도 있었어. 한옥집. 문을 딱 열면 안에 빠인 곳도 있었어. 골목골목 들어가서. 신고 들어와서 경찰들 와서 손님들 조용히 빠져나가고 이런 적도 많았으니까.

 

코러스보이 : 신고 들어오고 하는 건 유흥업소들이 영업시간 규제(주:1990년대초 정부가 범죄예방 및 에너지 절약 등을 명분으로 모든 음식점의 영업시간을 자정으로 제한하던 시기가 있었다)가 있어서 그랬던 거죠?

김상백 : 그렇지. 그땐 심야영업 제한이 있었지. 근데 뭐, (경찰차에) 실려 가서 ‘야, 이 호모새끼야.’ 이런 소리 들은 사람도 있고. 그리고 발@@@ 같은 경우에는 신문에도 났었는데 지금 사장님하곤 관계없지만, 거긴 손님들 도망가다가 다리도 다치고... 난 그거 군대에서 신문에서 봤어.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종로에 가서 그 이야기 물어보니까, 손님들이 담 넘다가 다리도 부러지고 난리도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더라고.

 

# 나에 대한 자괴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멋진 경험을 했던 때가 그때.

 

 

코러스보이 : 그즈음에 오프라인 모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죠? 통신모임이든 친구사이나 뭔가 낮에도 모이는 공간이요.

김상백 : 94년도였는데, 그때 회사 신입사원 때였는데, 사귀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괴로워하던 시절이었거든. 근데 빠에 갔더니 소식지 같은 게 놓여 있는 거야. 보니까 친구사이라는 로고가 있고 인권에 관해서 있고 그러면서 호기심에 아, 이런 것도 있구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러고 있었는데 그걸 두세 번인가 봤던 거 같아. 그때 겨울이었는데, 보니까 비용에 관한 제작에 관한 고통을 토로하는 글들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디자인 일을 하니까 그 비용이 너무 아까운 거지. 정말 싸게 저렴하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다 맡겨서 비용을 내면서 한다는 게 너무 아까웠었고. 내가 무슨 인권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기보다 그냥 괴로워하면서 살기 바빴던 친구라 뭐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닌데. 아, 내가 해주면 잘 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싸게 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싶었고. 어느 날 그 빠에 갔다가 그 소식지를 돌리러 온 사람들을 봤어. 옆자리에 앉은 거야. 그래가지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아, 죄송하지만 제가 이거 도와줄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친구사이에 처음 가담이 된 거지. 주로 디자인에 관련되는 걸 도와드리고.

 

코러스보이 : 그때가 친구사이가 생기자 마자였죠?

김상백 : 응. 1994년도 3월인가 그랬을 거야. 맨날 게이빠 이런 장소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니까,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너무 새로운 거지. 응. 너무너무 새로웠어요, 아주. 그래가지고 굉장히 몰두를 했었어요. 진@형, 후@형 이런 모임의 주축이 되던 사람들한테 여러 가지 얘기도 듣고 행사도 하고. 뭐 이러면서 실질적으로는 내가 많이 나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내가 일조를 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굉장히 좋았어요.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게이를 변태라고 부르던 때였으니까. 내 생각이 정리되고 나에 대한 자괴감? 그런 것들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지는 멋진 경험을 했던 때가 그때.

 

코러스보이 : 소식지 만들 돈이 없어서 게이빠에 후원금 걷으러 다니기도 하고 뿌리러 다니기도 하고 했었잖아요. 쫓겨나서 울기도 하고, 수고한다고 돈 찔러 주는 아저씨도 있었고, 파고다 극장에선 야단치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에피소드들 많았는데요.

김상백 : 응. 그랬다더라고 나는 주로 만들기만 하고 돌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는데, 들어보면 괄시를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때 그 뭐 랭보라는 술집이 우리한테 굉장히 호의적이어서 우리가 거기 굉장히 많이 갔던 걸로 기억이 나요. 사장님도 잘 해줬고.

 

코러스보이 : 그땐 친구사이가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고, 내부적으로 조직력도 강했던 거 같은데 반면 규율도 되게 엄격하고 그랬지 않나요? 내부에서 연애도 못하게 하고. 상담도 사무실 안에서만 하고 밖에선 못 만나게 하고.

