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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6 : 어느 게이가 바라본 성별 정체성
2015-10-30 오후 23: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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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 
어느 게이가 바라본 성별 정체성 - 잡지 <BUDDY>에 실린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
: "트랜스젠더", "수술", "성별", "정체성"
 
 
 
 
0. 잡지 <BUDDY>와 LGBT
 
 
1990년대 중엽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태동과 함께, 현재 LGBT라 불리는 각각의 성정체성들이 차례로 가시화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 때 게이·레즈비언과 함께 트랜스젠더에 대한 글들과 당사자의 커밍아웃 또한 함께 대두하게 됩니다. 이렇게 LGBT가 공공연한 형태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한가운데에 잡지 <BUDDY>가 있었습니다.
 
<BUDDY>는 1998년 2월 20일 창간되어, 2003년 12월 24일 통권 24호를 끝으로 종간된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전문잡지입니다. 성소수자 전문지 최초로 공식적인 유통망을 거쳐 전국의 서점에 정식으로 비치되었던 잡지이기도 합니다. 잡지의 편집장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한채윤 님으로, 주지하듯이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 초창기부터 참여하셨던 분입니다. 2000년 퀴어문화축제가 발족한 후부터 현재까지 지켜오고 있는, 각각의 LGBT 정체성을 느슨한 형태로 묶어내는 방침이 이 <BUDDY>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가령 게이들이 좋아할 화보와 레즈비언들이 좋아할 화보가 <BUDDY>의 양 페이지에 같이 실리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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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lection for Men / Collection for Women (<BUDDY> 3, 1998.4., 63-64쪽.)
 
 
이렇게 LGBT를 비교적 균형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BUDDY>인 만큼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도 다수 실려 있고, 이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의 트랜스젠더 관련 이슈의 맥락을 읽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 <BUDDY> 속에 실린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를 읽어보면서, 사회 속, 혹은 성소수자 가운데 트랜스젠더가 가진 위상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BUDDY> 전권을 통틀어 실린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는 총 44건이며, 크로스드레서 등의 유사 범주 기사까지 합치면 약 60건에 달합니다. 각 호별 관련 기사들의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특히 1998년 12월에 발간된 11호에서 "트랜스젠더를 알자"는 특집 기획이 실린 이후로는, 매 호마다 거의 빠짐없이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가 최소 1~3편씩은 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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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확대됩니다.)
 
 
 
1. "트랜스젠더" : 성별 정체성
 
 
먼저 트랜스젠더란,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 성이 생물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과 맞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내가 어떤 성을 좋아하느냐에 앞서, 내가 스스로를 어떤 성으로 파악하느냐는 '성별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앞서 말한 어떤 성에 끌리느냐는 '성적 지향'과는 일정하게 분리되는 개념입니다. 가령 남자를 좋아하는 MTF 트랜스젠더라면, 그녀가 자각하는 성별이 '여성'이므로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적 지향은 '이성애'인 셈이 되고, 그녀의 성별 정체성은 곧 '트랜스젠더'인 '여성'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한 사람 안에 서로 중첩되어 나타나는 성정체성의 국면입니다. 그렇기에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SOGILAW) 등의 단체가 이 두 개념을 나란히 내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이성인가 동성인가의 문제이지만, 트랜스젠더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의 문제에 앞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육체와의 이질감이 핵심이다. 즉, 그의 육체는 육체적 성별상 남성에 속하지만 정신적 자아는 여성이라고 느끼는 것, 트랜스젠더는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 한채윤,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여성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된 것일뿐", '못생긴 트랜스젠더'에서 '글쟁이 터프걸'로 자신의 삶을 보듬어가는 김비 이야기], <BUDDY> 21, 2002.11., 32쪽.

 

 
나아가 트랜스젠더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성을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본래 자신의 성과 맞지 않는, 주어진 육체와 주어진 사회 관계를 바꾸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바람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셈이고, 이는 다른 사람의 눈을 제하고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매우 자명한 것이기 쉽습니다. 
 
