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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밍아웃 coming out - 어느 어머니의 아들
- 나무늬
- 1999.07 | 2000.02.03
'커밍아웃 - 어느 어머니의 아들'은 친구사이의 게이적 글쓰기 게시판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저자와의 연락을 위해 애써주신 친구사이님과 게재를 허락해주신 나무늬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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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어린시절의 파편같은 기억들 중에서도 유난히 섬뜩하게 떠오르는 말이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살던 집은 볕이 잘 들지 않던 반지하 셋집이었다. 그 축축하던 집, 현관과 거실의 구실까지 겸했던 쪼가리만한 부엌 모퉁이에 문제의 글귀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 현판은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들에 밀려 찬장위로 올라가서 거의 천장에 맞닿을 듯 높이 걸려 있었다. 한껏 고개를 쳐들어야 시야에 잡힐 수 있었지만 막 한글 익히기에 재미를 붙이던 어린 나는 곧잘 그 글귀를 소리내어 읽고 또 읽곤 했었다. 글귀 밑에는 그림도 있었다. 훤칠한 이마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하는 잘생긴 서양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거만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들고 엄숙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고슬거리는 수염 사이로 드러난 온화한 미소는 항상 기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표정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매일 아침, 가족이 모인 밥상에서 밀린 육성회비나 수업료 등으로 전쟁을 치를 때도, 이따금씩 술에 취한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가 언성을 높이며 닥달할 때도, 느적느적한 오후, 혼자집을 보던 어린 소년이 외로움과 공포로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커텐을 적실 때도, 그는 늘 같은 얼굴로 미동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물론 일요일 열한시 온 가족이 교회에 가고 없는 시간에도 그는 덩그러니 홀로 남아서 집을 지켜주었다. 그가 우리 가족을 신실하게 보호하고 있었던 건지, 혹은 갑갑한 현판에서 탈출하고자 비상을 꿈꾸고 있었던 건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글쎄, 어쩌면 우리 가족들이 그를 가두어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얼마나 성실했던가. 10년 동안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어 주었다.

온 가족이 고대하던 아파트 분양권이 당첨되어 이사를 가던 날에서야, 그 현판의 주인공은 마침내 고단한 설교를 마치고 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벽에서 현판을 떼어내자 10년 동안 쌓였던 먼지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걸레로 박박 얼굴이 닦여도 그 남자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이미 변색되어 누르탱탱해진 현판이 쓰레기더미에 추가되기를 기대했던 내 바램과 달리 아버지는 그 낡은 걸 명화 복사본들과 함께, 이삿짐 더미에 버젓하게 올려놓았다. 어쨌든 이삿짐을 다 옮겨 놓았을 때, 그 현판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집정리가 끝날 때까지도 현판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새집에 어울리지 않는 때묻은 현판 하나 없어진 게 뭐 별거냐고 가족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버지는 이삿짐 센터에 전화까지 걸어 현판의 행방을 찾고자 했었다. 나는 더 이상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기도하지도 않게 된 것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버지는 곧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라는 다른 현판을 사왔다. 아버지는 새로 붙인 현판이 화목을 신조로 삼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 더욱 충만한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전지전능함과 주인됨을 강조하는 현판 아래서 다시 우리 가족들은 10년 동안 밥을 먹었다. 물론 그전처럼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일정치 않은 식사를 모두 관할하기가 벅차지는 않았을까. 누이들은 차례로 결혼을 했고, 나는 학업을 핑계삼아 집을 떠났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둘이서 그리스도를 모시면서 마른 밥을 삼키고 있으리라.

사람들은 말한다. 대단한 부모님을 두었다고. 전쟁통에 부모님을 잃고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월남한 아버지. 친척들 집을 전전하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교사자리를 얻은 그였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동생들까지 대학을 졸업시켰고,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일해온 바, 이제는 매 주말이면 제자들 결혼식 주례에 쫓겨다닐 만큼 존경받는 은사의 지위까지 이르게 된 터였다. 어머니. 변변치 못한 결혼식도 빚을 내어야만 치를 수 있었던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와서 병약한 몸으로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악다구니같이 살림을 일구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비밀과외까지 시켜가며 맏딸을 일류대학에 집어넣는데 성공했고 유학이 도피처럼 보였던 시절에도 훌훌 미국으로 떠나 보냈으며 결국엔 의사 사위까지 얻었다. 맏딸의 그늘에 가리는 감이 있긴 했지만, 둘째 역시 무난하게 장학생으로 약학대학에 입학시켰다. 시절이 어수선한 탓에 데모를 한답시고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일찌감치 부잣집에 결혼을 시켜버렸다. 늦게 얻은 막내아들은 그저 안쓰러워, 모질게 다잡지 못하고 마음을 놓아버린 탓에 삼수까지 시켜서 겨우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의 수강신청서까지 줄줄 꿰어차는 열성으로 줄곧 A- 이상의 학점을 유지시켜 IMF 시절에도 거리낌없이 연봉 3천의 직장에 취직시켜냈다. 할렐루야. 교인들은 다 주님의 품안에 있는 가정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설교감으로 승화시키는 목사님은 아예 우리 가족을 단골 메뉴로 삼고 있었다. 교인들은 시기와 샘을 감추고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외치며 더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김집사님과 배집사님은 요셉과 성모마리아 같은 미소를 머금고 성가대에 끼어서 이미 윤기를 잃고 쪼그라든 목소리를 펴고 또 폈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 날의 두 사람은 지금처럼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 십일조 헌금이 아까와서 한 달에 한두 번 씩 겨우 대예배만 참석했고 그도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사람구경에 두리번거리는 우리들의 손목을 붙잡고 바지런히 교회를 빠져 나왔었다. 우리들에게도 대예배 이외의 학생회 예배는 금지시켰고, 중3, 고3이 되면 어김없이 학업에 열중하라는 엄명으로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 거실에 걸려있던 현판은 그래서 제기능을 못한 걸까... 이제와서 집나간 탕자들이 되어버린 자식들의 배신을 무시한 채, 새벽기도와 수요예배, 성가대에서의 열띤 찬양으로 다시금 가족 안에 성령의 불꽃을 지필 수 있을까.