김상백 : 응.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게 일 년 정도 지나고 나서는 유야무야 되었던 거 같아. 나도 내부에서 연애를 했었고.(웃음)

참, 재미는 이야기 있긴 하다. 그때 업무 중 하나가 초기에는 전화 상담이 진짜 황당한 거 많았어. 신음소리 이런 거. 주기적으로 그 시간만 되면 전화와가지고 헉헉거리는 소리 나는. 닫힌 곳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욕구에 목이 말라서 그런 희한한 전화가 정말 많이 왔던 걸로 기억나요. 그리고 지금처럼 게이커뮤니티가 다양하게 발전한 게 아니기 때문에 갇혀 있던 분들이 전화로 고통을 많이 토로하고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고 방문도 많이 왔던 걸로 기억이 나네.

 

코러스보이 : 형은 그렇게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활동을 접게 되었잖아요. 어떤 계기가?

김상백 : 그게 엄청난 계기가 있었어. 큰 사건이었죠. 그때 친구사이의 큰 역할중 하나가 언론매체하고 접촉을 하는 거였는데, 그 때 ‘그것이 알고 싶다.’였나, ‘추적60분’ 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거기 친구사이 회원들이 인터뷰를 나갔어요. 홍대 연남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명을 뒤에서 비추고 얼굴은 캄캄하게 하고 각각 인터뷰를 했었어요. 당연히 음성변조 하는 걸로 확인은 하고 했는데, 문제는 예고편이 음성변조가 안 되었었어요. 또 내가 그때 한참 연애를 할 때였는데 집에서는 뭔가 느낌이 다르잖아요. 연애를 하면 숨길수가 없잖아. 그래서 좀 느낌이 다른데, 정체는 안 드러나고 그러던 차에 그 방송 예고편이 나갔는데 음성변조가 안 된 걸 어린 동생이 보고 ‘와 형 목소리랑 똑같다.’ 이러는 거야. 그걸 보고 있던 어머니와 누나가 느낌이 좀 이상했나봐. 그래서 본편을 본 거예요. 본 편에서 음성변조가 되었지만 가족들은 어투를 알잖아.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불안감에 휩싸이다가... 참 힘든 이야기긴 한데, 우리 어머니가 평생 집을 처음 갖게 되는 날이었어요. 다음날 이사를 가게 되는데, 내가 전전날 짐정리를 하다가 친구사이 로고가, 내가 만들어놓은 게 어디선가 툭 나왔어. 헉, 그래가지고 그걸 숨긴다고 한 게, 양복, 드라이크리닝 한 옷 안주머니에 넣은 거야. 그리고선 ‘설마 이걸 또 드라이 맡기겠느냐.’ 안심을 하고 이사를 가기 전날 한시가 넘어서 야근하고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누워서 주무시고, 내 방으로 들어가는데 누나가 등을 딱 돌리고 앉아 있는 거야. 그러면서 ‘너 나하고 얘기 좀 해.’ 그러더니 갑자기 친구사이 로고를 탁 던지는 거야. 처음 새 집으로 이사 가니까 옷이란 옷을 다 빨고 정리하려고 하다가 이게 나온 거지. 그래가지고 그날 누나도 흥분하고 나도 ‘아 누나한테라도 얘기를 해야겠다. 어쩔 수 없다.’해서.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딱 열리면서 어머니가‘이 @@야~~’ 이러면서... 뭐... 그리고 거의 십년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았죠.

 

코러스보이 : 그래서 가족들이 알게 된 거였군요. 혹시 지금 누나랑 어머니는 어떠세요?

김상백 : 어머니는 힘들어하시지. 그렇다고 결혼해라 그러진 않고 굳이 얘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가끔 뭐 명절날 어머니나 누나랑 술 먹고 이럴 때 텔레비전에 관련된 주제가 나오거나 용의선상에 오른 배우들이 나오면 가볍게 ‘쟤도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하면), ‘어 그래? 아, 쟤 좋아했는데 실망이야.’ 이런 농담 정도 주고 받는.

 

# 회사에 얘기도 못하고, 점심시간이면 일이 있다 그러고 나와서 라면 먹고 들어가던.

 

 

코러스보이 : 농담할 정도면 거의 풀린 건데... 참 그때 책도 만들었잖아요.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수기집.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다.’였나? 그 책은 어떻게 기획이 된 거였어요?