 

 

'트랜스'라는 말 속에도 역시 치명적인 오류가 숨겨져 있다. 과연 무엇을 바꾼단 말인가? [...] 그들은 여성 혹은 남성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여자'였고 '남자'였으며 자신의 신체에 있는 성기의 모양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을 믿는다. 
 
- [트랜스젠더를 알자 : 트랜스젠더를 알자-당신이 외면하고 모르고 있는 성에 대한 보고서], <BUDDY> 11, 1998.12., 19쪽.
 
 

 

(하리수)"솔직히 저는 트랜스젠더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요. 세상이 저를 그렇게 인식하는 거죠. 정작 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 한채윤,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하리수 - 사회 전면에 당당하게 나선 트랜스젠더], <BUDDY> 19, 2001.5., 126쪽.

 

 
 
물론 이러한 자명함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쓰라린 경험이 소요됩니다. 주어진 몸을 거스르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기가 되고 싶은 본능이란, 잠깐 다른 성으로 살고 싶다든가 남성/여성의 행동을 따라해보고 싶다든가 하는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고, 그만큼 자신에게 깊이 뿌리박힌, 그것을 제하고는 도저히 본인의 인생과 사랑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화' 과정의 지난함은 몇 줄의 글로 넘겨짚기 어려운 무게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트랜스계 형님, 누님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 특히 누나들 같은 경우는 남자로서의 모든 특권 즉, 사회에서 기득권자인 남성의 대우를 마다하며 집안에서의 장남으로 또는 아들로서의 남자 대우를 다 싫다고 팽개치며, 심지어 남성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인 사정의 쾌감마저 즐기려 하긴 커녕 발기되는 것 자체가 혐오스럽고 싫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면, 남성의 가장 본능적 욕구마저 부정할 만큼의 그 무서운 여성으로서의 본능을 우리는 과연 무어라 말해야 하는가?
 
우리 형님들 아니, 나의 경우를 들어보아도 마찬가지다. 여자로 살면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어찌 보면 평범하게 살 수도 있으련만... 여자들의 즐거움 중 하나인 화장도 하고, 옷도 사입고, 마음껏 자신을 가꾸며 아름다와질 수 있는 권리를 즐기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 여성의 가장 기본적 본능인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모성애를 외면하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그 무서운 남성으로서의 본능을 우리는 과연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 
 
여러분에게 감히 물어보고 싶다. 그 무서운 본능 앞에서, 그 처절한 몸부림 앞에서 그래도 나는 여자라고, 나는 남자라고 울부짖는 그 절규들 앞에서 과연 당신은 눈물겨운 그들의 고통과 현실을 이해하며 그들이 남성임을, 여성임을 여전히 외면하거나 그들을 말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인정해주겠는가? 
 
- 혁이(아니마 시삽),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잘생긴 트랜스젠더], <BUDDY> 13, 1999.2., 76쪽.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1996년 "한국 트랜스젠더&크로스드레서 단체 아니마"란 모임을 조직했는데, 이는 현재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트랜스젠더 인권운동단체입니다. "아니마"는 창립 당시 동성애자인권운동 연대체였던 한동협(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이들의 활동목표는 "트랜스젠더들이 완전한 하나의 여성과 남성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2006년에는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가 발족하여 2012년까지 활동한 바 있고, 오는 2015년 11월 14일에는 3년간의 준비 끝에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의 발족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초창기부터 그 족적을 이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접속하면 우리나라 유일의 트랜스젠더 모임인 <아니마>를 만날 수 있다. 1996년 10월에 만들어져 2년동안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니마>, [..] (시삽)혁이님의 어조는 단호하다. 트랜스젠더들이 완전한 하나의 여성과 남성으로 인정받는 것은 여권운동이나 동성애자 인권운동이나 일반 인권운동과 노선을 같이하는 문제이며 충분히 함께 싸워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 [트랜스젠더를 알자 : 트랜스젠더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트랜스젠더 모임 - 아니마], <BUDDY> 11, 1998.12.,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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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술" : 공포와 라이센스, 그것을 넘어선
 
