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번째 커밍아웃 인터뷰는 해영님입니다. 여러 해 동안 <지보이스> 객원으로도 활동해서 우리에겐 많이 친숙하기도 하고, 커뮤니티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지난 겨울 서울 시청 농성장에서도 볼 수 있었던 얼굴이었습니다. 평소 수더분한 이미지의 그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들어 봤습니다.
40번째 커밍아웃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간단히 자기 소개 좀 해줘.
안녕하세요. <우야식당>의 우야, 해영입니다. 요샌 야코 엄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냥 해영이라고 하면 안돼? 나는 차해영도 싫고, 김해영도 싫다. 그렇다고 차김해영도 싫고, 김차해영도 싫어. 엄마나 아빠 누구 하나를 앞에 내세우고 싶지 않고 동등하게 쓰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이름만 쓰고 싶어.
닉네임이 우야인데, 뜻이 뭐야?
‘행복 우’에 ‘불릴 야’, 행복을 부른다. 나를 부르면 행복해 진다 이런 뜻이야. 티지넷 가입할 때 처음 썼는데, 그때의 뜻은 ‘김태우야’부를 때의 ‘우야’였다. 누구는 ‘소 우’자에 ‘들 야’자로 들소 아니냐고 그랬어.
#<친구사이>와의 인연
우리 처음 <지보이스>에서 만났지. <지보이스>와는 어떤 인연?
처음 활동은 <레주파>였는데, 2007년 차별금지법 때, 어떤 단체들이 있는지 있는지 알게 됐어. 2009년부터는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을 하면서 이 단체들을 더 가깝게 볼 수 있었지. 그러면서 <지보이스> 공연을 계속 가게 됐어. 처음에 동덕여대에서 했을 때 갔어.보면서 남자애들이 너무 좋은 거야~ 크허~ 그리고 2010년인가 객원을 모으기 시작했지? 그 다음 해엔 성소수자 뭐 상관없이 여성 객원을 구한다. 그래서 갔어.
공연할 땐 어떤 기분이었어?
처음 공연할 때는 그냥 좋은 것 밖에 없었고, 어떻게 남자 애들 30-40명이 이렇게 모이지? 게이 애들이 술을 안마시고 이 시간에 여길 오지? 너무 신기한거야. 주말 없이 이렇게 연습을 할 수 있을까?
그럼 그때 처음으로 게이들과 많이 친해진거야?
그리고 그때 게이와 많이 친해졌지. <퀴어문화축제>도 게이와 같이 하지만, 그땐 내 또래 게이가 별로 없었고, 그때의 기획단은 놀고 이런 문화가 아니었어. 일하고, 끝나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화이팅!”하고 헤어졌어. 물론 집이 먼 것도 이유였고.
그때 게이들 중 처음 레즈비언을 만난 친구들도 많았어.
서로 편하게 물어보는 게 많았어. ‘레즈비언은 어떻게 뭐~’, ‘게이들은 어떻게 뭐~’. 편하게 지냈어. 그래도 무대 올라가기 전까지는 친했던 것 같지 않아. 헤이유 때문에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서로 더 친해 졌지. 첫 공연 했을 때는 친한 상태라기보다는…
같이 활동하는 느낌?
응. 그런 느낌. ‘너무 좋다' 이런 거지. 그 전까진 친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아. 공연하고 얼굴 보고 이러니 친하게 된거지. 그리고 <언니네> 사람들도 알게 되고 친해 지게 됐어.
공연하고 느낌은 어땠어?
<지보이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게, 지금까지 활동을 하면서 어떤 공동체에서도, 어떤 단체에서도 공연 혹은 일이 끝나고, ‘너 되게 수고했어. 나와서 한 마디 해’ 이렇게 했던 적이 없었어. 그리고 네가 영상을 좋아해, 그러면 ‘너 영상 한번 만들어 봐라, 너 이거 관심 있는 것 같으니 뭐 해봐라’, 이렇게 젊은 활동가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길을 터주는 것이 멋있어 보였어. 기존 활동가들이 고집이 있고 방향성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넘겨준다는 게 대단하다고 느꼈지.
그리고 나서 <아는 언니들> 시작했는데?
<묻지마 중창단>이라고 전에 있었고, 헤이유가 단장을 하고 있어. 그 전까지 <언니네>라는 단체는 잘 몰랐고, 그때 헤이유가 <지보이스>에서 1년에 한 번만 노래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계속하는게 어떠냐 권유해서 들어가게 된거지.