김상백 : 아, 그때 회원 중에 글을 업으로 삼는 분이 계셨는데. 우리가 그때 활동비가 너무 없었거든. 맨날 월세 십시일반하고 막 그러던 터였는데 어! 책을 기획해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출발은 무슨 숭고한 뜻이 있었던 건 아냐. 사회에 이슈도 제공하고 (돈도 받고) 그래가지고 여러 명이 글을 쓰고 모아서 하게 된 거죠.

 

코러스보이 : 그때 친구사이 사무실 운영비가 없어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다고 들었어요.

김상백 : 아, (웃음) 첫 직장을 다니는데 사회 나가면 카드를 만들잖아요. 카드 한 장 만들어놓고 안 썼어요. 난 월급을 꼬박꼬박 집 융자금 갚기 위해 월급 전액을 부모님께 드리고 용돈을 받아쓰던 상황이었는데 친구사이가 이사를 간 거지. 근데 돈이 너무 없잖아. 전 회장님 집에서 맨날 그렇게 쓸 수도 없었던 거고. 그래서 내가 그때 삼십만 원을 카드로 긁었나, 그래. 처음으로 카드를 긁은 거야. 그리고서는 이제 그걸 조금씩 조금씩 용돈에서 제하면서 생활을 해야 하니까 한동안 라면을 먹은 거야 점심 때. 딴 사람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회사에 얘기도 못하고, 점심시간이면 ‘아, 일이 있다.’ 그러고 나와서 라면 먹고 들어가던 웃지 못할... (웃음)

 

코러스보이 : 울컥하는데요.

김상백 : 응. 그래도 그때는 ‘아 이건 정말 해야 된다. 이건 훌륭한 일이야.’ 하는 사명감이 있어가지고 다들 ‘이렇게 꼭 해야 돼.’ 하면서 돈을 모으고 어렵게 이사를 갔던 기억이 나요.

 

코러스보이 : 근데 커밍아웃하면서 그렇게 가족들과 난리를 치고 나서도 커뮤니티 활동을 완전히 접지는 않으시고 통신 모임 방장도 하고 그러셨죠?

김상백 : 아아, 그 때 뭐야. 피씨(PC) 통신의 게시판, 토론방에 게시판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엄청난 전쟁이 붙었었어요. 일반들하고 숨어있던 이반들하고 토론이 엄청 격렬하게 일어났던 적이 있는데. 나도 그때 친구사이 활동하던 때였으니까 전쟁에 가담하고 레즈비언 쪽 활동하시는 분들도 그때 가담이 됐어요. 그래가지고 엄청나게 소모적인 전쟁을 거듭하다가 거기 어떤 레즈분이었나? 발기인이 되어서 게시판을 아예 하나 열었어요. 처음엔 게시판 하나였던 걸로 기억이 나. 그러다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채팅방에서 삼삼오오 놀던 사람들이 그리로 와서 글을 남기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이제 ‘퀴어넷’이라고 (주: 천리안 PC 통신 이반 동호회) 돼버렸죠. 통신 3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모임들이 갑자기 생겨나면서... 나는 너무 재미있었던 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안 나요. 인터넷 이후에는 사람들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때는 모이면 백오십 명 3개 통신사 모임이(주:하이텔 또하나의사랑, 천리안 퀴어넷, 나우누리 레인보우) 다 모이면 사백 명 이럴 때도 있고, 엄청난 대규모 행사들이 자체적으로 기획이 되던 때기 때문에 그런 시대의 정서가 있어요. ‘우와 .우리가 이렇게 명랑하고 건전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왔어!’(웃음) 이런 즐거움에 사람들이 막 때로 몰려다닐 때였지. 버스 대절해서 부산도 가고 광주도 가고 산행을 빙자해서 그쪽 지부 사람들이랑 놀고, 심지어는 이태원 자주 가던 ‘풍년정’이라는 소주집을 넉살좋은 형들이 ‘저희 게이예요.’ 그러면서 터 가지고 통신 3사 모임들이 거기 때로 몰려가고 막 그런 희한한 경험을 했던... 다시 그런 시대가 안 올 거 같아요. 다시는 응. 되게 기억에 남고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고.

 

# 아마츄어 게이들의 문화적인 장이 되는 게 꿈이어요

 

 

코러스보이 : 이 빠(Viva)는 언제부터 하셨죠?