 
앞에서 보았듯이 트랜스젠더들은 남성/여성으로 변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원래의 자기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외과적 수술을 감행할 때, 그것을 흔히 '성전환' 수술이라 부르는 것은 일견 당착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술을 받는 당사자 트랜스젠더의 입장에서는 '성'이 '전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는 그저 수술을 통해 원래 자신의 성과 부합하는 몸을 가지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듯 '성전환' 수술이란 말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변되는 '스펙터클'이 은연중 강조되는 말이며, 실제로 여론 안에서 그런 방향으로 소비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는 수술에 임하는 당사자가 정체화하고 있는 성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는 결과를 낳기 쉽고, 이에 이 수술의 이름을 '성확정' 수술, 혹은 SRS(Sexual Reassignment Surgery)라 부르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성을 전환한다'라는 의미로 성전환 수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국에서는 성을 다시 '재정립한다, 혹은 확정한다'라는 의미의 'Reassign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한 철자 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성 전환 수술'이라는 말이 제3자적인, 전혀 시술받는 사람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편협한 표현인 반면, Sexual Reassignment Surgery(SRS)라는 표현은 시술을 받는 사람의 혼란과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한 표현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성 전환 수술'이라는 말보다는 '성 확정 수술'이라는 말이 더 올바른 표현이 될 것이다.
 
- 김비,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성 전환 수술,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BUDDY> 18, 2000.11., 129쪽.

 

 

 

(김비)"수술한 뒤 여자가 되는 소원을 이뤄서 좋겠다는 분도 있어요. 하지만, 난 여성이 된 게 아니라 내가 된 거 뿐이에요. 여자가 되는 게 소원이 아니었어요. 원래 여자라서 여자였지... 내가 무슨 변신로봇이야..."
 
- 한채윤,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여성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된 것일뿐", '못생긴 트랜스젠더'에서 '글쟁이 터프걸'로 자신의 삶을 보듬어가는 김비 이야기], <BUDDY> 21, 2002.11., 33쪽.

 

 

 

성전환 수술은 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성기모양 바꿈수술"이다. 

 
- 윤선후,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어느 성전환 여성 골퍼의 우승], <BUDDY> 16, 1999.9., 166쪽.
 

 

 
 
그런데 이런 외과적 수술은 거액의 비용이 드는 것은 물론, 자칫 생명의 위협을 감수할 만큼 그 위험이 큰 수술이기도 합니다. 하여 <BUDDY>에서는 이 "성전환" 수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소개하면서, 한번 수술하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BUDDY>에 실린 한 MTF 트랜스젠더의 기고글에서는, 기다려왔던 수술을 받기 직전 본인이 가졌던 공포가 술회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인용을 읽어보면, 주어진 몸과 다른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깨닫는 공포와, 그 공포를 넘어서 수술을 하든 안하든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사는 과정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 것인지를 어느 정도 체감할 수 있습니다. 
 
 

 

4월 초, 94년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나 그 후유증을 비관해오던 30대 남성이 자살했다는 우울한 소식이 신문상에 보도되었다. <버디>에서도 트렌스젠더들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지만, 특히 트랜스젠더들에게 성전환 수술의 결정에 있어 신중해줄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행한 사건을 막기 위함이었다.
 
- [토픽! 토픽? : 성전환 수술받은 30대 자살], <BUDDY> 15, 1999.5., 10쪽.
 

 

 

 

1994년 2월 28일 강남 S성형외과에서 캇트(성전환) 수술을 예약했습니다. 1달 동안은 데포도 안 맞고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빨리 했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는데 수술 1주일 전부터는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하루는 꿈에 돌아가신 삼촌과 얼굴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쭉 앉아 아파하시며 울고 있는 거예요. 삼촌은 맨 앞에 앉아 있고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나의 미래가. 엄마도 불쌍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수술하는 걸 조상들도 아나보다. 그러니까 꿈에 그렇게 서글프게 울지.'

 
- 경희, [우리들의 이야기 : 여자로 사는 남자 이야기], <BUDDY> 15, 1999.5., 48쪽.