<지보이스>에서 객원 활동이랑은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 시작이라 다른 건 많지. <아는 언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같이 해야 하니까 더 애틋한 느낌이 많아. 그리고 공연하고 연대 하러가고 하면서 ‘힘’을 느낄 수 있었어. <지보이스>와는 그런 활동을 안 해봤으니까. 몇 사람만 있어도 악기 없어도 엄청나구나 그런걸 느꼈지.
#데뷔
언제 처음 활동을 시작 했어?
2007년 4월, 처음으로 <레주파> 활동가 신청하고, 면접을 보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게 됐어.
이게 데뷔?
커뮤니티 데뷔는 그게 처음이었어. 그전엔 20살 까지 팬코스 했어.
팬코스가 뭐야?
팬 코스프레, 아이돌 코스프레하는 거. 내가 했다기 보단 하는 얘들 따라다니고, 사귀고 그랬어. 그리고 대학 들어가고 지오디가 ‘잠정적 휴식 기간’을 갖고, 김태우가 솔로로 나와서 김태우 코스프레를 했었고.
그렇게 지내다 20살때, 또래의 그 친구들이 다 탈반을 했어. 친구들이 대학교를 들어가서 남자에 대해서 알게 됬다고 탈반을 시작한 거야. 지금은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떻게 그래?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랬지. 그땐 ‘여자 만나서 평생을 살 건가,나이가 들어서도 살 수 있나, 결혼 해야하는건가’ 나이 든 레즈비언을 못 봤으니까, ‘난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눴는데, 이미 대학교 오티쯤 되어서 다 탈반을 한 거야. 19에서 20살 사이에 그 커뮤니티나 나의 십대 이반 커뮤니티 시대는 끝난 거야.그리고 조금 있다가 <티지넷>에 자게 죽순이로 활동했어. 그때 인터넷 방송 했어.
아, 맞아. 그거 예전에 되게 유행이었는데…
<티지넷>에서 음악 방송도 했어. 10대 커뮤니티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이런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있어서 너무 좋은 거지. 그래서 운영자에게 쪽지를 보내서 '만나서 고맙다고 이야기 하고 싶고 밥이라도 사 드리고 싶다.'
추진력이 좋네.
그리고 운영자를 진짜 만났어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레즈비언 번개를 나갔어. 근데 가서 또 막 술 마시면서 게임을 하는 거다. 막 얼음을 입으로 주고 받고 이런 게임을 하는 거야!
"저는 좋아하는 얘가 있어서, 이런 게임 못 하겠구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술 마시고 처음 다른 사람 집에 가서 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에 갔어. 그리고 혼자 다짐을 했지. ‘내 다시는 번개 같은데 나가지 않으리라. 어떻게 입으로 얼음을 주고 받으면서 놀 수 있나’ 그때 도덕적 기준이 높은 아이여서 그랬지.그러다 2007년에 학교 수업에서 <엘양장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학교 수업에서?
대안 미디어 수업에서. 그전에 음악방송하면서 알고는 있었지만, 청취자로 들었던게 아니라 글로 배워서 <엘양장점>을 알게 됐어.
그럼 전공이?
미디어, 신문 방송학과.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방송국 가서 지오디 만나려고.
#마초가 되고 싶었어
어느 날 엄마랑 오래간만에 유치원 영상을 봤는데, 어떤 남자애가 나한테 “지우개 좀 빌려 줘”, “나 지우개 없는데” 근데 그 남자애 가고 나서 옆에 여자애한테 “나 지우개 두 개 있는데 빌려 줄까”이러고 있는 거야.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이미 이런 게 있었던 거지.
하하. 초등학교 땐 어땠어?
음… 초등학교 때는 성에 대해 아는 건 아니니까… 간혹 내가 모자를 뒤로 썼어. 그러면 (속으로) 오- 남자처럼 보이는데? 그런건 있었어. 그러면서 내가 몸이 다르게 생긴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몸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 남자라고 하기엔 페니스가 짧고, 여자랑은 다른거 아닐까 이런 생각들.
처음의 접근은 트랜스 젠더에 가까웠던 거네?
