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23 김조광수 : 골드게이 다이어리



인터뷰 및 정리 : 라이카
사진 : 차돌바우

안녕하세요. 2010년도에 커밍아웃 인터뷰를 담당하게 된 라이카입니다. 잘 읽어주세요.^^ 이번 인터뷰는 게이 커뮤니티나 인권단체 혹은 자신의 일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게이들’ 이라는 주제로 진행이 되었구요, 이 주제로 두 명의 인터뷰가 실시되었습니다.

첫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김조광수님 입니다. 영화제작사 ‘청년필름’의 대표이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선생님이면서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활동가이며 얼마 전부터는 퀴어영화를 직접 만드는 감독님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히신 분입니다. 4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시죠. 늘 유쾌해 보이는 김조광수 형은 말합니다. 자신이 커밍아웃을 하고 이렇게 유쾌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아픔의 과정이 있었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고 강조하십니다. 자 그럼 김조광수님의 에너지에 푸욱 한번 빠져 보아요.~  


라이카 :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넘 감사드려요. 제가 광수형을 처음 뵌 게 2003년 친구사이 행사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때가 몇 살 때쯤이었나요?

김조광수 : 2003년도였으니까 40은 안 되었고 30대 후반 쯤이었겠네요.

라이카 : 그 당시 친구사이의 분위기는 그 정도 나이에 해당하는 활동가가 드물었고, 활동하다가도 그 정도 연륜(?)이 되면 활동이 뜸해지는 시기였는데 제가 본 광수 형은 적지 않은 나이에 혜성처럼 친구사이에 등장해서 그 어떤 젊은 친구들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셨고 친구사이 이외의 영역에서도 늘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이렇게 열심히 사시게 된 동기랄까 원동력은 뭘까요?

김조광수 : 음, 게이로 사는 것도 그렇고 영화일도 그렇게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아마 제가 욕심이 좀 많아서일 것 같네요. 영화일만 해도 영화제작자로서도 즐겁게 지냈지만 이것저것 다른 활동에도 욕심이 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감독도 하게 되었고 영화 관련 단체 쪽 일에까지 활동을 확장하게 된 것 같아요.

라이카 : 그럼 친구사이 쪽 일은요?

김조광수 : 친구사이의 경우에는 친구사이 초창기 때 한 94, 95년도 때쯤에 몇 번 방문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는 친구사이가 좀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 당시 활동가들보다 나이가 좀 많은 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사이를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밖에서 보니 꾸준히 활동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다시 기회가 되면 활동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차밍스쿨’이라는 강좌 프로그램을 계기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동안 쌓여있던 활동 욕심이 봇물 터지듯이 폭발된 것 같아요.

운동 판에서 끼를 부리다.


라이카 : 열심히 살아간 과거를 추적(?)하다보면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듣자하니 학생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셨던데요, 지금이야 예술계에서 사회적인 발언도 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낯설지 않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연영과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로 추측이 되는데 학생운동에 가담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김조광수 :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하고 독서토론 비슷한 모임을 했었어요. 그 친구들이 각기 다른 대학에 가게 되었고 대학은 다르지만 독서토론 모임을 계속 꾸준히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모임 중에 누나가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열심히 학생운동을 하는 누나였었고 그 누나를 통해 의식화가 좀 되었어요. 그리고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죠. 제가 83학번인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 진실을 알게 되면 예술이고 뭐고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라이카 : 그럼 시작은 대학교가 아니었군요.

김조광수 : 그렇죠. 그런데 어쨌든 운동은 학교에서 해야 하는데 그 당시 학교조직에서 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일단 연영과 선배들 중에 운동을 하는 분들이 없었고 공부도 다니던 대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온 데다가 내가 좀 리버럴해 보이잖아요.(웃음)

라이카 : 빨간 티셔츠 입고 모자 쓰고?

김조광수 : 맞아요. 그래서 학교 운동 조직에 적응하기가 좀 쉽지 않았어요. 그 당시 운동 분위기의 경직성과 제 성향이 좀 충돌했었던 거죠. 심지어는 아주 오랜 동안 프락치로 의심받기도 했어요. 암튼 그런 오해와 충돌들이 제 오기를 발동시켰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활동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결국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운동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그런 바뀐 분위기가 오히려 저와 잘 맞았고 열심히 활동하다가 인문대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구속이 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면회 오셔서는 이제 프락치 의심은 받지 않게 되었다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씀하신 게 생각이 나네요.(웃음)

라이카 : 친구사이도 인권단체고 인권 운동의 성향을 가진 활동들을 하고 있는데 학생운동과 비교를 해 본다면요?

김조광수 : 일단 학생운동은 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까 요구를 알기도 쉬웠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측면이 있는데 동성애자 인권 운동은 너무 광범위한 것 같아요. 친구사이에 나오는 사람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야 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성애자도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이성애자들을 대상으로도 사업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학생운동 때 했던 것들, 즉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든지 분위기를 유도한다든지 하는 경험은 친구사이에서도 잘 작용하는 거 같아요. 어떤 조직이든 분위기를 잡고 많은 대중 앞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은 꼭 필요하잖아요.