 

 
 
따라서 이는 겉으로 보이는 성별 전환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고,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만큼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 결과였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진짜 자신'이 되고 싶은 욕망은 중요한 것이며, 이는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에게 있어 여전히 중요한 삶의 핵심이자, 인권운동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 전환 수술은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서라도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될 그런 절박함과 진지함이 필요한 것이다.
 
- 김비,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성 전환 수술, 끝이 나닌 새로운 시작], <BUDDY> 18, 2000.11., 129쪽.

 

 

 

성전환 수술한 남성의 이야기가 나와서 읽어드렸는데 그 내용을 다 들으시고 엄마가 하신 말씀은 언제까지나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얼마나 자기 인생을 사랑했으면 꼬추를 띠어 버리겠니?"
처음엔 말투가 웃겨서 한참을 웃었는데 뒤에 머리속을 계속 두드리는 생각은 난 내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 joyce, [호주에서 날라온 편지 - 엄마와 애인과 나], <BUDDY> 18, 2000.11., 41쪽.

 

 
 
그리고 나아가서는,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수술을 했느냐 안했느냐로 나누는 것 또한 폭력적인 일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수술엔 많은 금액과 건강상의 위험이 감수되는 것인 만큼, 수술을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수술할 것을 강요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수술 여부의 '결과'만 가지고 트랜스젠더의 존재나 위계를 결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정체화 과정을 주목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수술 여부'로 결정하려는 사회의 욕망은 예전부터 존재했고, 특히 개인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법'의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져 왔습니다. 가령 아래의 기사에서 보듯이, 1999년 2월 20일에는 심지어 외과 수술을 한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조차 "염색체"가 일반 여성의 그것과 맞지 않기 때문에 법적인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6월 22일에는, FTM 트랜스젠더의 호적상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꾸는 조치가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에 의해 허가되었는데, 판결의 이유는 성별 판단에서 "염색체와 같은 생물학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1)
 
 
 

 

성전환수술로 여성의 생식기를 가졌더라도 이는 성형수술의 결과일 뿐 여성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지난 20일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오세립 판사는 지난 1월 20일 임모씨(25)가 여성으로 인정해달라며 법원에 낸 성별 정정 신청을 "외과적 수술내용은 여성과 일치하는 일부의 해부학적 구조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할 뿐 여성의 염색체구조도 갖추지 못해 우리 사회의 상식이나 가치관에 비춰 완전한 여성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이를 기각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자기 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무시한 채 오로지 '염색체'만으로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침해라는 의견도 높다. 
 
- [토픽! 토픽? : 내 성별은 법원이 결정한다?], <BUDDY> 13, 1999.2., 10쪽.

 

 
 
한편 이 역사적인 성별정정 허가 판결은, 그 기준을 오직 트랜스젠더의 '외과적 성기 수술' 여부에만 매어두었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문제를 품고 있는 판결이기도 했습니다. 하여 2013년 3월 15일에는, 성기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5명의 FTM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도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법원의 중요한 판결이 있게 됩니다.2) 그러나 그 이듬해인 2014년 6월 15일, 병무청에서는 이미 병역면제 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 MTF 트랜스젠더에게, '수술된 성기 사진', 즉 "여성화"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하며 병역면제 취소 처분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성별 정정에 있어 무려 타인이 들여다보는 '외과 수술'의 증거가 여전히 굳건한 법적 기준으로 통용되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BUDDY>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과거에 비해 다소 호전된 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이 사안에 대한 몰이해와 부당한 법적 기준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유지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성과는 소중하지만, 앞으로 변해가야 할 사회적 인식과 법제도의 몫이 여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성별" : 트랜스포비아와 여성혐오
 
 

 

혹시, 우리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이름에 너무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남자가 되는 일도, 여자가 되는 일도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의 인간의 몫을 다하며 사는 일은 아닐까. 그저 '사람'이라는 이름의 삶을 그들에게 부여하기에 이 인간들의 사회도,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생각들도 너무나 편협했던 것은 아닐까?
 