나는 서울에 올라온 후부터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가는 주말이면 아버지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룩한 제단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순한 양 노릇을 했었지만, 서울에서의 일요일 오전은 대개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텔레비전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소일했다. 고향의 교회에서는 우편으로 주보가 배달되었다. 어쩌다 삐죽이 나온 편지봉투가 반가워서 우편함을 열어보면 한 달치 주보만 수북이 쌓여있기도 했다. 가끔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결혼소식이 실리기도 했고, 노장로의 부음을 알게되기도 했지만 그런 건 굳이 주보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나는 점점 겉봉도 뜯지 않은 주보를 쓰레기통에 쑤셔박는데 익숙해져 갔다. 괘씸한 내 소행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배달되는 횟수는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턴가 주보는 아예 오지 않았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 되었다. 하기사 어차피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믿음을 회복시킬 수는 없을진대, 나는 신앙심을 되찾는 일로 스스로를 고행의 길에 빠뜨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나는 감히... 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원해주기를 바란다. 커밍아웃 이후로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커밍아웃하던 날

올 것이 왔다. 아니, 진작에 왔어야 할 것이 마침내 왔다. 게이 커뮤니티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나의 어머니, 혹은 배집사는 자식들이 코흘리게 동네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친구들의 이름뿐 아니라 부모의 직업, 전화번호를 다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부모들과 한번씩 전화통화를 해야만 어엿한 친구로 인정을 해주었다. 그렇게 품안에서 키운 아들이었기에 객지 생활을 떠나 보내놓고는 늘상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밤 아홉 시가 되면 아들의 자취방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해야만 다리를 뻗고 잠을 이룰 수 있었고 혹시나 연락이 닿지 않을 때면 당장 가슴이 벌렁거리고 얄궂은 생각이 치밀어서 호출기와 핸드폰 번호를 번갈아 누르며 전화통만 못살게 부렸다. 애간장을 끓이다 간신히 연락이 닿으면 아들이라고는 퉁명스럽게 하는 소리가 

'그냥 친구들이랑 있어요.'

'친구 누구?'

'엄만 모르는 친구들이야.'

'어디서 만난 친구들인데?'

'그냥 모임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데? 또 술 마시니?'

이즈음 이르면 아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별 용건도 없으면서 왜 매일 전화해서 감시하는 거죠?'

'엄마가 아들한테 매일 안부 전화하는 건 당연한 거지. 네가 어디 천애고아냐?'

큰소리를 치고서도 머쓱해진 배집사는 변변찮은 용건들 즉 '나갈 때는 꼭 가스 불은 잠그고 창문도 항상 닫고 다녀야 한다. 몸도 약한 애가 왜 그리 밤늦게 다니느냐, 술 담배는 절대 안된다. 네 아버지 좀 봐라. 술 땜에 병을 얻어 지금 무슨 고생이냐? 너도 네 아버지랑 같은 체질을 타고났으니 젊어서부터 조심해야 된다.' 등을 골자로 하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물론 '엄마가 자식이 무얼 하고 다니는지는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느냐.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니?'라는 자신의 자녀교육철학을 덧붙이는 것도 매번 잊지 않고 챙겼다.

모성본능이란 그런 걸까? 언제부터인가 아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친구들과 만나기 시작했고, 이유없이 귀가시간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배집사는 흉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착한 아들은 부모님께 비밀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도박이나 여색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리고 귀가 얇은 아들을 곁에 두지 않고 대처로 내보낸 것이 실수였다,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아들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자식들 혼사문제와 남편의 건강문제로 분산되었던 신경을 다시 아들에게 집중시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은 손을 놓을 때가 아니다. 이제 마지막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는데... 성공을 눈앞에 둔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책임을 소홀이 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가족들을 속이는데 지쳐가기 시작했다. 누나들이 결혼한 후부터 은근히 결혼에 대한 압력도 가해지기 시작했고, 더이상 맞선을 차일피일 미룰 명분을 찾기도 힘들었다. 사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혼자서 각종 고지서들을 챙기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의 세일 광고를 놓치지 않았으며, 시장을 볼 때는 미리 살 것을 적어 가서 낭비를 줄이는 법도 알고 있었다. 내가 방을 어질러놓고 외출하면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치워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새벽까지 잠을 설친 날도 아침에 자명종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단순했던가. 영화나 책에서나 보아온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화해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이상으로 떠받들고 있었고,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해성사 따위란 혼자 고고한 척 해야하는 결벽증이나 이기심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으니까 가족들도, 사회도 나를 받아들여 주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시장통, 어지러운 난전들 한가운데 무지근하게 서있던 전화박스에서였다. 분주한 재래시장의 생동감에 취한 나머지, 나도 저들처럼 활기차게 숨쉬며 살고 싶었던가보다.

소심하고 치밀한 평소의 내 모습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날 내가 벌인 일은 성급하고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면... 언제까지 감추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일에 '적당한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적당한 때라는 게 언제인가? 데모하기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말을 무시하고 데모해서 민주화를 앞당겼고, 허리띠를 풀어놓기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못해 IMF가 왔다고 한다. 몇 번의 연애에 거푸 실패하다 결혼하기 적당한 때를 놓친 큰 누나는 뒤늦게 소위 잘 나가는 의사 신랑을 만나서 상류사회로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일찌감치 결혼한 둘째 누나는 2세 생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며 계속 피임약을 복용하다가 이제는 피임을 그만둔 지 3년이 지났건만 아이가 들어서지 않고 있다. 자식들을 품안에서 내보내야 하는 적당한 때를 모르는 어머니는 시집간 누나들의 냉장고에 마른 반찬이 몇 가지인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자식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눈앞에 두고 건강상의 이유로 명예퇴직 후, 언젠가 건강을 회복해서 재기할 수 있는 적당한 때만 기다리고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때가 올지 의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니? 얘가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니?'

어머니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나는 남루한 공중전화박스 유리너머로 장보기에 열중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가? 전화선을 몇 번이나 꼬았다 풀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튿날 즉시 '모친위독'이라는 그럴듯한 사유로 회사에 연가를 내고 고향으로 날아가야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후덥지근한 포옹과 눈물세례로 나를 맞았다. 어머니의 곯마른 입김에 멀미를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어머니의 모습과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어색한 아버지의 눈길, 싸늘한 누나들의 태도... 온 가족이 비상소집 통보를 받고 모여 있는 차였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할말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지만, 혼곤한 분위기에 취해 일순간 까무룩해져서 한참동안 어벙하게 서있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가해자였다. 기운을 내서 처음부터 조목조목 가족들에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사춘기 시절부터 따라다닌 비밀스런 고민을, 고민의 해결책으로 또래들이 죽음을 동경하는 정도보다 약간은 더 구체적으로 자살을 생각해 보았던 것,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다름을 무시한 채 이중의 삶을 살아야 했던 불편함, 그리고 스스로를 인정하면서 얻게된 마음의 평화와 다른 동성애자들의 사는 모습들... 조리있고 설득력있게 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워낙에 말주변이 없기도 했거니와 침통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서 한시바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마치 형 집행을 앞두고 고해성사를 하는 사형수의 그것처럼, 내 목소리에는 수치스러움과 어색함, 용서와 안식을 바라는 간절함이 뒤섞인 떨림이 있었다. 차라리 부흥회 강사로 등장하는 간증인의 고백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했다면 사정은 나아졌을까.