라이카 : 지보이스 공연 사회 같은?

김조광수 : 그렇죠. 퀴어문화축제 사회도 같은 맥락일 거구요.

‘후회하지 않아’가 커밍아웃의 원동력이 되다.


라이카 : 이제 커밍아웃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홍석천 씨 이후로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게이가 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어떻게 대중들에게 커밍아웃을 하시게 된 건가요?

김조광수 : 영화제작일을 하면서 주변 지인들은 제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았어요. 영화제작을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캐스팅도 해야하고 투자도 받아야 하는데 나로 인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늘 걱정이 많았죠.

라이카 : 그러다가 결심을 하시게 된 거는...

김조광수 : ‘와니와준하’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무대 인사 등을 다닐 때였어요. 한 스포츠지 기자가 느닷없이 나한테 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맞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당황해서 아니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 뒤로 두세 번 전화로 계속 물어보는 거예요. 세 번째 질문에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집에 와서는 밤새 울었어요. 난 내가 게이인 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당당하지 못하고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정말 혼란스러웠죠. 그래서 언젠가는 대중들에게도 당당하게 나의 정체성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분홍신’이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퀴어영화인 ‘후회하지 않아’를 제작하고 무대 인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커밍아웃을 하게 된 거죠.

라이카 : 옆에서 지켜보기에 광수 형의 커밍아웃 이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일단 제작자에서 감독으로 활동영역을 넓히신 데다가 지금까지 감독하신 영화들이 전부 퀴어영화잖아요?

김조광수 :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 이메일이나 쪽지, 기타 방식으로 많은 격려를 받어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달라는 내용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더군요.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게이들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게 부담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을 다잡게 되는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게이들에게 힘이 되고 이성애자들의 편견을 없앨 수 있는 퀴어영화들을 많이 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는데, 정작 퀴어영화를 만들 감독을 찾기가 힘이 들더군요.

라이카 :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 주세요.

김조광수 : 커밍아웃한 게이 감독들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이성애자 감독들은 퀴어영화 만들기를 너무 부담스러워했어요. 그런 와중에 에잇, 내가 찍어봐 하는 데까지 가게 된 거죠.(웃음)

라이카 : 그럼 대중적으로 커밍아웃 한 이후에 봉변을 당했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셨나요?

김조광수 : 특별히 그런 기억은 없는데, 사소한 일로는 목욕탕 갈 때 좀 불편한 게 있네요.

라이카 : 목욕탕이요?? 왜요?

김조광수 : 목욕탕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처음엔 반갑게 인사하다가도 문득 내가 게이인 게 생각이 났는지 자연스럽게 자신의 물건을 가리더라구요. 꼭 식도 안 되는 것들이 그래요.(웃음) 그 밖에는 인터넷에서 메일이나 홈피에 ‘이 호모삐리리야, 아직도 X빨고 다니냐?, 너 이번에 또 호모 X빠는 영화 찍었더라’ 는 등의 악플이 있는 거 정도.

아버지가 친구하고는 헤어지는 게 아니라고.


라이카 : 그럼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보죠. 집에는 언제 커밍아웃을 하신 건가요?

김조광수 : 생각처럼 그렇게 일찍 한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 게이에요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어요. 30대 중반 쯤 이었는데 그 당시 5년 정도 사귄 애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둘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서로의 집안 행사에 동반해서 다니기 시작했어요. 부모님이나 가족의 생일 잔치는 물론이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도 다녔죠. 그렇게 가족들에게 애인의 존재를 알리다가 동생들이 먼저 눈치 채기 시작했고 어머니한테도 “엄마 그 앤 친구가 아니에요. 평생 동반자에요.”라며 간접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된 거죠.

라이카 : 그것도 커밍아웃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김조광수 : 예. 막연한 거 보다는 아, 내 아들이 남자를 만나서도 행복하게 잘 지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안심을 시켜드리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방법인 것 같아요.

라이카 : 그럼 아버지에게는요?

김조광수 : 그 애인이랑 헤어진 후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구요. 그 애는 요즘 왜 오지 않냐고. 그래서 제가 헤어졌다고 했더니 친구끼리는 헤어지는 거 아니라며. 계속 그러시더니 그럼 다른 친구는 생겼니? 라고 물어보시더라구요. 그래서 아버지도 알고 계시구나 생각했죠.

라이카 : 아버지하고는 사이는 좋으셨나요? 게이들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데요.

김조광수 : 저도 물론 아버지하고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어요. 근데 이성애자고 동성애자고 아버지하고 사이 좋은 아들은 별로 없지 않나요? 소통의 어색함이 낳은 결과랄까.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맘이 너무 슬프더라구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슬픈 게 당연하겠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보니 더욱 죄송한 맘도 생기구요.