- 윤(나우누리 퀴어모임 레인보우 회원), [Dr. Queer: 트랜스 섹슈얼이라는 이름을 버려라], <BUDDY> 3, 1998.4.20., 25쪽.

 

 
 
사실 거의 모든 성소수자들이 갖는 꿈은, '우리도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이 반드시 인정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운동적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온전한 인간'으로 나를 대우해달라는 외침이 그 속에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성애자가 인간으로 대우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적 지향이 우회되지 않고 반드시 인정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단계가 빠진 '인정'은, 마치 "동성애만 포기하면 사람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보수 기독교도의 말만큼이나 실은 혐오로 가득찬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가 인간으로 대우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남성/여성적' 성별 정체성이 우회되지 않고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며, 그 성별의 인정이 당사자 스스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핵심이라는 점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 얘기를 좀더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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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트랜스젠더를 알자" (<BUDDY> 11, 1998.12., 18쪽.)
 
 
쉬운 예를 들어, 여기 한 게이가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이 게이에게 '성별'이란, 혹은 '여성', '여성성'이란 뭘까요? 이 게이는 가끔씩 동료 게이가 선보이는 여장 드랙쇼도 보고, 게이 친구들끼리 '여성스러운' 어투와 몸짓으로 끼를 부려도 봅니다. 이런 행위들이 재밌는 이유는, 첫째로 일군의 게이들이 '남자다움'의 벽을 깨고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성스러움'을 속시원히 드러내는 면이 있기 때문일 테고, 둘째로 자기가 그렇게까지(!) 여성스런 게이가 아니라 해도, 그런 끼를 떨어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남성스러움'의 굴레를 보란듯이 까부수는 모습이 통쾌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러한 것들은 게이가 가질 수 있는 유쾌한, 또 정당하고 이유있는 관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다보니 이 게이는 마치 여느 이성애자 남자들보다는 '여성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앞서 보았듯 그가 연출하고 수행하는 '여성성'은 게이의 맥락에서는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은 일견 떳떳한 자긍으로 자리매김됩니다. 그리고 이 게이 앞에 한 명의 MTF 트랜스젠더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딱 떨어진 여장을 갖춘 트랜스젠더로군요. 가끔씩 여장도 하는 친구 게이들을 떠올리며, 이 게이는 늘 하던 대로 트랜스젠더와 재밌게 끼를 떨며 놉니다. 그러다보면 그는 이 트랜스젠더가 가진 여장이란 것이, 게이의 여장이 그러한 것처럼 왔다갔다 할 수도 있고 좀 여성적이 됐다 남성적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나아가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더 전복적이고 바람직한 게 아니겠나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날 이 게이는 함께 놀던 MTF 트랜스젠더에게, 가끔씩 너도 그만 내숭(!) 떨고 본연(!)의 '남성스러움'을 좀 보여보라는 농담을 걸칩니다. 그 말을 들은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 아무 이해가 없었단 걸 드러낸 그 게이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의 관계를 끊게 됩니다. 갑자기 연락이 끊긴 그는 뭘 그런 것에 예민해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채로 지내게 되고, 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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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Y> 5 (1998.6.) 표지. 오른쪽은 MTF 트랜스젠더 '마리'님.
 
