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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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 2004-01-19 11:17:24
+1 1093
난 호박을 좋아한다.
이 놈은 된장찌개에 넣어서 먹어도 맛있고, 기름 치고 슬슬 볶아서 먹어도 맛있다. 나만의 요리법인데, 호박과 가장 궁합이 맞는 재료는 마늘과 새우다.

난 오늘도 호박을 샀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오늘 호박을 샀던 실제의 바로 그 슈퍼마켓에서 어떤 여자가 호박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난 딴생각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리허설인지도 모른 채 엉엉 울고 있던 여배우는 실제 컷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나한테 된통 삐지는 바람에 마지막 촬영을 위해 그녀를 달래느라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녀에게 오이나 가지도 아닌, 호박을 들게 만들었을까?

왜 하필 호박이었을까? 난 오늘 바로 그 자리, 촬영을 했던 그 슈퍼마켓의 그 자리에 선 채 6년 전의 기억 속으로 슬그머니 침잠하고 만다. 그래 난 이곳에서 호박을 집어들며 7년째 살고 있다. 부옇게 혼탁해지는 머릿속.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다. 비 온 후의 장날 아침 채마맡을 돌아다니며 호박을 찾던 가난한 소년의 모습도 떠오르고, 조금 더 길고 짙은 녹색을 띤 외래종자가 시골에 들어왔을 때의 기분나쁨도 생각나고, 이 놈을 가지고 집에 가서 어떻게 요리를 해먹을까 하는 입맛 다시는 상상도 머릿속에 부옇게 떠돌아다닌다.

기어이 그 놈을 잘게 썰어 들기름과 마늘과 다진 파와 함께 슬슬 볶아서 내 입에 슬쩍 밀어넣고 향긋한 호박 냄새를 음미하는 동안에도 줄곧 왜 호박일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난 호박을 자주 사고, 호박을 자주 먹으며, 슈퍼마켓에 갔을 때도 호박을 먼저 산다. 냉장고에는 말라 비틀어진 호박이 서서히 썩는 단계를 넘어 화석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넘쳐나는 호박 때문에 요리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걸 버젓이 알면서도 아무 찌개나 호박을 넣을 때도 있다. 성적 판타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강박 중의 하나다. 자위하고 난 호박을 가족과 함께 맛있게 먹더라는 유치찬란한 음담패설을 성적 판타지의 몸체에서 떼어낸 지 이미 꽤 된 나이니까 말이다.

혹시 도마 위에 잘 씻겨진 호박을 놓고 정갈하게 쓸어내는 그 재미에 혐의가 있지 않을까? 나란나란 썰어져 가지런히 제 몸을 뉘운 그 호박들은 뒤죽박죽인 채 늘 혼수 상태로 칩거하길 좋아하는 내 생활에 대한 식물적인 반동인가?

슈퍼마켓에서 오늘 호박을 고르며, 난 왜 하필 호박인가? 하고 내내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 어쩌면 이건 호박을 좋아하는 남자를 얼른 납치하라는 신의 은밀한 계시일지도 몰라. 내 욕망에 대한 은밀한 알리바이, 대책 없은 내 생활 풍경에 대한 은밀한 사보타지일지도 몰라, 호박은. ^^






라이카 2004-01-19 오후 22:53

전 아무찌개에나 두부를 넣곤 하죠. 그런데 두부는 고르는 재미도 없고 직접 집을 수도 없는 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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