그렇지. 초등학교 때 머리를 길렀는데, 머리가 많이 빠지는 게 보기 싫어서 단발머리로 잘랐어. 근데 단발머리가 너무 싫어서 커트를 했어. 그 시기가 좀 복합적이었어. 그 시기에 엄마랑 같이 안 살던 시기였고, 아빠는 아들을 너무 원했고, 그래서 스스로 나는 남자,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몸에 대한 생각들.
남자라고 계속 생각해서, 여자애들이랑 놀면 ‘여자를 보호 해야해’ 이러면서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갔던 것 같아.
그리고 중학교에서 팬클럽을 가게 되면서 나와 비슷한 얘들을 보게 되었던 거야.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머리 짧고, 그런 얘들. 그리고‘언니’가 너무 어색한 거야. 불러 본적도 없고, 그래서 누나, 형이라 부르고, 그리고 내가 남자였으니까. 목소리도 낮게 일부러 남자처럼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몸에 밴 거지.
그럼 팬코스한 것도 연장선?
지오디를 좋아한 것도 여러 가지였어. 김태우를 좋아했는데, 김태우처럼 됐으면 좋겠던 거야. 머리도 짧고, 덩치도 있었으면 좋겠고,마초가 되고 싶었어. 동경? 섹스 꿈을 꿔도, 야동을 봐도 남자에 이입이 되는 거야. 헌데 페니스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가슴은 없었으면 좋겠다 정도였지. 그렇다고 생리를 해서 충격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아 내 몸이 여자긴 하구나’ 그런 생각들을 했지.
이성애 사회에서 중간이 없으니까.
그리고 20대가 되어 레즈비언 상담소에서 상담가 양성 과정을 처음 들었는데 그때 되게 충격적이었어. 나는 내가 잘 정체화했다고 생각했어. 정체성, 여성주의를 처음 접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정체화를 잘못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 거지.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면 퍼즐 맞추듯 쫙 맞춰 지지.
그리고 <3xFTM>을 본거야. 내가 FTM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엄마한테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던 적도 있어. 그러면 엄마는 그렇게 까지 해야 하면서 살아야 하겠냐고 그러고… 내가 나를 남자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남자애를 좋아했던 것 같은 경험도 있고, 여자애를 좋아했던 것 같은 경험도 있고, 그럼 바이인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남잔데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인가… 내가 어떤 정체성이길래 이 친구들을 좋아했나 그런 생각들을 했지.
예를 들면 이성애자 연애 팁 이런 걸 보면 남자 쪽 나오고, 여자 쪽 생각 나오잖아. 그걸 보면 난 남자에 가까워. 내 안에 남성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고, 매우 여성적인 부분도 있어. 내가 꼭 레즈비언이라고 규정지어질 필요가 있나? 그래서 좀 열어 놓고 싶어하는 마음. 사람들을 만날때도 둘 다 편하니까 나를 레즈비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나를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정체성에 관련된) 그런 수업을 받고 내 스스로 했던 작업은, 내 스스로에게 “넌 레즈비언이야, 넌 그 중에서도 부치야. 부치 중에서도 부치를 좋아하는 BtoB야.” 이걸 끊임없이 내게 주입했던 것 같아. 레즈비언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라는 불안감. 레즈비언 공동체에 있는데… 스스로에게 소속감, 틀 안에 나를 넣고 싶어하는 느낌이 엄청 강했던 것 같아.
아, 그러면 카테고리 안에 굳이 넣어야 한다면 레즈비언이다?
그렇지. 넣어야 한다면 레즈비언이지. 신체적으로는 여자고, 레즈비언 문화를 겪었기 때문에 레즈비언이라고 하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불편하지 않고. 편한건 레즈비언이 제일 편하지.
어떤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야만 이해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눌 수 없는데, 누군가에 의해 규정지어 지는 것… 부치? 부치가 편하지. 부친가? 그런 생각 진짜 많이 하고. 정체성에 대해서는 끊임 없이 생각하고 있어.
#커밍아웃
엄마한테는 어떻게 설명 했어?
엄마한테 말 안했는데? 엄마 모르지.
엥? 근데 ftm 이야기도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엄만 몰라. 다른 얘들은 엄마가 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거야라고 하는데 엄만 몰라. 엄마한테 난 결혼 안할거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했지. 헌데 엄마는 자신이 아빠랑 안좋아했으니까 그런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백일 사진을 여자 옷입고, 남자 옷 입고 두 번을 찍었어. 그게 엄마의 취향인 거였다.. 엄마가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이래서 니가 이렇게 된거 아닌가.’ 농담삼아 그러지. 내가 머리도 짧고 남방 입고 다니고 그런건 이해해. 라디오 PD하고 싶어했던거 아니까, ‘PD들은 다 그렇게 하고 다니더라’ 그러고.