마침내 어머니 혹은 배집사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아들의 면전에서 직접 확인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껴왔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었는데... 아들이 그동안 남몰래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내 속에서 난 자식인데 왜 몰랐을까... 내 아들이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또 그네들 시선에 연연해하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하늘이 골백번도 더 무너지는 것 같다. 이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원래 배집사의 말새는 과장이 심한 편이긴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보다 더 큰 변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걸 예삼아 비유했으리라. 그녀는 고개숙인 아들의 모습에서 수년 전 딸내미 뒷바라지로 미국에 체류하던 때 보았던 어느 게이를 떠올렸다. 식당에서 잠시 일하면서 보았던, 매일 점심식사를 하러 오던 미끈한 미국인이 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흉칙한 느낌이 들었던가. 다른 웨이트리스들처럼 어머니도 그의 테이블 서빙을 꺼림칙하게 여겼고, 주방에서는 그의 식기를 따로 세척하곤 했었다. 그가 옆으로 다가올라치면 행여 침이라도 튈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그런데 내 자식이 바로 그들과 같은 사람이었다. 가장 사랑하던 대상이 사실은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던 대상과 동일인이라니... 아무리 엄연한 현실이라도 쉽게 인정해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문둥병에 걸리건 살인죄를 지었건 그래도 너는 내 자식인걸, 어쨌든 가족들은 네 편이다.'

결연하게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결코 아들을 놓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해서 말한다.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걸로 믿는다. 열심히 기도하거라.'

여기까지는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어쨌든 건강은 조심하라'는 말에 감동까지 받은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과묵한 편인 아버지, 혹은 김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당신 아들이잖아요' 라며 속시원한 해결책을 채근하는 부인의 성화에 그냥 '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탓'이라고만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과일이든 곡류든 무엇이든지 술을 만들어 담가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꺼내놓고 자랑하곤 했다. 심한 지방간이라서 간경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받고서 주량은 현저히 줄였지만 그때부터는 각종 진기한 술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날, 파드득 넘어가는 어머니를 무심히 보아넘기며 아버지는 찬장을 열고 천천히 하나씩 술을 꺼내고 있었다. 개수를 세고 먼지를 닦아 다시 정리하면서 그는 갑갑한 시간을 참아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잠깐씩 울음을 내비치거나 가재와 게 사이를 오가며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다투던 어린 시절, 한솥밥을 먹으며 이해관계를 같이 할 때나 동기간이지, 내 가정을 꾸린 다음에야 동생이란 한 시절을 같이 보낸 타인에 불과한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일종의 속임수였는지도 모른다. 신경성 사지마비를 일으켜 자리에 누운 어머니의 손을 주물러드리고 서울로 올라온 지 이틀만에 어머니는 박차고 일어나서 커다란 여행가방을 챙겨서 올라왔다. 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쌍둥이 천사모양을 한 촛대를 놓고 성경을 펼쳐 둔 일이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된 듯했고 결전을 앞둔 전사의 비장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겪어야 할 싸움의 지난함에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야했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차례였다.

'나는 네가 남들 손가락질 받으면서 음침한 꼴로 사는 것... 절대로 못 본다. 부모가 되어서 어떻게 그런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니?'

그리고는 커밍아웃을 하게되면 항상 듣는 질문, 언제부터 그랬었는지, 고칠 수는 없는지 등등이 이어졌다. 매사에 철저한 배집사는 스스로 해답을 마련해놓지 않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들은 일탈의 길을 걷는 법이 없다. 만일 내가 아들을 잘못 키운 거라면 지금부터 바로잡아 놓고야 말겠다'고 단언했다.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덧붙였다. 말의 공해였다. 그녀는 내가 사이비 종교나 마약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믿기로 한 것 같았다. '철없고 순진한 아들이 잠시 나쁜 친구들을 만나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당장은 먹혀 들어가지 않겠지만 무의식에라도 아들의 귀에 인이 박히길 바라며 반복 또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로 분명 거듭날 수 있다고, 매일 저녁 아들의 손을 포개잡고 기도했다. 기도란 보통 신앙의 고백,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소망에 대한 간구의 순을 따른다. 어머니의 기도는 '소망'부분에서 특히 거침이 없었다. 성령이 강림하기라도 한 듯 주요 대목에서 아들의 손을 꾹꾹 눌러 잡으며 목소리도 높였다. 아들은 축축하면서도 뜨거운 손의 촉감에 불쾌감을 느끼며 움찔거릴 따름이었다.

퇴근시간이 한웅큼 지나고도 또 지났다. 아무리 찾아도 더 이상은 할 일이 없다. 곧 건물 스위치를 내려야 할 시간이다. 벌써 수위아저씨가 두 번이나 눈치를 주며 다녀갔다. 한숨한번 내지르고, 어깨도 한번 으쓱 제껴본다. 집에 가야지. 열흘째 어머니는 김나는 저녁밥을 지으며 아들 곁에 머무르고 있다. 달라진 것도 해결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집에는 가야지. 회색빛 어둠에 싸인 가로수들을 세며 타박타박 걸었다. 알싸한 저녁바람이 콧구멍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더 깊이 더 크게 코를 킁킁대며 들이마신다. 숨이 차다. 아직은 섯부른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지하철 역 가판대에서 스포츠 신문을 한부 집어들었다. 스포츠 신문은 불황이 없다는 말은 내가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골목 어귀. 저만치서 낯익은 중년 여인이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고 있다. 구멍가게에서 쫄쫄이 과자를 몰래 집어가다 들킨 어린애처럼 더럭 겁이 났다. 어디 숨기라도 했으면...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참에 어머니는 나를 발견했다. '도대체 어디 들렀다 오길래 이리 늦었냐?' 인적이 드물지 않은 길가에서도 기세등등이다. 그 큰 어머니의 눈동자가 의심이 섞여 얼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발작 중인 정신분열증환자의 눈동자 같다.