김상백 : 사실 빠 오픈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 음... 옛날에 후배 따라 한번 살사바에 가 본 적이 있어요. 일반 살사바. 근데 거기가 가서 잊을 수 없었던 게 춤 추는 사람들의 표정이 세상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와 저거 한번 꼭 배워보고 싶다.’ 생각을 했죠. 사실 생각만 하고 일하면서 시간 내고 용기내기 쉽지 않잖아요. 그러다가 한 7년 정도 아버지 병수발을 하고나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또 어머니가 굉장히 아프셔서 병원 왔다갔다하고, 또 그때 한 삼년 사귀었던 애인도 도망가고 이래서 총체적으로 멘붕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어요. 7,8년 전. 그러고 일 년을 지났더니 사람이 너무 상하더라고. 그리고 일도 디자인 일이 너무 힘든 일이고. 그래서 그동안 너무 힘들고 고생했으니까 나한테 상을 주고 싶은 거예요. 하다가 상을 주기로 한 게 ‘아, 그럼 나한테 살사를 선물로 줘보자.’ 그래서 동호회에 들었어요. 재밌더라고요. 그리고 사람이 너무 명랑해지고 포지티브해지고 일의 스트레스도 많이 떨칠 수 있고 에너지가 넘쳐지고 이런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춤을 어느 정도 배우면 플로어에 나가잖아요. 근데 플로어에 나가도 재미가 없는 거예요. 내 동기들은 남자들은 손 한 번 더 잡고 돌리려고 하는데. ‘아, 나는 왜 재미가 없지.’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여자랑 춤을 추니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남자랑...?’ 해서 이반 동생하고 같이 살사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7년이 되었어요. 근데 연습장에서 추는 춤은 재미없잖아. 빠에 가서 춤을 춰야 재밌잖아. 그래서 여러 빠에 민폐를 많이 끼쳤어요. ‘블러@@’ 거기 좁잖아요. 거기서 춤추다 손님들 깜짝 놀라 도망가고 ‘여긴 뭐, 끼만 부려.’하면서. (웃음) 심지어는 보@ 가서 돌리다가 가사 나오는 TV 떨어뜨려가지고 깨먹고 이런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굉장히 미안하더라고 사장님한테. 그래서 참 게이들이 맘 놓고 춤 출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삼 년 전 쯤에 잘 다니던 회사에 부사장님이 들어오시더니 정치적 기류가 바뀌면서 나랑 되게 안 좋아졌어요. 결국 나오게 된 상황에 이르렀고.

그래가지고 이참에 그런 자유로운 빠를 내가 한번 가져보겠다 생각이 든 거예요. 또, 실패를 하더라고 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젊을 때 해야지 실패를 하더라도 본 업무로 돌아갈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스크랩을 하면서 찾다찾다 공간이 여기가 맘에 들어가지고 2년 전 오픈하게 되었어요.

 

코러스보이 : 다른 빠랑 다르게 살사동호회 모임도 하고 뭔가 차별화 되는 지점들이 있을 텐데요, 이벤트도 많이 하시던데요.

김상백 : 일단 제일 큰 행사로... 빠를 세우면서 다짐한 게 있어요. 술만 팔지는 않겠다. 그래서 제일 첫 번째로 한 게 댄스 관련된 행사예요. 댄스 배틀을 삼 개월에 한 번씩 해요.

그래서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의 장이었으면 좋겠다라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미술 전시. 에, 미술 전시를 일 년 넘게 못했었어요. 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젊으니까 밥벌이가 바빠서 작업을 못하다가, 올해 초에 두 번 했어요. 미술전시회를. 그리고 지금 못한 건 음악공연이어요. 가라오케에서 노래하는 게 아니라, 연주든 노래든 제대로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이렇게. 아마츄어 게이들의 문화적인 장이 되는 게 꿈이어요. 하고 싶은데, 아 공연은 이게 접점이 안 생겨서...

 

코러스보이 : 지보이스라든가 젠틀브라더즈 라든가. 음악 하는 동호회들 꽤 있는데.

김상백 : 근데 접점이 안 생기더라고. 이게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보니까 그런 거 할 때는 어느 정도 인간관계가 다져져야 하게 되더라고. 얼굴 팔리는 거니까 사람들이 선뜻 하자고 해서는 안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일반 비즈니스랑은 달리 손님들하고의 밀접도가 굉장히 중요하구나 하는 걸 많이 깨달았고. 그리고 우리 빠는 굉장히 넓잖아요. 단체들이 와서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동호회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려고 애를 써요. 그래서 동호회 단체들이 행사를 많이 해요. 공작세(주 : 게이공무원/공직자 모임)도 그렇고 동의모(주 동성애자 의사 모임)도 그렇고. 또 동호회 별로 마일리지를 적립해 드려요. 그래서 큰 행사 있을 때 몇 점 도달하면 술을 서비스한다든지 이런 제도들을 많이 만들어놨죠.