그럴 때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런 생각은 안들었어?
지보이스 공연하는데, 보러오라고 그랬어. 근데 엄마가 바빠서 못왔어. 그리고 나서 아는 언니들 2회공연 할때, 엄마를 초대했어. 나의 20대를 (커밍아웃으로) 끝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 그랬어. 근데 박원순 이 xxx. 나의 커밍아웃을 못참고… 근데 내가 계속 시청에 있으니까… 걱정은 됐지. 나는 준비가 됐는데, 엄마는 준비가 안되어있으니까. 엄마가 자기 탓을 할까봐.
지난 서울시청 점거농성땐 어땠어?
엄마한테도 전화해서 엄청 울었는데, 왜 우냐고 묻는데, 왜 운다고 말 할 수 없고...
힘들었겠다.
(2007년) 차별금지법때도 활동했는데, 7-8년이 지나도 이러면…내가 인생을 투자했는데, 사람을 만나서 작업을 하고, 진짜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박원순이 이러면,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되서 서울로 이사온 것도 있는데, 서울에서 처음으로 주민들을 참여시켜 스스로 만든건데, 박원순도 이걸 안해주면, 이러다 서울시장 바뀌면 아무것도 못해보고, 시간은 흐르고, 차별금지법은 말도 못꺼내고,그래서 대 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했어. 뉴스에 기고 올리고, 일반 페이스북에 다 커밍아웃하고, 메일링 올라가있는데에 커밍아웃하고. 도와달라고. 혼자 난리 친거지.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이렇게 힘든일이 있는데, 이게 뭐라고 부모한테라도 감춰야하고, 이게 뭐라고 사람들한테 빌면서 도와달라고 해야하고, 다 커밍아웃 해야하는지…
그럼 그때 엄마만 빼고 전세상에 커밍아웃 했네. 만약에 인터뷰를 하면 엄마가 알 수 있지 않겠어?
엄마가 컴퓨터를 잘 못해.
아는 사람한테 전부 메일을 돌리고, 페이스북에 썼을때, 그전에 다른 친구들은 몰랐어?
아는 애들은 있었지. 근데 한번도 그런 경험은 없었다. ‘나는 레즈비언이야.’ 그걸로 끝. ‘나는 레즈비언인데, 어떤 세상을 꿈꿔.’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땐 무식했지. 사실 그게 정말 필요했던건데.
시청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그게 사과를 받은건지 안받은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끝난지도 모르고 일단 끝났는데, 적극적으로 시청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써 그 사건 이후에 어떤걸 느꼈어?
12월에 다 때려치고 싶었어. 당시에 박원순에 가깝게 일했다고 생각했어. 나는 마을, 청년, 어린이 사업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성소수자라고 말하는 순간 배제되는 거야. 그동안 내가 참여했던 일의 역사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인거야. 무서워 진게 내가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공공기관에서 일을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여태까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내가 성소수자란 이유로 태도가 달라진다던가…
그 이후에 정치적으로 생각하려고 해. ‘정치는 삶이다. 삶은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먼 이야기지만 차별금지법도 그렇고 나와 직접 걸쳐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조금 더 공신력있게, '내 이야기에 힘이 실리려면 어딜 가야하지? 누굴 만나야하지?' 이런거에 머리를 더 굴리게 된 거지. 그건 내가 나이가 더 들어서 일수도 있고, 그런 사건을 겪어서 더 그래지는 걸 수도 있고.