어머니를 앞세우고 음습한 반지하 원룸으로 들어갔다. 자물쇠를 따자 때 이르게 보일러를 가동시켰는지, 더운 공기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뭔가 허전하다 싶은데... 역시 벽 한쪽이 비어있다. 한면을 차지하던 액자가 사라진 것이다. 이곳에 방을 얻자마자 그동안 모아왔던 영화스틸 사진들을 부지런히 엮어서 만들었던 액자였다. 문짝만하던 액자는 갈갈이 찢겨진 채 싱크대 밑에 갇혀 있었다. '정신 시끄럽게 왜 저런걸 벽에다 붙여놓느냐? 사진도 어디서 이상한 것들만 모아가지고...' 한치의 굽힘없는 당당함이었다. 르느와르와 고호의 복사본들, 조악하게 그려진 성화들, 뜻도 모르던 한문현판들로 둘러싸여 질식할 것만 같았던 고향집을 떠나면서 나는 시계든 옷걸이든 벽에는 아무 것도 걸지 않은 채 빈 벽의 무구한 청결함을 즐겨왔었다. 단 그 액자만은 예외였다. 그건 소년시절, 값싼 변두리 극장에서 금지된 영화들을 전전하며 안으로만 삭혀온 영화에 대한 열정을 추억으로 박제시킨 것 다름아니었다. 나는 절제와 순종, 순화를 강요하는 성화와 현판들 대신 자유로움와 상상력,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스크린에 매료되었었다. 샤론 스톤의 뇌쇄적 눈빛과 리버 피닉스의 애젖은 표정, 장국영과 양조위가 연출하는 멋들어진 댄스신, 그밖에도 먼로, 제임스 딘, 줄리 갤런드, 모두가 구겨지고 찢어진 채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다. 내 손을 떠나버린 일에 대해서는 빨리 체념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그리고, 남아있던 어머니에 대한 미련과 동정심을 저 덧없는 사진들과 함께 쓰레기 분리수거봉투에 넣어 꽁꽁 동여맸다. 며칠 후, 어머니는 나의 액자가 뜯겨나간 빈 자리에 촌스러운 성화를 한 점 걸어 두었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했다.

'나랑 약속하자.'

또 무슨 선고를 내리려는 걸까? 흠칫 겁이 났다. 다잡아 앉은 두어 시간동안의 이악스런 열변은, 지금부터 게이 친구들과 일절 연락을 끊고, 가족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이성애자로 변신하라는 말로 요약되었다. 내가 양순하게 듣고만 있었을까? 발칵 화를 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어요.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거라면 왜 제가 30년 가까이 이러고 살겠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할까? 네가 한번 방법을 말해보렴.'

'저는 제 모습대로 동성애자로서 남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살 자신이 있어요.'

'안된다. 안된다. 그건 죽어도 안되는 일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 나는 네가 남들한테 업신여김 당하며 사는 꼴은 못본다. 차라리 같이 죽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고성으로 치닫는다.

'나도 한번 마음 편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저는 부모님들 원망한 적 없어요. 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러는 건가요?'

내 눈도 마침내 까뒤집어지고 손끝은 그닐거리며 저려온다.

'나가겠어요.'

'날 죽이고 나가라. 이 놈아.'

문 앞에 선 어머니를 그악스럽게 밀쳐보지만 이내 찰거머리같이 엉겨붙는 열오른 몸뚱이를 차마 어떻게 할 수 없다.

'여긴 내 집이니까 어머니가 나가세요.'

'매정한 놈. 네가 지금 보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구나. 넌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어. 정신병원에 같이 가자꾸나.' '... 아니다, 안돼. 남새스러워서 어떻게 그런 얘기들을 다 할 수 있겠니? 엄마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고쳐주고야 말겠다.'

사실 정신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의 수고를 헛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몇 십 년 전부터 이미 동성애는 질병분류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배집사는 정말로 아들이 변할수 있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낮에는 이성애자, 밤에는 동성애자, 그런 이중생활을 요구하는 걸까? 어머니는 대화를 시작하면 꼭 자신이 말을 맺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토론에서는 지기 싫어하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끝을 보지 않는다. 나는 약은 구석도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잘 안다고 큰소리치는 것보다는 많이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고 그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곧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같은 그녀 앞에서는 일단 양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말대로 생각을 바꿔보려고 노력할께요.'

이튿날 어머니는 한달간의 전쟁에 까부라진 몸을 일으켜 세워 부산으로 내려갔다. 아들의 마음을 바꾸어 보겠다고 그악스럽게 애쓴 결과 애매모호하나마 말다짐을 받아가는 그녀로서는 지푸라기 하나 건져가는 셈이었을 터이다. 어머니가 떠난 방에 대자로 벌러덩 누워본다. 긴장이 풀리면서 두통이 시작되었다. 좀처럼 머리가 아파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두통이란 견디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무렵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다. 사귀기 시작한지 정확히 168일째 되는 날 나는 일방적인 전화로 그에게 헤어질 것을 통보했다. 나는 어머니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능히 그의 직장이나 집을 찾아가서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런 결별선고를 X-보이프랜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가진 자의 너그러움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그와의 이별을 음미할 여유마저 없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사흘은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매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여독에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문이란 문은 다 열어놓은 채 침대시트를 훌러덩 벗겨내어 삶아댔다. 내가 출근한 다음에는 책꽂이를 뒤져 '동성애자 억압의 사회사' '성의 역사' 같은 책들을 찾아내서 몰래 없애 버렸으며, 이따금씩 불순한 흔적을 발견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책상이나 옷장을 뒤지기도 했다. 자신의 눈에 익지 않은 속옷 따위를 찾아내는 날이면 어김없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회사로 전화를 하거나 호출기를 울려댔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벗어놓고 간 속옷까지 끄집어내서 싸이즈가 네 것과 다르지 않느냐며 울고 앉아있던 적도 있었다. 아들의 퇴근후에는 또 할 일이 있었다. 나를 붙잡고 앉아서 자신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들이 지금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반복, 또 반복해서 학습시켰다. 그리고는 그지없는 모정에 스스로 감탄해가면서 날마다 조금씩 요구사항을 늘여 나갔다. 며칠동안 가없는 모정을 발산시키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는 옷가지며 수저, 소지품들을 방에 잔뜩 늘어놓은 채 자신의 부재를 대신하게 했다. 그녀는 부쩍 쇠약해진 남편을 위해 녹즙을 가는 일주일의 나머지 반에도 하루에 몇 번씩 아들의 소재를 파악하곤 했다.