 

# 게이들이 만나서... 이런 문화가 깊어지는 게 너무 좋아요.

 

 

코러스보이 : 그러고보니 공간이 작은 음악회나 전시회 갤러리 하기 좋을 거 같네요. 홍대 쪽에선 더 작은 곳에서도 다 하는데.

김상백 : 응. 나는 지금이 너무 좋은 게 다양한 동호회가 있잖아요. 별별 동호회가 다 있더라고요, 성적 취향에 관련된 동호회에서부터 시작해서 문화적인 동호회까지.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게이들이 만나서 서로 좋아하는 것을 공유 한다는 것이. 나는 지금 이런 문화가 점점 깊어지는 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동호회 하시는 분들하고 접점을 제대로 많이 갖고 싶기도 하고. 그게 통신 또는 인터넷 이전과 이후의 게이문화의 굉장히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옛날 게이들은 처음 접촉이 성적인 걸로 시작했기 때문에 일종의 자괴감이 있어요. 자기를 비하하는 게 있고 그런 성적 접촉이라는 게 연애가 아니라 모종의 장소,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섹스를 하고 나오면 굉장히 자기 비하가 심해요. ‘아, 나는 변태가 된 거야.’ 막 이런.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자기가 문화를 통해서 게이들하고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좋은 장치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동호회 분들 오셔서 오늘 영화를 봤네, 산에 갔다 왔는데 산이 좋네. 남자이야기 외에 이런 이야기를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 되게 좋아요.

 

코러스보이 : 좋은 것도 있지만 장사를 하다보면 메인 직업이 되면 힘든 사람도 볼 텐데, 저런 손님 정말 싫다 이런 거 있지 않아요?

김상백 : 물론 있지. 아, 이건 또 얘기하기 참 어려운 문젠데. 에에 요건 또...

 

코러스보이 : 한잔 시켜놓고 세 시간 앉아 있는 손님?(웃음)

김상백 : 테이블이 많기 때문에 우린 크게 밉지 않아요. 음, 그냥 단적으로 얘기하면 돈 있다고 막 대하는 사람들? 그게 제일 안 좋아요. 한 잔을 시켜 먹어도 여긴 원샷바니까 비굴할 필요 없고, 돈 많아서 양주 깠다고 해서 사람을 막 대해서도 안 된다고 봐요. 비싼 술을 마시고 해도 굉장히 교양 있고 매너 있는 분들이 있어요. 인간적으로 존중을 해주는, 그런 분들은 다시 보게 되죠. 근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이 좀 있죠. 그래서 빠를 하면서 나를 다시금 옛날의 나를 다시금 돌려본 적이 있어요. ‘아 나도 그랬나?’ (웃음) 그렇다고 내가 소녀가장이었기 때문에 양주를 막 시켜먹고 그러진 못했지만, 빠에 가서 진상부린 적은 없나? 어쨌든... 응.

 

코러스보이 : 아까 살사 모임 이야기 잠시 했는데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소개를 잠시 해주시면요?

김상백 : 살세로스는 한 칠년이 되어 가고요, 이게 살사모임인줄 아시는데 처음엔 살사가 주였긴 한데 지금은 종합적인 댄스를 다 해요.

 

코러스보이 : 어쩐지 사람들이 거기 아이돌 댄스 모임 아니냐고 하더라고요.(웃음)

김상백 : 그래서 방송안무, 살사 또 요즘엔 스윙해요. 한때는 탱고도 했었고. 그렇게 다양한, 여러 장르의 댄스를 다 즐기는 모임이구요. 격주로 저희 바에서 낮에 네 시간 씩 춤을 추고 일요일 세시부터 일곱 시까지. 그러고 춤을 통해 친교와 자기의 명랑한 삶을 개선하는 그런 좋은 모임. 다음 까페에 있어요.

 

코러스보이 : 다음 싸이트에서 찾으려면 검색창에 살세로스 치면 나와요?

