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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칼럼] 세상 사이의 터울 #8 : 사회성의 피안
2020-09-04 오후 1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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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8월 

 

[칼럼] 세상 사이의 터울 #8

: 사회성의 피안 


 

1.

 

이성애자들 옆에서 입술을 달싹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들의 연애, 저들의 섹스, 저들의 결혼과 그를 바탕으로 일굴 가산의 축적, 저들의 기혼자 청약통장과 배당의 우선순위, 따지고 보면 하나도 내 것이 없던 그 모든 대화 주제에 얼마간 끼어보고 싶던 순간. 그 세계란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너무도 강고하고 완결돼 보여서, 나는 그 흠없는 세계에 누가 되고 싶지 않다. 거기서 무어라도 한마디를 보탤 수 있느냐는, 나를 잊고 그들의 언어를 복화술처럼 따라하며 당장 그들의 환심을 사는 데 투항하느냐에 달려 있다. 항복이란 주로 자존심이 상하므로, 그 완결된 풍경 가운데 입술을 달짝이며 앉았는 것도 일견 당연한 일이다. 

 

이른바 커뮤니티에 잘 적응했다고 자부하는 일틱한 게이 가운데 한 끼순이 게이가 있다. 게이 치고 여성스러움 없는 게이 없다지만, 그의 것은 유달리 눈에 잘 띈다. 사람에 대한 사랑처럼 감출 수 없는 그의 끼는 소위 잘 팔리는 게이들 가운데 애써 자리의 흥을 돋구는 소재가 된다. 그런 방식만이 저들 사이에서 그가 끼어놀 수 있는 문법이라는 걸 그는 알고 저들은 모른다. 저들은 남자다운 외관과 근육이 주는 계서제의 배당금에 잔뜩 도취돼 있고, 나는 그 흠없는 세계에 누가 되고 싶지 않다. 때로는 몇백 번이고 꺼내든 너스레 외에 다른 내 얘기를 해보고 싶지만, 그의 달싹이는 입술은 양옆의 게이들이 외치는 남자한테 팔린 무용담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성적인 호감과 욕구가 관계의 화폐처럼 거래되는 게이커뮤니티에 한 소년이 앉아있다. 그는 최근에, 혹은 예전에 어떤 남자로부터 동의하지 않은 성접촉을 당했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몇몇은 기왕 이렇게 된 거 몸 굴리고 살자며 저 거대한 화폐의 경제로 스며들었지만, 그는 왠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그것이 내 책임인 것 같았다. 그 경험 이후 그는 이제까지 믿어왔던 성애의 세계, 혹은 그를 바탕으로 한 친밀함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석에서 허심탄회하게 술마시며 고민도 상처도 아름답게 해결될 것 같은 세계는 그에게 이미 박살난지 오래고, 그에게 박살난 세계의 철석같은 문법 위에서 어떤 이들은 운좋게 사람을 사귀고 섹스를 나누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는다. 나는 그 흠없는 세계에 차마 누가 되고 싶지 않다.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얼굴이 혼이 빠져나간 듯 파리하다.

 

눈앞의 사람들과 한번쯤 부드러이 어울리고 자리에 맞는 말들을 구사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욕망의 많고 적음과 별개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람과 상황 또한 실은 살면서 한번쯤은 겪거나 눈으로라도 목격해보는 것이다. 실은 대단한 것도 없을 그 사회성의 기싸움에 끝내 도태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문 입술 사이로 아주 오래 전부터 맡아온 성마른 고목 냄새가 코를 스친다. 여기 이 자리를 견딜 수 없었을 만물이 피해 숨은, 이 친밀함 뒤의 세계가 있었던 거다. 이 완결돼 보이는 사람 사이의 문법 자체가, 누구에게는 끝내 하나의 외국어였던 거다. 

 

-

 

어느 자리든 어느 공동체든, 우린 서로 같다고 대강 속을 수 있을 그 찰나의 욕망이란 중요하다. 거기에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속는 사람도 있고, 그게 불완전하단 걸 알면서도 그걸 통해 무언갈 도모해보려는 사람도 있다. 같음의 거짓이란 그만큼 달콤하고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 매료되고 마음이 끌리는 것부터가 나쁠 리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도 속는 내 순정한 욕망이 아니라 남에게 칼을 꽂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때가 있다. 너와 내가 실은 충분히 다르다는 새된 진실을 얼만큼 직면하느냐에 따라, 우린 그래도 같다는 조심스런 거짓이 반짝 쓸모있어지거나 말거나가 갈린다. 내가 이 사람이랑 같이 놀고 있다 해서, 혹은 일하고 있다 해서 내가 지금 이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달라도 같고 싶은 거짓이 순정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것들이 많다. 사람의 진심이야말로 나 아닌 누구에라도, 나와 아마도 참혹하게 다를 그 누구에게라도 딴에는 진짜 마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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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의 온라인 작가 집단 독립게이포럼(Independent Gay Forum)은 1998년 창설되어 2010년 해산되었다. 보수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띤 동성애자 작가의 모임을 표방한 이곳은,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도덕성과 정치적 질서에 위협을 가한다는 '보수적' 주장"도, "게이가 근본적인 사회 변화나 사회 개혁을 지지해야 한다는 '진보적' 주장"도 똑같이 거부한다는 내용의 조직 원리를 내세우는 한편, "반동성애 보수주의와 진보적 퀴어 정치" 모두에 반대한다고 천명했다.1)

 

스스로가 일부일처제에 충실한 기독교도라 밝힌 브루스 바워(Bruce Bawer)는 이 포럼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96년 그의 저서 『퀴어를 넘어Beyond Queer』에서, "대부분의 게이들"이 좌파의 "퀴어적 생각"을 반대하는 "조용한 다수"라고 언급했다.2) 더불어 1995년 『사실상 정상Virtually Normal』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한 앤드루 설리번(Andrew Sullivan)은 독립게이포럼의 주장을 정교화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2001년 9.11테러 당시 활약한 게이의 용맹한 남성성을 추앙하는 한편,3) 테러가 발생하기 석달 전인 2001년 6월 7일 뉴욕 강의에서 "신좌파 페미니즘이 게이 남성을 소외하고 배제"한다고 언급하고, 게이들이 미국 민족주의를 지지한다면 미국 사회로부터 보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4) 

 

이에 대해 리사 두건(Lisa Duggan)은, 이들의 주장이 "국가가 승인한 이성애 우월성과 특권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고정된 소수"만을 대변하고 있고,5) 성소수자들을 짓누르는 이성애 규범에 대항하지 않고 개인의 연애와 가정생활, 소비에만 집중하는 문화를 낳음으로서 "이성애규범성을 고수하고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6) 또한 그는 '퀴어'라는 말이 "성적 정체성의 통합성"에 대해 질문하고, 어떤 정체성을 규범을 거스르고 유동적인 형태로 "정치화"하는 감각을 일깨워왔다고 평가했다.7)


 

-

 

1)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역, 『평등의 몰락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2003], 118-119쪽.
2) 같은 책, 130쪽.
3) 같은 책, 144쪽.
4) 같은 책, 146쪽.
5) 같은 책, 149쪽.
6) 같은 책, 123쪽.
7) 같은 책,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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