나는 게이 친구들과의 연락을 일단 끊었다. 간신히 속을 터놓던 친구들도 당분간 만날 수 없었다. 의리와 공명심에 불타는 나는 그들을 보호해야 했다. 전화번호부나 수첩도 버리고 명함도 없앴다. 누군가 의논할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조금 더 슬기롭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왜 그랬니?"

s형의 첫 번째 대답이었다. 나는 그런 대답을 듣기 위해 출장이라고 어머니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그를 찾아온 건 아니다. 잘했다는 칭찬은 듣지 못하더라도 따뜻한 위로는 받고 싶었다. s는 내가 처음 게이커뮤니티에 들어왔을 즈음부터 알게되어 여러모로 살뜰하게 나를 챙겨준 사람이다. 그는 나름대로 기반을 잡고 행복하게 사는 게이에 속했다.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탓에 직장에서도 커밍아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그는 서울 근교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독립해서 몇 년째 애인과 동거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형제가 많아서인지 30대 후반에 이르는 나이에 미혼이지만 부모님들은 혼자서도 잘 살겠거니 믿고 있다고 한다.

"대다수의 부모님들은 절대 이해 못하신다. 그건 그들에게는 일종의 폭력과도 같은 거야. 네 결벽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힘들게 해서야 되겠니? 자식이 동성애자라고 선언하면 부모님은 당신들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생각한단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신의 불찰로 인해 자식이 남들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모습을 그냥 내버려두려 하겠니? 자식은 아무리 장성해도 부모 눈에는 보호해주어야 할 자식에 불과한 거야. 당신들의 품안에 있을 때 모습으로만 기억한단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비져나왔다. s형은 그래도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일러바치고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자부러진 내 어깨를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는 못내 다독거려준다.

'마음고생이 많겠구나. 어쨋든 용기있는 행동이긴 해. 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골방에서 나와야 사람들의 편견도 없앨 수 있으니까. 좀더 기다려보면서 참아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잖아. 힘들어도 부모님이 너보다 오래 사시진 않을 거잖아.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서히 해결될거야.'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쉽게 말하는가. 커밍아웃이라는게 흔한 가족분쟁처럼 누가 이기고 누가 진다고 설명되어지는 일인가. 그래도... 그날 s가 입었던 물빠진 청바지, 옐로워커와 함께 그의 말이 아직도 생각나는 걸 보면 그때의 내게 힘이 되어주긴 했었나보다.

1년 후

아직도 집에서는 나의 변화를 믿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가 선봉에 서고 아버지가 후미를 방어한다. 누나들은 예상했던 대로 방관자로 돌아서서 제각기의 삶을 살기에 바쁘다. 자형들이 심심찮게 내 결혼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아마 그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쉬쉬하는 모양이다. 누나들은 내가 변했다고 한다. 정서가 불안정하고 걸핏하면 짜증을 잘 낸다고 한다. 말로는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푸는가보다 한다. 취미생활을 좀 가져보라고도 한다. 차라리 '게이들은 다들 신경질적이니?' 하고 물어주면 좋겠다.

어머니는 여전히 내 얼굴에 어두운 구석이 있다며 정신병원에라도 가자고 한다. 만에 하나라도 내 정신에 병이 들었을까.

어머니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얼굴색이 나빠졌다. 초음파 검사 결과에 의하면 간경화 초기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벌써부터 어머니는 홀로 남게 될 노후 준비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듯 보였다. 그래도 아들의 결혼식까지는 남편이 버틸 수 있을 걸로 믿었지만, 그토록 정을 쏟았던 자식들이 아버지의 병환에 속수무책인 것을 보고 애가 끓었다. 간염이나 간경화는 치료약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다.

나의 어설픈 연기에 속고 싶었는지, 속는 척하는지 이제 어머니의 서울행은 한달에 한번으로 줄었고 전화도 2-3일에 한번으로 줄었다. 물론 전화 연락이 닿지 않거나 호출을 바로 수신하지 않으면 10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또 울리기는 한다. 낮밤이 없다. 호출기를 변기에 빠뜨리고 싶다. 드르륵드르륵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배설물들과 뒤섞어 분해시키는 상상을 한다. 사람들 보기 민망스러워서 호출기를 끄고 있으면 이내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옆자리의 김팀장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노라는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거든다. '총각은 좋겠어. 어서 연락주지 않고서 뭐해? 곧 국수 먹겠구만'.

나는 다시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들이 변할 거라는 어머니의 예상은 틀렸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들에 대한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듯이, 나는 내 성적 정체성에 추호의 의심도 가질 수 없었다. 내가 이성애자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낯설기만 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질 때면 옛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가끔은 밤늦게까지 종로나 이태원의 단란주점, 나이트 클럽에서 무리지어 놀기도 했다. 물론 아직 누군가를 애인으로 정해놓고 사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랑은 여유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놀음에 불과하다고 단정짓기로 했다. 성욕? 게이들은 으례 그럴 것이라는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나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밤거리를 방황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런 게이들을 본적도 별로 없다. 그들이, 우리들이 주체못하는 것은, 소외와 외로움일 뿐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룻밤의 섹스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세상에서 소외되어도 끝까지 내 편에 남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제는 '내일 서울에 가마'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후 술을 퍼마시고 잤다. 숙취에 허둥거린데다 아침에 차까지 막혀서 출근시간도 맞추지 못했다. 오늘은 숙직이다. 그래도 숙직근무를 설 때가 마음은 편하다. 온갖 밑반찬과 새로운 기도제목을 들고 찾아오는 어머니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좁은 방안에서 어머니와 멀뚱거리며 앉아있는 것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처럼 전화를 하고 오는 날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다행인 경우다. 가끔은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소문없이 올라와서 놀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숨겨놓은 우렁각시를 발견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어머니의 의심증은 이따금씩 발작하곤 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속고 당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내 의심증은 너희들이 만든거야.'