김상백 : 음... 퀴어 살사 치면. 와서 가입을 할 수 있어요. 사실은 이렇게 큰 업장을 얻었을 때는 살세로스에 대한 생각도 있었지만 다른 동호회도 정모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의도를 많이 가졌었는데 그러긴 또 쉽지 않더라고. 몇 개 모임들이 토요일 저녁이나 이럴 때 대규모 정모를 하기는 하지만, 낮시간에 다른 용도로 쓰시는 동호회는 지금 생각보다 없어서 아쉬운 건 있어요. 뉴욕이나 외국 이야길 들어보면 게이빠에서 문화강좌라든지 동호회라든지 여러 가지 문화행사가 많대요. 근데 콸러티가 굉장히 높고 그걸 일부러 돈 주고 듣는 사람도 많고 얼마 전에 여기근처 삼층에서 미술에 관련된 강의가 몇 회에 걸쳐서 진행되어서 청년단체에 기부하는 과정도 있었는데요. 실제로 게이문화가 발전한 곳에서는 게이바가 문화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도 인제는 그래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잭디(주 Jack'd : 게이 대상 데이팅 스마트폰 어플)로 숨는 많은 이반들이 오히려 개인적으로 되고 옛날 공공장소를 드나들던 상황과 비슷해지는 걸 다시 한 번 바꾸는, 그래서 다들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 세 번 정도 만나니까 자기 성격이 나오면서 숨어있던 매력이 확 피어나더라고.

 

 

코러스보이 : 참, 다른 분들도 인터뷰 하면서 연애 이야기도 좀 하거든요. 지금 사귀는 분 있으세요?

김상백 : 있어요. 만 4년 되었어요. 같이 산지 2년 되었어요.

 

코러스보이 : 그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김상백 : 채팅으로 만났는데 사람의 인연이 재밌는 게 정확하게 처음 봤을 때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나이도 너무 어렸고, 나는 또래나 연상을 좋아하니까. 근데 재밌는 건 그런 사람들(연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제 다 애기들을 좋아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를 봐주지 않아. 그렇게... 채팅하는데 어리니까 내가 별로 관심을 안 보였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오기가 생겼던 거야. 그래서 굳이 만나자는데 ‘아, 내가 애기 만나서 뭐하지.’이러다 만났는데 말도 잘 안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아, 말어?’ 그랬는데 그래도 사람을 만났으면 세 번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해서 세 번 만나봤는데 만날수록 사람이 재밌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성격이야. 외모는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래서 몇 번을 만났는데 다음에 더 만나고 싶고 점점 좋아지는 거야. 그래가지고 어느 날 결정을 했지.

 

코러스보이 : 정말 중요한 얘기네요. 식성이나 외모 지상주의 때문에 대부분 그 세 번을 못 참고 다들 그만 두잖아요.(웃음)

김상백 : 응응응... 그래, 세 번 정도 만나니까 자기 성격이 나오면서 숨어있던 매력이 확 피어나더라고. 그래가지고 지금 사년 되었는데, 늘 감사해요.

 

코러스보이 : 가끔 보면 이런 인터뷰 하는 거 불편해하는 애인들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김상백 : 아, 내가 활동했던 것도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 애인이 빠 한다고 하면 다 싫어하잖아요. 근데 이 친구가 직장에서의 갈등과정을 주욱 봐왔기 때문에 그렇게 극렬반대 뭐 이런 건 안했어요. 가끔 그런 이야기는 해요. ‘아, 어느 순간 내가 빠 사장 애인이 되어있어.’ 이런 농담을 하죠. (웃음)

 