 
이 게이가 벌인 실수는 무엇일까요? 다름이 아니라 그는 MTF 트랜스젠더의 '성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피상적으로 겪은 '여성성'에 비추어, 성전환이라는 이름의 '성확정' 수술까지 고민하는 MTF 트랜스젠더가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한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가볍게 넘긴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해 MTF 트랜스젠더의 '여성'이란 '성별이' 자기 눈에 조금도 진지해보이지 않는다면, 하여 임의적일 수도 있을 그 화장과 의상을 벗기거나 침범하고픈 "전복"과 "횡단"(!)의 욕망이 든다면, 그 사람은 어떤 동성애자더러 "성정체성은 왔다갔다 하는 것이니만큼 이성애자로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이왕이면 탈반해서 사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족속이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성적 지향을 '정체화'한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몸으로부터의 이물감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성별을 '정체화'한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동일한 무심함이자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일군의 게이들이 (자신과 타인의)'성별'에 진지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점에서, 게이가 어쨌든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점이 새삼 상기돼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일군의 게이들이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했을 뿐, 성별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여성이 된다는, 아니 본래의 내 '여성'으로 돌아가길 결단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를 수가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여성 일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별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성별의 위계 속에서 기득권자인 남성일 수 있었기에 거기에 무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돈이 많으면 계급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없고, 좋은 대학을 나왔으면 학벌주의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없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처럼요. 그런 면에서 게이들은 어쩌면 '성별'에 대한 감각을 자주 접하는 이성애자 여성, 나아가 어떤 경우엔 여성들을 자주 접하는 이성애자 남성들보다 더, 트랜스젠더의 '여성/남성' 정체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닌게 아니라, 어떤 게이들은 '여성'에 대해 무심함을 넘어 아예 '여성'을 정말로 혐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왜 여성을 혐오하는 걸까요. '여성스러움'의 권력, 그러니까 연애에서 뭔가 밀당의 파워가 생기거나, 여느 남자들이 다 자기를 주목해야 마땅하다는 식의 애티튜드나, 그런 것들을 그야말로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거머쥘 수 있는 그 '노난' 팔자에 배알이 뒤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지는 그런 여성들이 자신이 사모하는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연적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여성혐오의 표적이 되는 '여성성'의 면모들은, 주로 20-30대의 여성,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여성성일 뿐이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여성 일반'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빛좋은 '여성성'과 달리, 실제 여성이 경험하는 '여성성' 가운데는, 으레 그렇게 살기 마련인 것 같은 가사 노동의 부하, 자녀 양육의 책임, 남성노동자의 그것보다 일반적으로 낮은 임금, 남성노동자의 그것보다 일반적으로 더 폭이 좁은 직업 선택의 현실도 포함되어 있지요. 여성혐오가 주로 대상으로 지목하는 전자의 '여성성'에 비해, 여성의 현실에 보다 가까운 후자의 '여성성'은 즐겨 외면되기 쉽습니다. 특히 성별의 위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안 느껴도 되는 사람일수록 이런 외면에 쉽게 매혹되지요. 
 
이렇게 깨끔한 걸로만 골라진 여성성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과, 다양한 여성성의 음양을 포괄하여 '여성'으로 산다는/살기를 결단한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더불어 MTF 트랜스젠더가 스스로 정체화하는 '여성'의 내용 또한, 전자 뿐만이 아니라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 후자의 면모까지 함께 포괄하는 것임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성별에 얽힌 다층적인 부분을 한데 묶어 해량하는 것을 뜻합니다.
 
 
 
 
4. "정체성" : 유동적이기에 고정적인
 
 

 

트랜스젠더들은 정신적인 성이 신체와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완벽한 성이 되길 원(하며) [...] 자신을 완벽한 한 사람의 여성(혹은 남성)으로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 그래서, 보통 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는 여자보다 더 여자답고, Female to Male(여->남) 트랜스젠더들은 남자보다 더 남자같은 인상을 준다.
 
- [트랜스젠더를 알자 : 나는 트랜스젠더인가 - 트랜스젠더로서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들], <BUDDY> 11, 1998.12., 20쪽.

 

 
 
여기까지 오면 가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어떤 트랜스젠더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남성성, 전형적인 여성성의 수행이, 되레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가운데 어느 한쪽임을 고집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섞여 있는 중간 지점의 지분을 강조하고 실제 사례를 부각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이것은 일견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회에서 남성처럼 되어야 해, 혹은 여성처럼 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권력은 분명히 존재하지요. 이는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모두 일정 부분 경험하는 이분법입니다. 나아가 이상화된 여성성과 실제 여성이 다르다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는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에게도 똑같이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혼동되는 경우라든가, 그 이분법을 깨는 중간의 선택항은 그만큼 전복적일 수 있고, 바람직할 수 있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뜨린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더불어 트랜스젠더 가운데에도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그렇게 정말로 "횡단"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분들의 존재와 활동은 분명 박수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김비)"만약 남녀가 딱 양분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누어진다고 본다면, 가령 육체적 성별과 정신적 성별이 그 스펙트럼의 극과 극에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라면 어떨까요? 그 이질감의 간극은 엄청나게 클 텐데, 이런 경우에 수술이 필요하죠."
 