어머니가 올라오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면 어머니도 잠들지 않았다. 일부러 고른 숨소리를 내다가도 땀이 차인 등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감당치 못해 옆으로 돌아누울 때면 어김없이 그녀도 휘유 한숨을 쉬거나 잔기침을 뱉었다. 나는 수면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돈 몇 백원으로 그보다 몇백 배의 가치는 더 있을지 모르는 시간을 팔았다. 수면제 한 알이면 가위에 눌리거나 잡스런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가끔씩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상상을 한다. 찜찜한 구석이 있지만 유쾌한 상상이다.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한다. 가족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면 내가 가족을 떠나야 하겠지만 나의 가족은 결코 이탈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불화는 아무리 서로가 달음질을 쳐도 끝까지 평행선을 그리며 화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제사 뒤늦게 고백하건데,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이 구속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후 문득문득 입가에서 맴돌다 삭제되었던 이 흔한 명제를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십 수년이 걸렸다. 이제 위선은 그만. 부모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효를 다하는 모범적인 아들인양 행세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난히 낯을 가려 한사코 엄마 치마폭을 떠나지 않았다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린 시절에는 남달리 어머니를 사랑했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칭찬을 받기 위해 100점 짜리 시험지만 내밀었고, 70점 짜리 시험지는 감추었다. 어머니가 싫어할 만한 친구들은 사귀지 않았고, '칠칠치 못한 것이 꼭 네 아버지 같구나.' 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다. 지금. 어린 시절의 감정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나는 집을 떠나는데 성공했다. 남루한 자취방에서 뒹구는 무료한 휴일 오후나 잠 못 드는 밤이라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최루성 가족멜로드라마나 명절날의 고향찾기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고 가슴이 찡했던 적은 가끔 있었지만 그냥 어린 시절 찍어둔 빛바랜 사진들 이상의 감회는 불러일으킨 적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향에 전화하는 것도 막연한 의무감과 연락을 하지 않았을 때 내게 일어날 귀찮은 일들-시시콜콜한 해명 등-에 대한 사전 예방의 차원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런 철없는 소리를 아직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맞아죽을 이야기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 무슨 돼먹지 못한 패륜아의 망언이란 말인가? 부모 밑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내가, 살면서 든 미운정 고운정마저 깡그리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나마 남들에게 사람대접 받으며 살게되기까지 뒷바라지 해준 은공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한지붕 아래 살아왔던 사람에게 느끼는 정 이상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도대체가 성격도, 가치관도, 생활방식도 맞지 않는 타인에게 혈연이란 이유만으로 절대적인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는 누가 만들어냈단 말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의 몇 번 째 계명이었던가. 저 세상에 불경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지옥이 있다면 마땅히 내가 적임자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모습에 솔직하고 충실하게 살고 싶다.

남북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어느 유명한 감독의 영화가 생각난다. 전쟁으로 헤어진 뒤 30년이나 지나서 아들을 찾아낸 어머니가 그간의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끝내 아들을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다.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고 못 배우고, 가진 것도 없어 성격마저 거칠어진 아들을, 부잣집 마나님이 된 어머니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화해를 소망한 관객들의 기대를 져버리긴 했지만 그런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설령 그녀가 한때 마음을 열었던들, 그 가족이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새출발을 할 수 있었을까...

2년 후

깨끗하고 밝은 분위기에 북적대지 않으며,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한 커피숍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에는 너무 단촐하고, 동네 터줏대감들의 사랑방이 되기에는 좀 고상하다 싶은 그런 곳들. 뚜쟁이들이 약속장소로 선호하는 곳들이다. J 호텔 커피샵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도심지 한복판에 위치한 탓에 한때는 제법 유명세를 탔겠지만, 같은 이유로 이제는 러브호텔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법한 이류호텔. 그래도 겉모양새에 비해 내부는 정갈해보인다. 서너 테이블마다 칸막이 겸 장식으로 꾸며놓은 담쟁이 조화 사이로 지친 표정의 내가 들어서고 어머니가 바싹 따라붙는다. 어머니는 경망스럽지 않을 정도로 두리번거린다. 창가에 앉아있던 초로의 여인이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온다. 나이를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분가루를 발랐긴 하지만, 눈에는 총기가 번득인다. 가까이서 보니 교회 권사님이다. 어머니는 '일찍 나오셨네요. 차가 좀 막히더라구요.' 인사를 하면서 권사님이 방금 일어서서 나온 창가로 눈길을 메다 꽂는다. '먼길 오느라 피곤하지?' 권사님은 내 팔짱을 끼고 인도자가 된다. 나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고개를 숙인 젊은 아가씨의 맞은 편에 앉았다. 아가씨의 옆에 앉아있던 닮은 꼴의 여인이 중년의 나이에 걸맞는 자애로운 눈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는다. 온화한 미소로 숨기긴 했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빛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눈길을 거두어 내 앞자리의 조신해 보이는 아가씨를 무던히 바라본다. 미장원에서 막 드라이를 마치고 나온 것이 분명한 보송거리면서도 윤이 나는 머리카락, 결혼식이나 졸업식 때나 입었을 듯한 쓰리피스. 화장이 잘 먹은 뽀얀 살결, 속된 말로 고가 상품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맞선을 보았을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처음으로 2차를 신청받지 않게 될 오늘을 내내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초로의 여인이 엄숙하게 그러나 노련하게 행사를 집도하기 시작한다. 집안 소개가 항상 제일 먼저다. 그리고는 직업, 나이... 오늘의 주빈인 나와 맞은편 아가씨는 짐짓 예절바른 젊은이인양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한다. 간단한 소개를 끝내자 노친네들은 으뭉스런 미소로 자리를 비켜준다. 나는 그동안 해왔던 대로 집안이야기, 직장이야기를 비롯해서 젊은 여자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관심이 있게 마련인 영화이야기, 여행이야기 등을 주절거린다. 처음 맞선 보았을 때의 어색함과 불쾌스러움, 상대방에 대한 미안스러움은 이미 농담거리가 되었다. 어차피 한 시간짜리 계약을 맺은 고객이니까, 주어진 시간 한도에서 서비스에 최선을 다한다. 무구한 그녀가 보다 나은 신랑감을 고를수 있도록 나는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특히 남자들이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엉터리 신화를 들려준다.