#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기의 게이의 삶이 채워질 거라는 걸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코러스보이 : 그러고보니 커밍아웃이란 단어도 잘 모르던 시절에 커밍아웃을 하셨는데요. 지금 커밍아웃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상백 : 빠에도 커밍아웃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되게 많아요. 고민하는 젊은 분들 되게 많은데 일단 그게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특히 가족에 대해선... 친구들이야 뭐 안 보면 그만이지만, 또 요즘엔 다들 이해해주고. 근데 가족에 대해 커밍아웃 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각오도. 뭐 상상이상으로 힘들잖아요. 거의 죽어나가는 지경에 이르니까. 적어도 경제적인 기반, 자기가 적어도 집을 나올 수 있는 상황, 나와서 혼자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구체적으로 커밍아웃을 옮기는 것이 좋은 것 같고. 부모님 밑에서 종속적일 때는 부모님이 웬만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은 분이라면 조금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무턱대고 했다가 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가족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리고 무작정 했다가 부모님 가족들한테는 폭력적일수도 있어요. 우리는 그분들한테 커밍아웃을 해서 배려를 받기 원하지만 우리가 커밍아웃 할 때도 그 사람들 배려를 해야 돼요. 그 부분들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계획을 세우고 주변에 조언을 많이 구해서 나름대로 단계단계 계획을 잘 세워서 해야지 안 그랬다가는 서로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우리 집도 그랬고. 아, 그래서 나는 지금 너무 좋은 게 작년에 지보이스 공연을 갔잖아요. 갔는데 그때 가족 모임이 있더라고.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게 생겼다 드디어.’ 그랬어. 사실은 우리가 커밍아웃했을 때 상처를 크게 받지만 그 분들도 상처를 받으니까 우리가 친구사이에 모여서 서로를 보듬었듯이 그분 가족들도 그걸 토로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된다고 봐요. 그래서 그건 진짜로 잘 만든 거예요. 아주 훌륭한 일이야.

 

코러스보이 :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를 이십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이 보면 약간 멘토링도 될 거 같고 자신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런 모습으로 살 수 있겠구나 그러겠죠. 십년 이십년 후의 형의 계획은?

김상백 : 음. 빠를 시작했을 때는 종합적인 다양한 문화행사를 하고 싶은 욕구가 불처럼 있어요. 지금도 그런데. 더 큰 빠를 만드는 데 갤러리도 있고 종합적으로 문화행사를, 아마츄어 분들이 와서 맘껏 그런 걸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빠를 만드는 게 소원이어요. 보니까 내가 사람을 되게 좋아하더라고. 응. 빠에서 손님들하고 대화하는 게 굉장히 즐겁고 좋아요 그래서 최대한 맞춰 드리려고, 들어 드리려고 노력을 하고... 사람이 가진 스토리를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그때도 그런 편안하고 즐거운 빠를 하면서 손님들이 단지 술을 마시러 오는 게 아니라 같이 문화를 즐기러 오는 그런 데였으면 좋겠어. 이층으로 되어있고 위에는 갤러리 밑에는 빠.

 

코러스보이 : 지하에는 크루징 공간?

김상백 : (웃음) 아, 그거 있다. 젊은 이십대 초반의 처음 나온 사람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옛날에 내가 데뷔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너무 없었어요. 자기 삶에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는 길이었어. 근데 지금은 자기가 선택해서 게이로서의 삶을 자기가 디자인 할 수가 있어요. 이제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 책임이 굉장히 크고 그것만큼이나 더 좋은 결과를 이 세계 안에서 얻어갈 수 있다고 봐요. 어떤 친구들은 와서 성적인 일탈만 경험하고 가는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활동과 좋은 문화를 만끽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기의 게이의 삶이 채워질 거라는 걸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한번 나왔다가 ‘오. 게이는 다 이래!’ 이거는 정말 일부분만 본 거고 자기가 그 삶을 디자인하지 못한 거라고 봐요. 어떤 사람들은 정말 ‘아, 게이는 정말 남과 달라서 다른 걸 향유하고 즐기고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걸 얻어가는 사람이 분명 있거든요. 그러니까 뭘 얻어갈 수 있는지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입니다.

 

코러스보이 : 우와, 거의 힐링캠프 수준이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김상백 : (웃음)

 

코러스보이 :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 빠가 문화 살롱의 역할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몰랐어요. 혹시 이야기 중 빠진 거 있으면 친구사이 명함 드릴 테니 이메일 주세요.

김상백 : (명함을 보고) 아. 이거 내가 디자인한 거네. (웃음) 아, 나 진짜 영화 보다가 친구사이 로고 딱 올라오면 응. 좋더라고.(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도 치유 받았다는, 위로받았다는 따스함이 밀려들었다.

모쪼록 그의 희망처럼 비바(Viva)가 종로3가의 문화살롱으로, 나아가서 모든 젊은 예술가들의 문화메카로 자리 잡는 날이 오길 기원한다. 그 곳에 가면 그의 여유 있고 편안한 미소가 당신을 반길 것이다.

 

김상백님의 이메일 주소 : qtype@hanmail.net

Bar Viva : http://cafe.daum.net/barviva

 

※ 이 인터뷰의 내용과 사진은 김상백님과 친구사이의 동의 없이 다른 곳에 게재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