두번째로 안타깝게 느꼈던건 개인참가자들. 일반 개인 참가자들을 뭉치지 못했던 것. 나는 당시 엄청 힘들었거든. 거의 잠도 안자고.그땐 다른 사람 신경쓸 (여유가) 안되고, 내가 너무 힘든거야. 커밍아웃은 다 했고…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생각한건, 자, 내가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8년이 걸렸어. 무대도 올라가고, 퀴어문화축제에서도 난리를 쳐도. 8년이 걸렸는데, 누군가는 시청에 바로 달려와서 피켓들고 있는 친구들이있고, 근데 누군가는 2호선에 시청역만 봐도 무서워.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은 너무 크지만, 가면 아웃팅 당하는 것 같아 이런 애들도 있고, 집에서도 못나오는 애들도 있고, 친구들과 술마시면서 욕하는 애들도 있을거고… 성소수자 친구 하나 없이 집에서 혼자 트위터만 하고 있는 애들도 있을거고,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안에서 못나오는 얘들도 있겠지
정말 많은 결의 사람이 있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보고 오세요. 피켓드세요.’ 이런게 아니라 이 사람들한테 조금더 편하게, 재밌게 참여하게 하는 방법이 뭐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어. 이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면 어떻게 할건가? 누군가는 모두가 서울광장에 나가는게 맞다고 생각하겠지. 누군가는 앞에 나갈 수 있겠지. 헌데, 누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든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까? 어떤 구조가 만들어져야하지?
#네가 너무 좋아서 도망치고 싶어
연애는 하고 있어?
아니오. 당분간은 못할 것 같아. 야코도 있고, 일을 좋아해서. 예를 들면 일주일에 한 번 만나야돼… 그럼 그게 잘 안돼.
활동하는게 너무 많아서 그런거 아니야?
근데 그걸 상대방 핑계를 대. ‘오늘은 너가 안되니까 못만나겠다.’ 이렇게 되는데 실상 그건 나를 위한 핑계지. 내가 생각한것보다 나를 너무 좋아하고, 나보다 상대가 더 좋아야 연애를 할텐데… 연애를 하다보면 내가 (상대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니가 너무 좋아서 도망치고 싶어.’ 그게 헤어진 이유야. 근데 그렇게 말하고 붙잡아. 누가 나보다 더 좋아지는게 무서워지는 것 같아. 내 스케줄이 어그러지고 얘를 만나러가는 내가 무서운거야. 잘 모르겠지? 근데 그렇게 된다. 한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게 너무 싫어.그 친구에 너무 집착하게 되는 내가 싫어.
갑자기 그러면 상대가 이해 못할 것 같은데?
이해 못하지. 진짜 싫어할 것 같아. 근데 다른 사람들한테 연애의 조언은 잘 해줘. 근데 내 연애는 못하지. 일이 최고야. 일은 날 배신하지 않아.
배신 할 수도 있지. 난 최근에 그 반대의 경험을 했는데, 열심히 하는거랑 돈버는 거랑은 다르구나. 열심히 다녀도 난 잘릴 수 있구나.
그래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는 괜찮은데, 1:1의 관계는 힘들어.
#우야 식당
<우야 식당>은 무슨 의미야?
최근 공동체 활동이 너무 힘들어. 뭐 하나를 하려면 다른 사람들하고 의견을 들어야 하고 조율을 해야하니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는거야. 그렇게 몇 년을 하다보니 힘이 들어. 그리고 일이 끝나면 사람들과 헤어지는게 좀 아쉬웠고, 집을 잘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생각한게 <우야 식당>인거지. 밥도 할 수 있고, 집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진득하게 할 수 있는 걸 생각했고, 나의 개인프로젝트 같은 거. 관계맺기를 위한 처방이라고 생각해.
이것 마저도 일이네?
일은 아니지. 일은 돈받는 회사가 일이지. 밥을 해주는 것도 재밌어.
지금까지 몇 사람 정도 방문 했어?
최소 20명정도? 단체로도 오고, 회사 사람도 오고, 혼자 사는 사람을 좀 많이 만나고 싶었어. 나같이 외로운 사람들. 별거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해주는게, 내가 선해지는 거니까 좋아. 장을 보는건 혼자 먹을 양만 하는게 힘드니까 같이 나눠 먹는다는 것도 있고.
<우야식당>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퀴어 문화 축제가 끝나면 ‘냉장고를 부탁해’를 하고 싶어. 출장 우야식당. 남의 집도 방문해보고, 냉장고도 열어보고 정리해주고, 안에 있는 걸로 음식도 해주고 싶어.
해영은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에너지를 발산할 줄 알고,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새 프로젝트 우야식당이 어느 날 누굴 찾아갈지, 어떤 맛있는 이야기를 나눌지 기대된다.
해영님 메일주소 gomdoly15@hanmail.net / @wooyacook
인터뷰 진행/편집 미카
사진 Marc
※ 이 인터뷰의 내용과 사진은 해영님과 친구사이의 동의 없이 다른 곳에 게재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