커밍아웃 이후로 열 일곱 번째 보는 맞선이다. 예기치 않았던 폭풍이 집안을 들쑤시고 지나간 폐허 위에서 나는 뒷수습을 위해 한 달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보냈다. 스스럼없이 굴기 위해서 부모님과 교회에도 나갔고 맞선을 보라고 하면 군말없이 선을 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고향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 눈치를 살펴가면서도 올 때마다 한번씩은 꼭 선을 보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가끔은 중매장이 여인들로부터 직접 호출이 오기도 했다. 곱게 늙어 귀티가 흐르는 그녀들은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인연을 맺어주는 전령으로서 자신들의 소명의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변변찮은 집안의 변변한 체면을 위해서,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않기 위해서 맞선은 거부할 수 없는 행사였다. 게다가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겠다.'라는 내 말을 '앞으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성애자가 되어 양가집 규수와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겠다.' 로 받아들인 부모님의 생각을 다시금 돌려놓기는 벅찬 일이었다. 나는 지쳐있었다. 어머니도 지쳐있을 터였다. 어차피 결혼까지 가게 되는 일은 없을것이니까, 맞선보는 일 정도야 감내할 수 있었다. 일단 선을 보고 나서는 얼굴이 너무 나부죽하다느니, 성격이 너무 얌전하다느니 미주알고주알 구실을 달아서 애프터를 거부했다. 나로서야 도를 닦는 셈치고 끌려나간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 나오는 아가씨들을 보고 마음이 쓰이지 않을수는 없다. 참하고, 순해보이는 아가씨일수록 나는 불편함을 느꼈고 지나치게 썰렁한 수다를 떨거나 줄담배를 태우거나 해서 밉상을 보였다. 하기사 요즘 세상에 맞선을 보러 나오는 자리에 부질없는 기대를 걸고 나오는 아가씨는 없겠지만... 그만큼의 시간값은 해주어야 했다. 이따금씩 그네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해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그들이 나를 특별한 기억 속에 간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예전에, 미혼이었던 때, 맞선보았던 많은 남자들 중 한 명, 애프터도 신청하지 않던 예의 없고 건방진 남자.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사람으로만 남고 싶었다. 오늘 나온 아가씨는 무슨 핑계를 대고 거절해야 할까? 곰곰 뜯어보니 턱이 약간 합죽하다. 나는 점점 쥐뿔도 없는 놈이 콧대만 높은 까다로운 총각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눈이 많았던 그해 겨울 내내 나는 불결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계약결혼. 게이들 만큼은 아니지만 레즈비언들도 결혼압박을 받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집안으로부터의 결혼에 대한 압박이 심해진 즈음부터 나는 계약결혼을 원하는 레즈비언들을 수소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미혼인 게이들은 마마보이가 많지만 나이 찬 레즈비언들은 독립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든 남자가 독신으로 살면 측은하게 보이고 두 남자가 같이 살면 더욱 볼쌍 사납게 여기겠지만, 여자가 독신이면 고상하게 보이고 둘이 살면 더 안정되어 보인다. 레즈비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만 해결된다면 남자와의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쨌든 어렵게 들음들음해서 두 사람의 레즈비언을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제각기 커플을 이루고 언약식을 거쳐 함께 살고 있는, 결혼적령기를 막 통과하려는 나이의 여자들이었다.

처음 만난 H 커플은 계약결혼을 호기심 반 불안 반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H는 번듯한 직장과 여성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나이도 동갑이라 양가 부모님들을 적당히 속일수도 있을 것 같았다. H(들)의 결혼 목적은 집에서 결혼자금 명목의 돈을 받는 것과 직장에서의 미혼자에 대한 차별 해소였다. 나는 조분조분 내 이야기부터 했다. 나는 장남이다. 시집살이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느정도 기본적인 집안 행사 때의 수고는 감내해야 할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욕심이 많은 편이다. 등등... 객관적으로 보아도 독립적으로 살아온 여자에게는 신랑감으로 썩 좋은 조건은 아니다. 구체적인 준비단계에 들어서서 요목조목 따지기 시작하자 그녀(들)은 몸을 사렸다. 그녀(들)로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참이었다. H 본인보다, 그녀를 빌려주어야 하는 애인이 썩 내키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결국 두어 번의 만남 끝에 첫 번째 시도는 후일을 기약하며 흐지부지 되었다. 결혼은 어떤 외피를 쓰더라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큰 구속이었다.

그후, 두어 달 동안의 수소문에도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계약결혼 따위는 환상으로만 접어두려던 무렵, 또다른 레즈비언을 만났다. 두 번째 L 커플은 진중하고 추진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즈음 나는 어느 정도 부모님을 속이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결혼의 중압감으로부터 한 겹 벗은 상태였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녀(들) 역시 첫 번째 커플과 마찬가지로 결혼자금을 집안에서 받아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약간의 빚갈이와 두 사람이 숨쉴 수 있는 너른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내 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들은 손수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서 나에게 따라 주기를 바랬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쪽이라도 행복해질수 있다면... 도와주는 셈치고 그녀의 계획에 동조하기로 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필요하긴 했다. 그즈음 어머니는 결혼만 해주면 모든 간섭을 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세상에 그럴 어머니는 없겠지만,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이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다.

우리가 맨 먼저 한 일은 집안에 결혼상대자로서의 서로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L의 집에서는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던 그녀의 폭탄선언에 의아해하면서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채 녹지 않은 강원도 두메산골. 꽃샘추위가 한겨울의 한파 못지 않던 때, 우리는 그녀의 가족들을 찾아 하루종일 인사차 돌아다녔다. 나는 먹기 싫은 보신탕과 매운탕을 와구와구 먹었고, 되도록 점잖고 무게 있어 보이도록 노력했으며, 사랑을 가득 담은 애틋한 눈빛을 L에게 간간이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려서 돌아간 부모님 대신 보호자 노릇을 해온 L의 오빠와 언니들은 나의 첫인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신랑이 너무 약하고 대차지 못해 보여 걱정이라고, 미안한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L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일단 얼굴 인사는 했으니, 어차피 부모가 아닌 이상 당사자들이 끝내 우기면 결혼이야 시켜주겠지. 절반은 성공이었다. 나는 필요이상으로 들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머니는 L을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여자친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애인이라니?' 하는 미심쩍은 태도로 내가 그냥 홧김에 한 소리로만 생각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L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방안에 그녀의 사진도 걸어놓고 어머니가 서울에 계실 때면 일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도 자주 했다. 그렇게 몇 주일을 보냈다. 아들이 쉰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겠지 싶을 즈음 나는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단칼에 무자르듯 절대 안된다고 했다. L의 배경 즉 나보다 한 살 많은 나이, 조실부모한데다 변변치 못한 집안. 하나같이 어머니의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L은 크리스챤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들이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는 번듯한 집안의 참한 아가씨로 직접 골라볼 참이었다.

나는 L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안하던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우스꽝스러웠다. 얌전히 다리를 포개어 앉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내지 않고 커피를 마셨지만 여장부다운 걸걸한 말투와 범상찮은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간단한 신상만 몇 가지 물어보더니 '좀 더 생각해보자. 아직은 내 아들을 결혼시킬 마음이 없다'고 야박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쫓겨나다시피하는 그녀를 집 앞 주차장까지 바래다주며 나는 여느 애인들처럼 L의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가늘고 작은데다 부드러운 여자의 손감촉은 어쩐지 징글징글 했다. 어머니가 환대를 할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었지만 쫓겨나다시피 하는 그녀를 보고서도 버썩 얼어붙은 채 서있기만 하던 나에게 L은 심히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나를 위로한다. '역시 내 생각 대로였어. 좀 힘들 것 같지?