- 한채윤,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여성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된 것일뿐", '못생긴 트랜스젠더'에서 '글쟁이 터프걸'로 자신의 삶을 보듬어가는 김비 이야기], <BUDDY> 21, 2002.11., 32-33쪽.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삶의 방식 또한, 본인의 삶의 궤적 속 여러 유동적인 변화들 끝에 그러한 "횡단"적인 형태로 '고정'된 어떤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렇게 살기로 한 것 또한 만만찮은 결단과 '정체화'의 힘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유동적인 변화들 끝에 남성, 혹은 여성 양 극점에 서서 이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추인한 사람들 또한, 그것대로 진지하고 눈물겨운 정체화의 결과로 마땅히 존중받아 옳은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성정체성은 '유동적'입니다. 긴 시각에서 보면 정체성은 고정적이지 않고, 나아가 고정적이지 않은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고정적이지 않은 세월을 넘어 바로 여기 눈앞에 선 사람의 성정체성은, 그 시공간 안에서만큼은 강고한 것입니다. 그걸 누가 쉽게 뒤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폭력적인 오만이며, 정체성의 '유동성'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 소치입니다. 정체성의 '유동성'을 무슨 댓바람에 낙엽 뒤집히듯 휘딱 넘어가는 가변성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유동적이었던 과정들과, 그 과정에서 (그 형태가 횡단적인 것이 됐든 고전적인 것이 됐든)자신의 '정체화'에 어떤 정주점이 생기게 되기까지 그 사람이 겪어야 했을 삶과 고통의 깊이를 모른다는 고백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어떤 게이가 남자의 몸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을 추인하는 과정의 공포를 안다면, 남자의 몸으로 여자인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마음먹는 과정의 공포 또한 이해하는 게 마땅한 것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남성/여성으로 정체화된 성별(젠더)을 모르거나 건너뛴 채로 트랜스젠더 성별 정체성의 '유동'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한 개인이 정체성의 유동을 몸소 겪어 잠정적으로 정체화된 어떤 결과를 두고 그것이 이분법이냐 아니냐를 먼저 논하는 건 부적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회학이 전공인데 드랙 쇼를 보고 있으면 성해방 운동 같은 느낌도 받는다. 드랙 쇼를 보면서 저 사람들이 남자일까, 여자일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성별은 중요치 않고, 그들은 어차피 사람들이 가진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그것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 테고.

 
- 잎파리(가명·26), [나는 드랙 쇼를 이렇게 생각한다 : 남자도 여자도 될 필요가 없다. 사람은.], <BUDDY> 14, 1999.4., 46쪽.

 

 

 

트랜스젠더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성의 복장만을 입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다 화장을 하고 치마입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트랜스젠더 역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트랜스젠더는 이성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 남성 그 자체이므로 일반적인 여성이나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 [트랜스젠더를 알자 : 트랜스젠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BUDDY> 11, 1998.12., 21쪽.

 

 
 
그런 점에서 위의 두 인용은, 일견 비슷해보이는 게이 드랙 아티스트와 MTF 트랜스젠더가 어떤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성성/여성성'의 권력과 강제를 깨부숴야 한다는 것-그런 관점에서 남성/여성의 성별은 유동적이고 그 사이 다양한 정체성의 지분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유동성의 파고를 넘어 한 개인이 '남성/여성,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자신의 성별을 '정체화'한 과정과 결과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이 점이 혼동되지 않았더라면, 여성성을 천박하게 공격하면서 보석 차고 싶고 예쁜 옷 입고 싶고 남자에 기대 편히 살고 싶어서 MTF 트랜스젠더가 된 게 아니냐는 얘기라든가, 남성성을 근엄하게 공격하면서 가부장제의 기득권자가 되고파서 FTM 트랜스젠더가 된 게 아니냐는 식의 '트랜스포비아'스런 언급은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이 느끼는 성별보다는 남이 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보이는 성별'을 더 중요시한다.
 