라이카 :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보다 커밍아웃을 늦게 하셨어요.

김조광수 : 20대 중반부터 아버지하고의 갈등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어요. 그 와중에 내가 커밍아웃까지 하게 되면 아버지하고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을 계속 해야한다는 자괴감이 계속 생긴 것도 사실이었구요.

라이카 : 학창시절은 어떠셨나요?

김조광수 : 앞에서도 얘기한 거 같은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내가 명랑하고 유쾌한 줄 알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쯤에는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었죠. 막연하게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방송이나 다른 매체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호모들 어쩌구하는’ 부정적인 것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 나는 부정적인 존재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2학년 때인가 반 친구 중에 한 명이 나에게 와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어요.

라이카 : 그럼 첫 연애가..

김조광수 : 그 친구는 식이 되지 않아서.(웃음) 그런데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 긍정해나가기 시작한 것 같이요.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던 와중에 안 그래도 운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때에 나의 정체성까지 밝혀지면 우리 조직에 큰 해가 되지나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되어 나의 성향을 억누르며 지냈었는데 그 때도 힘든 시기였었죠.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라이카 : 이제 영화 얘기를 좀 해 봐요. 광수 형이 제작한 영화 중에 ‘와니와 준하’라는 영화에 게이커플이 등장해요. 그런데 그전까지 나왔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생하고 인간적인(?) 게이의 모습이었는데 제작자인 광수 형의 입김이 있었나요?

김조광수 : 청년필름 식구들에게는 90년대 초반에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 후로 필름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게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동안 영화에 비추어졌던 게이들의 모습, 즉 희화화되거나 괴물처럼 그려지는 방법에 나보다 더 분노해 했었죠. 그런 자연스런 감정들이 영화에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라이카 : 그럼 제작한 영화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가 있다면.

김조광수 : 개인적으로는 아까 이야기를 나눴듯이 ‘와니와 준하’라는 영화가 내 취향과 맞아 애착이 가는데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여러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었던 ‘후회하지 않아’가 가장 애착이 가네요.

라이카 : ‘후회하지 않아’의 제작 성공 이후 직접 감독을 하시게 되었어요. 지금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직접 연출하셨는데 앞의 두 작품, ‘소년 소년을 만나다’(이하 소소만)와 ‘친구사이?’가 샤방샤방하면서 발랄하고 즐거운 퀴어영화였다면 이번에 세 번째 작품인 ‘사랑은 100도씨’는 도전적이면서도 좀 암울한 영화이더군요.

김조광수 : ‘소소만’과 ‘친구사이?’는 내 취향에도 맞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거 같아요. 처음 연출을 시작하면서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대중들도 좋아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택했던 거고 두 영화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면서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어요. 그런데 앞에서도 자주 언급했듯이 나를 포함한 게이들의 삶의 과정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밝음은 아픔이 동반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극복된 후에 올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죠.

라이카 : 개인적으로 ‘친구사이?’에서 석이 역을 맡았던 이제훈 씨의 연기가 인상 깊었어요.

김조광수 : 다들 그 친구를 실제 게이로 오해하고 질문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친구를 캐스팅하고 4개월 간을 꾸준히 호흡하고 연습하면서 생긴 결과예요. 카메라에 이제훈의 연기를 담고 나서 서로 토론도 하고 게이인 나 자신의 모습도 많이 보여주면서 차츰 캐릭터가 형성된 거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잘 봐줘서 기뻤어요.

라이카 : 이제 드디어 장편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고 들었어요. 살짝 내용을 공개해 주세요.

김조광수 : 물론 퀴어영화에요.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구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게이 커플과 레즈비언 커플이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게이 한 명과 레즈비언 한 명이 계약 결혼을 하면서 생기는 내용을 다룬 이전과는 다른 로맨틱코메디 정도로 보면 되겠어요. 전체적으로는 밝고 경쾌하지만 소수자의 아픔도 들어가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아요.

라이카 : 한 장면만 공개를 해 준다면요?

김조광수 : 결혼식에 게이코러스가 이성애자 합창단인 척 축가를 불러요. 그러다 고음 부분에서 살짝 끼(?)가 나오게 되고 하객들이 당황해하는.(웃음)

라이카 : 넘 재밌는 영화가 나올 것 같네요. 얼릉 만들어서 흥행도 대박이 나시길..^^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는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신다면.

김조광수 : 이성애자들에게 인터뷰를 하면 꼭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는 밝고 유쾌해보이는 데 진짜 행복하냐는 내용이에요. 사실 제작자, 감독이라는 허울은 좋지만 나는 돈도 없고 아직 월세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해서 당당하고 자신감도 붙었지만 가끔 불쾌한 일을 겪을 때도 있죠. 하지만 행복은 어떤 조건에서 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행복해질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동성애자들은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조광수님의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gwangsoo.com입니다.

이 인터뷰의 사진과 내용은 김조광수님과 친구사이의 동의 없이 다른 곳에 게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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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