'그 여자애도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무슨 여자애가 그 모양이야?' 어머니는 딱 잘라서 단정지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작은 일에도 소심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머니의 육감이란... 그런 걸까? 그녀의 직장과 전화번호 학벌 따위를 챙겨가더니, 혹시라도 나몰래 뒤를 캐고 다녔던 걸까? 배집사는 아들을 동성애자로 살아가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해프닝은 해프닝답게 끝이 났다.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성사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구차스럽게 결혼이라는 걸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미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커밍아웃을 했던 2년 전처럼 좀더 무모하고 용감했어야만 했다. L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녀는 언니오빠들로부터 한 푼의 결혼자금도 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쉬 포기하는 걸 보고서 더욱 기세등등 해졌다. 한사람에서 서너 명으로 늘어난 중매 아줌마들과 부지런히 내통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임종을 앞둔 사람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다섯 가지 단계를 밟는다고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한 단계가 오래 지속될 수도 있고 다른 한 단계를 건너 뛸 수도 있지만 대개는 큰 사건 후 6개월 쯤 지나면 수용의 단계로 접어든다고 한다. 비단 죽음 뿐 아니라 극복하기 버거운 일을 당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식이다. 나 역시 버거운 일이 닥치면 부정에서 수용에서 이르는 단계를 나름대로 체화시키며 유용한 처세철학으로 삼아 왔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커밍아웃에 대해서 3년이 되도록 부정과 분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협은 패배를 의미한다. 어머니, 혹은 배집사의 인생에서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남편이 사업을 하던 시동생의 보증을 섰다가 그가 부도를 내고 잠적해서 집이 날아갈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그녀는 시동생을 찾아내서 대판 싸우고 돈을 받아내고야 말았으며 그후로 의절을 선언했다. 큰딸이 유학 중 사귄 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곧장 미국까지 쫓아가서 결혼은커녕 학위마저 포기시키고 끌고 들어왔다. 둘째딸? 얌전하고 뒷손이 안가던 둘째딸도 부모의 뜻대로 순종만 한 건 아니었다.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겠노라고 집을 나가버렸을 때, 얼마나 에미의 가슴을 놀라게 했던가. 그래도 주저앉지 않았다. 친구들을 들쑤셔 딸을 잡아오는데 성공, 석 달 동안 집에 감금시키다시피 해서 젊은 혈기를 꺾어버린 그녀였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도 없는 법이다. 그녀의 지극한 모성과 가족사랑은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샘이었다.

수요저녁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우렁우렁 울려 퍼진다. 혼잡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소음에 나는 번번이 놀란다. 달동네와 부촌을 가르는 이정표 구실을 하는 골목입구 감리교회에서 나는 소리다.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마침 집 근처에 교회가 있어서 매주 나가고 있어요'라고 말을 했었던 바로 그 교회다. 밤을 새고 난 이른 새벽 이따금씩 종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그 교회의 무난한 평신도 중 한사람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딱 한번 들렀던 이후로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없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어느 밤거리를 떠돌다 오던 길이었을까? 고추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팍팍해진 언땅을 차며 집으로 들어오던 때, 군데군데 이빨 빠진 색전등이 가물거리는 교회가 자석이라도 달린 듯 나를 끌어당겼다. 대 예배실 문은 열려있었다. 괴괴한 예배당에는 간밤의 축제 끝에 치우지 못한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고, 한 구석에는 어지러운 크리스마스 트리가 색전구와 솜뭉치, 빤짝이들을 힘겹게 버티어내며 퇴락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풍경은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몇 발자욱 앞으로 나가본다. 어둠이 익은 눈에 의자에 누워 까치잠을 자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다시 숨죽이며 몇 발자욱 더 옮기니 바스러질듯한 형광등을 뒤에 감춘 십자가가 성큼 다가온다. 어렸을 땐 예배당 전면의 십자가 뒤에는 하나님이 숨어 있을거라고 믿었었다. 그때는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항상 맨 앞자리에 가서 앉곤 했었다. 이제 그만 숨고 나오시죠, 하나님. 술래에게 들켰어요. 지금 나는 혼자서만 형광등에 비친 십자가의 그림자를 받고 있다. 털썩 주저앉아 오른 손바닥을 왼손바닥에 붙여본다. 고개를 숙이자 일년치의 피로가 몰려왔다. 탁하며 온풍기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되는 주기도문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설령 유창하고 미려하게 주를 찬양하는 기도를 한다손 치더라도 내 기도는 부질없는 소망만 담고있는 탓에 하늘에 혹은 십자가 뒤에 계실 '우리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지 모른다. 의자에 묻어자던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에 문득문득 눈을 뜨기도 하면서 나는, 어느새 졸고 있었다.

상념을 들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이런 초저녁에 신경을 건드리는 전화벨소리를 울릴 사람은 어머니 배집사님 밖에 없다. 이틀 전 통화해서 조신하게 지내고 있음을 확인시켜 드렸는데, 그새 무슨 용건이... 누나랑 말다툼을 했단다. 아이러니다. 누나랑 싸웠다고 나에게 고자질을? 어머니는 아군과 적군을 혼동하고 계신건가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18번이 시작되었다. 10년 넘게 들어오는 동안 그 시간만큼의 살이 더 붙었고, 막연했던 형용사나 부사들이 직설적인 단어들로 대치되긴 했지만 눈을 감고 줄줄 외울 수 있는 레파토리다. 너희가 나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부분에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가만이 수화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었다. 집안에서 담배냄새가 나는 것이 싫어서 실내에서는 좀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할 수 없다. 담배연기로 고리를 만들어 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두 가치를 필터까지 피우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징징대는 똑같은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다. 대단한 폐활량이었다. 젊었을 때, 폐결핵을 앓았다던 것이 사실일까. 스스로의 지루함을 견디려는 듯 목소리는 이따금 단조의 멜로디를 타기도 했다. 내 결혼이야기까지 나온 걸로 보아 이제 끝나갈 때가 되었는가 싶다. 당연히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참한 색시 얻어서 번지르르하게 살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30분 동안 더 떠들어 댄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내가 한 말은 여보세요와 네. 끊을께요. 두 마디 뿐이었다.

계속해서 줄비가 내리고 있다. 말대답 않고 잘 참아낸 자신을 대견해하며 가로등에 희끗희끗 비치는 빗줄기를 구경한다. 베란다를 가린 천막과 그 너머 보이는 플라타나스 나무들도 처연하게 잎사귀를 늘어뜨린 채 빗줄기를 고스란이 받아내고 있다. 즈팟. 일순간 고요해졌다. 빗소리만 남겨둔 채 정전이 되었다. 어디선가 비에 젖은 까치나 비둘기 한 마리가 허망하게 감전사하고 있겠지. 여름이긴 하지만 여덟 시가 지난 시각, 빠른 속도로 어둠이 번져 갔다. 양초를 사 두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밤은 이대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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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글 속의 인물보다 더 씩씩하고 당당하게 커밍아웃 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행복하세요.

1999. 9. 12

from "친구사이 http://www.chingusai.net", 1999 ⓒ 나무늬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6-1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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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