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작가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롯이 기억나는 건 남자와 막 여관에서 섹스를 끝낸 한 여자가 길 위에 서 있다는 것뿐. 20대 초반에 닥치는 대로 읽었던 소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이끼에 잠식된 채 산속에 버려진 어느 소녀의 흐릿한 손거울처럼 이제 명료하지 않다.
여관에 남겨진 남자는 유부남이었던가? 여자가 슬픈 얼굴로 길 위에 서서 택시를 타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 비릿한 바람이 분다. 저기 택시 한 대 새벽의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조용히 달려온다. 그 순간 문뜩 여자는 자기 손끝을 본다. 손끝에 매달린 희뜩한 휴지 조각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남자의 정액을 닦다가 어느 순간 손끝에 남겨진 채 말라붙고 말았을 휴지 조각,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택시 앞에서 새벽의 바람에 처연히 나부끼고 있다.
한 번쯤 손끝에 달라붙은 휴지조각을 경험하지 않는 남성이 있을까? 욕망의 덧없는 흔적, 소소한 웃음마저 쓰게 만드는 정사의, 혹은 자위의 그 도저한 흔적. 예전에 난 어느 게이 포르노에서 자기 손끝에 달라붙은 휴지를 보며 gangbang 시뮬레이션을 연기하는 한 남자의 눈빛을 보았다. 이모저모 슬픈 포르노였다.
아무튼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소설 속의 이 이미지를 가지고 아주 오래 전, 난 내 식으로 번안해서 단편 시나리오를 썼었고, 이후 이 단편은 코닥 필름 회사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게 되었더랬다. 말년에서야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된 노인이, 어느 날 사기꾼의 정액을 손에서 닦아내고는 혼자 처량히 술을 마시다, 결국 자신의 손끝에 달라붙은 휴지조각를 발견하자마자 잡아떼고 쥐어뜯으면서 흐느껴 운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사정 때문에 그 영화는 결국 제작되기 직전 엎어지고 말았다. 이때 스텝들과 마신 술의 양은 족히 미니 풀장 정도 되지 않을까.
꼭 영화에 구현하리라 남겨 놓은 그 이미지, 이번 장편 시나리오를 쓰면서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포기해버릴 정도로 아까운.
생각해 보면 괜한 욕심이지 싶다. 마음만 부산한 자의 괜한 허기이지 싶다.
처음으로 써본 해피엔딩의 이 장편 시나리오에 나는 오늘 밤 씬 하나를 새롭게 덧붙이기로 마음 먹었다. 택시를 기다리느라 길 위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남자, 바람에 날리는 손끝의 휴지 조각,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David Byrne의 앨범 [Lead us not into temptation]를 열렬히 지지하며.
David Byrne | Speech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