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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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8
: 맘 놓고 친절할 수가 없어
우리 집에 오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걸까. 퇴근 즈음해서 출발할 때 연락을 주겠다던 회사 동료로부터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없자, 황당하고 화도 좀 났다. 갑작스레 서울에 방을 빼게 되면서 당분간 지방 어디서 출퇴근을 한다기에 나름 호의를 베풀었던 것인데. 전화를 해도, 카톡을 남겨도, 끝내는 회사 메신저까지 동원해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이 방법 저 방법 동원해 연락했다고 적어놓고 바로 이런 말을 쓰기 좀 민망하지만...) 이거 좀 무례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이상하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요구하는 쪽에서는 참 난처한데, 호의를 베푸는 쪽에서 먼저 흔쾌히 말해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들이 있지 않나? 회사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계약직 직원분이셨는데, “달호님네서 며칠 신세 좀 져도 될까요?”보다는, 역시 내 쪽에서 먼저 “원철님 어떻게 내리 일주일을 기차 타고 왔다갔다해요, 우선 하루 이틀이라도 저희 집에서 자고 가세요~”가 훨씬 수월하겠지. “진짜요? 진짜 자고 가도 돼요?”라고 되묻기에 “네, 진짜 자고 가도 돼요”라고 말해줬다. 고민해보겠다고 해서, 일부러 두어 차례 정도 더 “원철님, 진짜 자고 가도 돼요, 그냥 부담 없이 말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적당히 과한 친절”이 컨셉인 인간인데, 거기에 따로 뭔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다. 꿍꿍이가 있으면 되려 얼어버리는 타입이므로, 내 호의에 “다른 뜻”이 있기란 쉽지 않다. (굳이 굳이 내 호의 뒤에 숨은 “다른 뜻”을 찾아야 한다면, 그건 그냥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순진하고 쓰잘데기 없는 욕심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된 시골 청년을 자취방에 들이며, “돌쇠야, 밤이 깊은데 잠이 오질 않는구나”하는 어이없는 BL을 꿈꾸는 건 애초에 들어맞지가 않는 이야기란 거다. 원철님이 정말 뭐라도 되었거든, 쌀밥대령은커녕, 나무 뒤에 숨어 몰래 훔쳐보다 날개옷이나 쌔볐을 것이다^^;;

심심하면 한 번씩 우리 부서 자리에 놀러와 떠들다 가는 옆 부서 동료 생각이 났다. “어머, 원철님 진짜 달호님 좋아하나고요~” 협업이 잦은 옆 부서 직원들은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직원들에게 “형, 형”하며 잘 따르는 원철님을 꼭 그런 식으로 놀리곤 했다. 하루는 방앗간참새 동료가, “아 맞다, 달호님도 여자친구 없으시잖아요, 가능성을 열어두세요, 요즘 세상에~”하고 떠드는데, 아니 내가 여자친구가 없지 뭐 남자친구가 없나, 연애 잘만 하고 있는데, 가능성은 무슨 개뿔 가능성? 그래도 겉으로는 빙구웃음이나 지었다.
최종보스(엄마)에게의 커밍아웃까지 마친 지금, 뭘 애써 감추는 건 커밍아웃을 하는 것만큼이나 번거로운 일이다. 운 좋게도 지금껏 회사생활을 하며 늘 한두 명 쯤은 게이, 레즈비언, 바이 동료를 만날 수 있었고, 헤테로 동료들에게도 좀 잘 맞는다 싶으면 냅다 커밍아웃을 했다. 그런데도, 제멋대로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떠드는 방앗간참새 동료에 대한 내 맘은 “제발 그냥 니 자리 가서 일이나 해줘ㅠ”였다. 퀴어-프렌들리한 자신을 은근하게 드러내준 것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프렌들리하면 가서 인권단체 후원이나 좀 할 일이지, 왜 뜬금없이 시골청년과 나를 엮으며 요즘세상타령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아무리 커밍아웃에 거리낌이 없대도,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차이는 여전히 하늘과 땅이세요...;;)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걸 숨기지 않은 건, 나한테 중요한 사람들에게 나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한 거였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아무런 추측이나 해보라고 그런 게 아니었다. 근데 뭐, 언제라고 사람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줬던가. 내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앗간참새 동료의 요즘세상타령을 듣고 있자니, “아냐, 원철님은 게이란 게 실존하는지조차 모르는 순수시골청년이야”라고 말 안 되는 정신승리를 계속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원철님한테 챙겨줬던 쪽지와 초코바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 잔뜩 쟁여놨던 에너지바 하나 줬던 건데... 그냥 프로젝트 하면서 몇 번 틱틱댄 게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프로젝트 수고했다고, 몇 자 적어준 건데? 일반들끼리는 쪽지에 뭐 안 적어주나? 그게 부담스러워서 혹시 지금 말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간 건가? 아님 “진짜 우리 집에 와도 돼요”라고 거듭 말해준 게 부담스러웠던 건가? 설마... 내가 자기 좋아하는 줄 아나? 대충 그런 식으로 혹시나의 향연 속에서 절절 매게 된 거였다.