- 윤선후, [또다른 성을 꿈꾸는 사람들 : 어느 성전환 여성 골퍼의 우승], <BUDDY> 16, 1999.9., 166쪽.

 

 

 

내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를 갖는 것이고 나의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온전한 남자로 여겨주는 여자를 만날 때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나는 남자의 권위나 성역할이 부러워서 남자가 된 것이 아니다.
 
- 혁이, [트랜스젠더를 알자 : 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 혁이가 말하는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은'], <BUDDY> 11, 1998.12.,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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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무대에 오른 지_보이스 : 2015.10.10. @덕수궁 대한문
 
 
2015년 10월 1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이성애자 비장애여성들 외에도 레즈비언, 장애여성, MTF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다양한 성정체성의 사람들이 어째서 도로(!) '여성'이 되고자 했는지, 또 심지어 그런 자리에 게이코러스 지_보이스는 왜 가서 노래를 했는지. '성별'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게이들이라면 여성스럽든 결혼을 않든, 일반적인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겠다는 공포를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젠더(성별) 질서 안에서의 '남성'의 위치 가운데 자신이 비교당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 젠더 질서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그에 긴박된 채 살아가는 (시스젠더/트랜스젠더)'여성'에 대해서도 때론 신실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견 잘 뻗어나가고 있는 게이인권운동의 향후 전망은, 이 땅의 게이들이 그런 부분들을, 자신과 더불어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만큼 실감하고 또 무언가를 실천해가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낯설 수 있지만, 그것들은 애초에 달라서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공들여 알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LGBT'라는 정체성 범주가 여태껏 지켜오고자 했던 핵심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어떤 게이가 트랜스젠더의 낯선 성별 정체성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은, 게이 스스로 여느 이성애자들에게 자신을 그토록 알아달라고 토로했을 때, 누군가 그에 조용히 귀기울이던 그 때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식으로 서로 이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버디>에서는 이번 특집기사를 깃점으로 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코너를 상설화하기로 했다. [...] 혹 '대체 동성애 전문지에 왜 트랜스젠더 기사가 나오냐'고 하실 분은 없으시겠지만. 물론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이 땅 한국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성적 소수자들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일반인들의 편견과 맞서 싸우거나 멸시와 차별의 사슬을 분쇄하기 어려울 것이다. <버디>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친구가 되는 소박한 장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길 꿈꾼다.
 
- <BUDDY> 11, 1998.12., 24쪽.

 

 
 
 
1) 이 판결이 나오던 즈음인 2006년에 "성전환자 성별변경관련 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가 구성되어 이 사안에 대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그 해에 "성전환과 인권실태 조사"가 진행되어 자료집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2) 이 소송은 2011년 8월에 조직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SOGILAW)의 기획으로 진행된 것이며, 이 연구회는 2013, 2014년 <한국 LGBTI 인권현황>을 발간하고,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2012-2014),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2014)를 진행하는 등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친구사이 회원 왘킹님, 클럽 Le Queen의 차세빈님에게 각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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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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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v 2015-10-31 오전 08:01

와..이번 글도 역시나 좋아요!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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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v 2015-10-31 오전 08:01

실제로 한국에서는 '성을 전환한다'라는 의미로 성전환 수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국에서는 성을 다시 '재정립한다, 혹은 확정한다'라는 의미의 'Reassign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한 철자 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성 전환 수술'이라는 말이 제3자적인, 전혀 시술받는 사람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편협한 표현인 반면, Sexual Reassignment Surgery(SRS)라는 표현은 시술을 받는 사람의 혼란과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한 표현인 것이다.

이 부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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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v 2015-10-31 오전 08:02

+ 앞뒤 맥락을 합쳐서 // 한국 사회도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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