요즘 세상에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을 리도 없고, 대체 갑자기 연락이 끊겨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 일이 무어란 말인가. 아니, 원철님, 지금 원철님이 제 호의를 오해하시면 오히려 제가 좀 황당할 일인데, 그냥 오면 온다, 안 오면 안 온다 말을 해주시라고요~, 라고 톡을 보내볼라는 맘이 됐다가도, 무슨 짝사랑하는 잭디남하고 기싸움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현타가 왔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쉬운 입장은 아니었다. (나도 아주 바보는 아니다.) 게이고 혹시나고 나발이고, 나도 그냥 현생이 중요한 사람이므로, “원철님 연락이 안 되네요, 집으로 가신 것 같은데, 내일 회사서 봬요~” 문자를 남기곤 불을 끄고 누웠다.
기왕 자려고 누웠으니 쓰잘데없는 생각을 좀 더 해보기로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속 편히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는 내가 상대를 (감정적 혹은 성적, 이하 생략!) 끌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그리고 둘째는 상대도 나를 끌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이성애사회에서는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무튼간 당연한 것이니까, 적어도 내가 남자라면 같은 남자들에게는, 여자라면 같은 여자들에게는 맘 놓고 친절할 수가 있다.
근데 내가 원철님을 자취방에 부르며, 혹시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고 한들, 그렇다고 다른 여자 동료들에게 자취방 문을 기꺼이 열어제낄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친절을 베푼답시고 여자 동료에게 “제 자취방에서 자고 갈래요?”라고 제안했다가는 따귀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앞서 이야기한 두 조건에 선행하는 더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상대를 끌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란 것, 그리고 상대 역시 나를 끌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리란 게 둘 사이에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잇의 핵심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데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성적지향이 한 마디 설명 없이 언제나 명쾌할 수 있다는 데에도 있다.

누워있는데, 문자가 한 통 왔다. 달호님 죄송해요, 친구랑 만나서 저녁 먹고 정신없이 노느라 연락을 못 드렸어요. 지금 가는 중이에요. 데리러 나가서 딱 보아하니, 술 먹고 놀다 이 시간됐다 말하기는 본인도 염치가 없나보지? 그래도 여전히 뭐 없으니, 그냥 호구웃음이나 지으며 이 철없는 남직원을 집에 들여왔다. 옷을 훌렁훌렁 잘도 벗더니, 다음날 회사에서는 어제 달호님네서 자고 왔는데, 달호님네 집에서는 향기가 나네 어쩌네, 저한테 침대도 양보해주시고 천사가 따로 없다 어쩐다... 여기저기 달호님 사랑해요~ 홍보를 하고 다니는데, 내가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싶어서, 서랍에서 초코바를 한 움큼 꺼내줬다. 그래도 좀 억울해서, 원철님 술 먹다 완전 늦은 얘기도 해야죠, 하고 같이 넉살 좋은 척 한 마디 얹었다.
어릴 때 내가 억울해하면, 어른들이 너만 떳떳하면 된 거라고 그랬다. 억울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나름대로 유용한 위로였다. 근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가끔 잘 맞는다 싶은 여자 동료가 있어서 같이 끼 떨고 놀고 있으면, 저는 달호님이 그 여직원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요, 하는 황당한 말을 듣곤 했다. 어이없는 와중에 적당히 안심할라치면 또 방앗간참새 동료 같은 사람들이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달호님은 다른 남자분들하고 좀 다르다는 둥 어쩐다는 둥... SNS에 커밍아웃을 해도, “그래서 달호 게이야?”하는 세상인데, 나 혼자 백날 떳떳해도, 맘 놓고 친절하기가 말만큼 쉬울 리는 없다.

(그림_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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